712화
대검과 도끼가 부딪칠 때마다 귀가 울릴 정도의 굉음이 터졌다. 듣는 이들도 몸이 움찔거릴 정도였는데, 직접 무기를 들고 그 충격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일합을 나눌 때마다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쾅! 쾅!
두 번을 연달아 부딪친 후,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뺐다.
‘이런……. 만만치 않군.’
보리스는 검을 쥔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며 딱딱하게 굳은 손을 풀었다.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힘이라면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부친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밀린 적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와 대적하는 거한은 그런 보리스조차 버거움을 느낄 정도로 강했다. 힘만 놓고 봐도 동등한 수준이었는데, 그런 자가 기술까지 탁월했다. 보통 힘이 좋으면 그 힘을 믿고 싸우기 마련인데, 기술까지도 탁월한 수준까지 갈고 닦았다는 것은 거한이 무인으로서 최고에 가까운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했다.
‘할렌님…아니, 그 이상.’
보리스는 어렸을 적부터 군인에 뜻을 두었고, 부친인 군터 휘하의 무관들과도 질리도록 대련을 했었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실력에 맞는 상대가 없어 몇몇 이들과만 반복적으로 겨루었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는 할렌이었다. 부친인 군터를 제외하면 보리스가 겨뤄본 이들 중 최고는 할렌이었다.
그런데 저 거한은 그런 할렌보다도 강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인상적이기는 해도 놀랍지는 않았다.
‘세상이 넓은데, 어찌 인물이 없겠는가.’
할렌은 분명 상당한 실력자였다. 직접 겨뤄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부친 휘하 중 최고라는 살라스에 이어 두 번째로 꼽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부친을 따라 무수한 전장을 누벼온 역전의 용사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그조차, 엄밀히 따지면 무명의 군인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일개 주인 바크렌 내에서나 활약했을 뿐 아닌가. 그마저도 개인의 무명을 널리 떨친 일은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인가?’
명성이 곧 실력은 아니라고 해도, 실력 있는 자는 이름이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렇게나 까마득하게 보이는 부친 군터조차 북부에서나 조금 이름을 알린 무장에 불과하니, 제국 전역을 놓고 보면 얼마나 괴물 같은 이들이 많겠는가. 어쩌면 저 거한도 제국 서부에서 이름을 알린 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한들, 상관없지.’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나. 전장에서 적으로 만나 무기를 맞댔다면 중요한 건 오직 하나. 누구의 목이 떨어지는가.
쾅!
온 힘을 다해 날린 일격. 검보다 도끼가 조금 더 멀리 튕겨 나갔다. 보리스는 이를 악물고 충격을 버티며 공격을 이어갔다. 거리를 벌리지 않았고, 오히려 좁혔다. 상대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저돌적으로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한 것일까?
“후읍!”
그게 아니라는 것을 다음 순간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몇 번이나 그를 구해주었던 감각이 요란하게 경고를 보낸 것이다.
그 경고를 느끼자마자, 보리스는 다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새빨간 불길이 허공을 덮었다. 몸을 젖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불길에 휩싸였으리라.
‘뭐야!’
보리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기겁하면서도 검을 휘두르는 것은 잊지 않았다. 다만 제대로 힘을 싣지 못해 유의미한 성과는 내지 못한 채, 상대를 약간 밀어내며 거리를 만드는 데 그쳤다.
“…잡스러운 술수를 부리는군.”
다시 거리가 벌어지고, 보리스는 차가운 눈으로 거한을 노려보았다. 거한의 입가에 작게 일렁이는 불길이 보였다. 조금 전의 불은 저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 분명했다.
“쓸 수 있는 수는 모두 쓴다. 너도 각인으로 얻은 힘이 있을 것 아닌가? 이제 슬슬 꺼내지 그래.”
“흥!”
보리스는 냉소로만 대꾸했다. 굳이 그런 이능따위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알려줄 필요는 없다. 상대의 머릿속을 조금이라도 더 복잡하게 만들어야 할 판에, 왜 그런 남 좋은 일을 한단 말인가?
‘각인이라…어지간한 상급 장교 이상은 다 하나씩 가지고 있다더니.’
사실 그도 각인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지위가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보리스가 지금까지 각인을 하지 않았던 것은 기왕 한다면 좋은 것, 더 나아가서는 최고의 것으로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테리브란에 솜씨 좋은 술사들이 없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기술이나 지식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보리스는 보다 특별한 것을 원했다. 제국의 위장들이나 황실의 고위 무관들이 지니는 것 같은.
“흐흐.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나 보겠다.”
거한은 보리스가 각인을 지녔을 것이라 확신하는 듯했다. 보리스는 그런 상대의 착각이 고마웠으나 내색하지 않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나저나 덩치에 맞지 않게 좀스러운 힘이군. 기껏 각인까지 해가며 얻은 힘이 불놀이인가?”
“불놀이? 하하. 그런지 어떤지, 이제부터 직접 확인해봐라.”
콧방귀를 뀐 거한이 눈빛을 달리하며 거칠게 달려들었다.
쾅! 쾅!
도끼에 실린 힘은 여전했다. 받아치는 데만 해도 온몸이 저릿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거기에 기괴한 불길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버거움이 한층 더 심해졌다.
화륵!
불은 거한의 입에서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뜬금없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크기나 위력은 별 볼 일 없었다. 기껏해야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정도? 물론 그것만 해도 충분히 거슬렸지만, 그 불이 얼굴에 직접 닿기라도 하는 게 아닌 이상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또한, 그렇게 일어나는 불은 거한의 주변에서만 일어났다. 거리를 벌리고 있으면 불길은 그에게 닿지도 못했다.
‘방심할 수는 없다. 속임수일지도 모르니.’
보리스는 잠시도 마음을 놓지 않았다. 눈앞의 거한은 분명 이제껏 맞닥뜨린 적 없는 최고의 강적이었다. 몸짓 하나, 숨 한 번 쉬는 것에도 집중했다. 평상시에는 절대 발휘할 수 없었던 집중력이 그를 최고조로 이끌었다.
* * *
“나쁘지 않군.”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아낀다는 것은 말 자체를 적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표현함에 있어 신중한 편이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현 전황을 살피며 나쁘지 않다고 했다는 것은, 전황이 썩 괜찮게 흘러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전후방의 협공은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매우 성공적이었다. 적은 후방의 급습에 당황했고, 그 혼란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협공을 당했다. 잘 구축해놓은 진지 덕분에 그럭저럭 버티고는 있으나 기세에서는 완전히 밀려버렸다. 이대로 계속해서 몰아붙인다면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런데, 좌군은 왜 멈춘 거지?”
“적의 저항이 거셉니다.”
“음?”
“로뮤가…….”
“아아. 그래. 그자가 있었지.”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눈빛이 변했다.
투마르니 로뮤. 그자의 도끼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매번 전투가 일어날 때마다 선봉에 서서 달려오던 돌격대장.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무공만큼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한 자였다. 이름 높은 티브리악 가문에도 그 정도의 무인은 없었다. 아무리 냉정하게 보아도 한 주를 통틀어도 손꼽힐 만한 용맹임이 분명했다.
“애를 먹는 것도 당연하겠군.”
보리스 크렘보르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장이면서도 직접 선봉에 설 정도로 대담하고 호전적인 자. 그런 자인 만큼, 어쩌면…….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리석은 자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부디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몸을 사렸으면 좋겠지만…….
“서둘러 좌군에게 합류해야겠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한층 더 거세게 적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승기가 굳어졌다고 판단되자 즉시 일부 병력을 거느리고 지지부진하게 전투를 치르고 있는 좌군 쪽으로 향했다.
그는 좌군의 병력이 로뮤가 투마르니 이끄는 정예 병력에 가로막혀 발이 묶인 상태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런 그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음?”
확실히 좌군은 투마르니 로뮤의 병력과 맞서고 있었다. 하지만 발이 묶인 것은 아니었다. 발이 묶인 것은 어디까지 일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그 일부가 투마르니 로뮤의 병력과 맞서는 동안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투마르니 로뮤는.
쾅! 쾅!
“허어…….”
이번만큼은 프란시스 티브리악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정도로 그는 크게 놀랐다. 아니, 충격을 받았다. 그 투마르니 로뮤와 직접 무기를 부딪치고 있는 보리스의 모습은, 그가 전혀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 * *
“크하아!”
이제는 호흡을 조절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당장 입을 벌리고 숨을 있는 대로 들이쉬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최악이지만, 다행이라면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라는 점.
“후우…후우…….”
덩치가 커서 그런지, 숨 쉬는 소리가 마치 커다란 짐승이 내는 소리 같았다. 보리스는 이제 감각이 반쯤 사라진 팔을 주무르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처음과 달라진 게 없는 게 딱 둘이었으니, 하나는 용의 뼈로 만들어진 그의 검이고 또 하나는 이 눈빛이었다.
“너. 각인을 하지 않았군. 그렇지?”
거한도 이제는 눈치챈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힘들어 죽겠는 얼굴로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 숨을 몰아쉬면서까지 내보이지 않으니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리스도 이제는 입을 다무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기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말할 힘조차 아끼며 숨을 골랐다.
“대단하군. 대단해. 하지만 이제 슬슬 한계야. 그렇지 않은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한은 상관없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보리스는 그 점이 이상했다. 상대 역시 지금은 입을 놀리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힘을 비축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 텐데, 어째서 계속 말을 잇는가.
‘포기했나.’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주변을 살필 틈은 있었다. 지금처럼 잠시 떨어져 있을 때가 바로 그 틈이다. 대단한 행동은 필요 없다. 그저 눈만 살짝 움직여 주변을 살피는 것으로 충분하다.
‘전세는 기울었다.’
애초 거한이 이끌던 얼마 안 되는 병력을 제외하면 전력은 아군이 더 우세했다. 승기를 쥐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뿐이고, 그 시간이 지났으니 자연스럽게 우세해졌을 뿐이다.
거한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싸움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여기서 어찌어찌 이긴다고 해도 주변에 가득한 아군 병사들에 의해 순식간에 도륙당하리라는 것을.
“더 할 힘도 없군. 이번이 마지막이다.”
상대는 포기했으나, 각오를 다졌다. 살기를 포기했으나 승리를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에 맞추어, 보리스도 기세를 가다듬었다.
마지막 일합. 검과 도끼가 다시 춤을 췄다.
하지만 승부를 가른 것은 검도, 도끼도, 하다못해 불도 아니었다.
피잉!
한 대의 화살. 그것이 보리스와 거한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고, 팽팽하던 긴장의 끈을 끊었다.
푹!
화살이 거한의 뒷목에 박히려는 순간, 거한의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살짝 움직여 화살이 깊게 박히는 것을 피한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콰직!
대검의 날이 어설프게 날아든 도끼를 튕겨내고 그의 가슴 한복판을 찔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