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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11화 (711/1,064)

711화

한때는 수하들을 이끌고 싸움터를 누볐었다. 주인의 복수를 위해서 눈이 돌아갔던 때였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항상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스스로를 조금 더 자세히 떠올려보니 그렇게 화가 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뛰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때의 그는 주인의 복수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운 채, 그야말로 원 없이 날뛰었었다.

테리브란에서, 그리고 때때로는 테리브란과 솔롬을 오가면서 보낸 안락한 삶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주 좋았다. 굶주려야 할 일 따위는 없으며, 원하는 것은 거의 뭐든지 가질 수 있다. 그런 삶을 꿈꾸는 이가 얼마나 많겠는가. 니클라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이상하게도 전혀 좋을 것 없어 보이는 그 우중충했던 과거가 종종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지금.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았다.

‘나는 아직 그렇게 얌전히 살 수 있을 만큼 점잖지 못하다는 거지.’

몸은 녹슬었을지 모르나, 정신은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다. 혈기, 혹은 철없음이 아직도 자극해대는 것이다. 움직이라고. 멈춰 있지 말라고.

“더 기다립니까?”

“아직이다.”

조바심을 드러내는 수하에게 단호히 답했다. 들썩이고 있는 적진이 이제 육안으로도 어렴풋이 보일 정도가 되었다. 여기서 더 다가간다면 자칫 뭘 해보기도 전에 발각될 수도 있는 노릇. 그렇기에 조바심을 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니클라스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매복, 습격은 그의 장기였다. 과거 얼마 안 되는 수하들을 이끌고 주인의 원수를 갚겠다고 설쳐대던 시절, 이런 일은 질릴 정도로 많이 했었다.

위험한 일일수록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오직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어야 한다.

‘아직은 더 여유가 있어.’

지금 적진은 발칵 뒤집힌 상태로 보였다. 뒤쪽은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보리스가 시선을 잘 끌어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대담한 계획이란 말이지.’

군재 운운하기 전에, 니클라스는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 대담함을 높이 샀다. 역시 핏줄의 힘인 걸까?

“아직입니까?”

“조금. 조금만 더.”

이제 은폐를 할 수 있는 지형이 거의 없어 병력이 반쯤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들을 감춰주고 있는 것은 야음뿐이었는데, 횃불을 든 적이 눈에 힘 한 번만 주고 봐도 이상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니클라스는 ‘조금만 더’를 반복했다.

초조함이 극에 달한 그의 부관이 더 참지 못하고 또 한 번 입을 열려던 순간. 니클라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하지만 뚜렷하게 말했다.

“지금이다.”

그의 신호, 그리고 명령이 떨어지자 몸을 낮추고 있던 병사들이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 * *

“음.”

방패로 머리를 가리고 있던 보리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폭우처럼 쏟아지던 화살 비가 약해진 느낌이었다. 아직 가장 가까운 목책에도 닿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거리를 좁혀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

‘지금인가.’

시기는 정하지 않았다. 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전황은 매 순간 변하기 마련이니, 보리스가 니클라스에게 명한 것은 시기를 잘 맞추어 적의 뒤를 치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그 시기를 정하는 것은 오직 니클라스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자칫 니클라스가 오판을 한다면 작전 전체가 어그러지고 전투가 엉망이 될 위험도 있었으나 보리스는 니클라스를 믿었다. 오랜 시간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 봐왔으니 그가 얼마나 신중한 사람인지 잘 알았다. 한때 그가 영주의 원한을 갚기 위해 반군을 이끌던 지도자였다는데, 아마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신중함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했다.

‘훌륭해.’

니클라스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적이 혼란을 가라앉히고 본격적으로 공세를 강화하려고 하는 시점. 한편으로는 후방의 경계가 가장 느슨해지는 순간을 절묘하게 찔렀다. 이제 적은 다시 한번 혼란에 휩싸일 것이고, 그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터.

“나아가라!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지금이라고, 보리스는 확신했다. 스스로 외친 말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들고 있던 방패를 내던지고 등에 멘 커다란 검을 뽑아들었다.

“나를 따르라!”

보리스가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강건한 몸뿐만이 아니었다. 목청 역시, 아버지에 비하면 모자랄지 모르나 평범한 이들에 비하면 월등하게 컸다. 그런 그가 작정하고 크게 외치니, 적어도 주변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말만 따르라고 하면 누가 듣겠는가. 계속해서 쏟아지는 화살 비에 병사들은 어느 정도 사기가 꺾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 대장이 따르라고 외치며 방패도 없이 말을 몰고 앞으로 나아가니 조금은 힘이 빠져 있던 병사들이 다시 눈에 힘을 주며 발을 앞으로 뻗었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이다지도 단순했다. 어쩌면 그렇게 단순하니 전장에 설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칼 한 자루만 쥔 보리스가 앞으로 튀어나가니 병사들도 용맹하게 그 뒤를 따랐다. 하나로 똘똘 뭉쳐서 적을 향해 돌진하는 그 모습은 모범적인 군대의 돌격, 그 자체였다.

“대단하군.”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본래 보리스와 함께 있었으나, 조금 더 효율적으로 군을 운용하기 위해 보리스보다는 조금 더 오른쪽에 치우쳐서 병사들을 이끌고 있었다.

“무모하지 않습니까.”

보리스와 병사들의 돌격을 보며 감탄한 그와는 달리, 그의 부관은 저 공격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무릇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라면 신중해야 합니다. 그런 지휘관이 저렇게 무모한, 그것도 선봉에 서서…….”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네.”

“예?”

“자네 말처럼, 지휘관은 신중해야 하지. 하지만 신중함이란 과감함과 공존한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하나만 존재할 수는 없어. 만약 신중함만 갖췄다면 그건 신중한 게 아니라 겁이 많은 것일 테고, 과감함만 갖췄다면 그건 과감한 것이 아니라 자네 말처럼 무모한 것뿐이겠지.”

그렇게 말한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소리 내어 웃었다.

“만약 그가 무모한 자였다면 어찌 이런 계책을 미리 구상했겠는가? 또한, 적의 공세가 미묘하게 약해진 것이 느껴지지 않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어차피 저자를 믿고 이렇게 나온 마당에,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끝까지 가봐야 하지 않겠나?”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그는 낯빛을 굳힌 채,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앞서 나가는 아군에게 보조를 맞춘다! 전군 쾌속 전진!”

* * *

전투 경험은 적지 않다. 군문에서 수십 년을 버틴 이들에 비하면 풍부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나, 나이에 비해서는 많은 경험을 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일군을 이끄는 대장이 되어 치르는 전투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것이 지금 보리스의 가슴이 처음 전장에 나섰을 때처럼 거세게 뛰는 이유였다.

“하압!”

커다란 검이 허공을 긋는다. 화살 두 대가 깔끔하게 잘리고 튕겨 나갔다.

그냥 무거운 검이 아니다. 용의 뼈로 만들어진, 명검이라는 말조차 부족한 보검이다. 특별한 술식을 새겨넣지는 않았기에 법구는 아니지만, 검 본연의 용도로는 값비싼 보구들 못지않았다.

“으아아아!”

적병이 보인다.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면서 창을 찔렀다. 힘이 잔뜩 들어갔지만, 보리스의 눈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기마 앞에 서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찌어찌 용기를 내서 섰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고.

“흥!”

용기를 낸 병사에게는 애석하게도, 보리스는 살짝 고삐를 잡아채는 것만으로 방향을 틀어 창을 피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애검을 휘둘러 병사의 머리를 투구째 쪼갰다.

‘그러고 보니 이 검도 티브리악에게서 받은 것이었지.’

바크렌의 잔당 토벌을 도와준 대가로 유게르 티브리악이 내준 보물이다. 본래는 부친에게 가야 할 검이 그에게 떨어진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그나저나 티브리악에게서 받은 검을 들고, 티브리악과 한 전장에서 싸우다니. 억지로 이어붙이려는 것은 아니지만, 묘한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잠시뿐이었다. 피잉! 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음 순간 이마를 아슬아슬하게 빗겨 간 화살에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나니 머릿속이 깔끔해졌다.

“저놈이 대장이다! 저놈을 잡아라!”

적에게 노려지는 것은 익숙하다.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적들이 알아보기 쉽게, 병사들은 물론이고 일반 장교들과도 다른, 눈에 띄는 무장을 한 것은 ‘내가 대장이다’라고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일반적이지는 않다. 병사들을 지휘해야 하는 지휘관은 대개 군의 중심부나, 호위병력을 주변에 두고 안전하게 지휘를 한다. 사실 그것이 맞다. 아무리 몸통이 날래고 강하다 한들 머리가 없다면 어찌 움직이겠는가. 군대가 그와 같으니, 머리에 해당하는 지휘관은 어떤 경우에도 무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무사하기 위해서 위험에서 최대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리스는 그와 정반대였다. 일반적이지 않고, 상식적이지 않다. 하지만 보리스는 이 방식에 익숙했고,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이런 방식으로 무수한 전투에서 승리해온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겁 없이 설쳐대는구나!”

서넛 정도를 베어 넘겼을까. 우렁찬 외침과 함께 섬뜩한 감각이 세찬 바람처럼 전신을 할퀴었다. 보리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소리가 들려온, 그리고 섬뜩함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쾅!

강렬한 충격.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한 것을 전력으로 버텼다. 그리고 공격한 이를 돌아보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충격이 상당했는지, 이제야 막 말머리를 돌리고 있는 상대가 보였다.

가장 먼저 눈길이 간 것은 큼지막한 도끼였다. 마상에서 쓰기에는 다소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도끼를 한 손에 들고 있는 거한. 흉물스러운 뿔이 달린 투구를 쓴 자였는데, 눈 구멍 사이로 보이는 강렬한 안광이 또한 인상적이었다.

일합의 충격도 충격이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것만으로 보리스는 도끼를 든 거한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직감했다.

“뭐하는 놈이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못 보던 놈인데, 혹 오늘 아침에 쥐새끼처럼 성안에 기어 들어간 놈이더냐?”

“눈이 삐었구나! 네놈들이 알아서 길을 내주기에 편히 움직였을 뿐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 그의 뒤에 집결한 일단의 병력 역시 정예로 보였다. 무시하고 지나치기에는 눈에 밟히는 것이 적지 않아, 보리스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이들을 처리하고 가기로 했다.

“긴말은 필요 없다! 내 앞을 막아섰으니 그 대가를 치러라!”

보리스가 말을 달렸다. 상대 역시 피하지 않고 마주 달려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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