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화
그을리거나 짓밟힌 흔적이 있는 들풀. 탄내와 썩은내가 뒤섞여 희미하게 코끝을 찔렀다.
“시체를 태운 흔적입니다.”
할렌의 말처럼, 그런 것 같은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길 안내를 맡은 장교가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혼란한 시국을 틈타 여기저기서 도적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 부근에서도 서너 차례 토벌이 이루어졌지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철저하게 진압했습니다.”
말이 길어지는 것을 보니 뭔가 말하는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찝찝한 구석이 있는 듯했으나, 군터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관심도 없고, 무엇보다 이쪽과는 상관없는 일이지 않은가.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렘보르 장군. 어려운 시국에 무명 높으신 장군을 뵙게 되니 기쁜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군요.”
“달변가이시군.”
노만 카리아는 일전에 테리브란에서 본 적 있는 하브람 카리아에 비해 얼굴이 조금 더 갸름했다. 물론 주름이 없는 것은 덤이고 말이다. 전체적으로 얄상해 보이는 것이, 살짝 간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상과는 달리 목소리는 두꺼운 편이어서 보이는 얼굴과 들리는 목소리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는 화려하지도, 투박하지도 않게 고풍스러워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해 보였다. 외관에서도, 화법에서도 느꼈지만, 그는 군인보다는 정치인에 더 어울릴 듯했다. 그의 부친처럼.
‘꽤 시달렸던 모양이군.’
얼굴은 물론이고, 눈 밑이 특히 거뭇거뭇하다. 억지로 띄운 목소리에도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배어 있으니, 카리아의 직계인 그조차 이렇게 시달릴 정도로 이곳의 상황이 쉽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먼 길을 달려오신 장군과 장정분들을 위해 조촐하게나마 연회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성으로 드시지요.”
예전이었다면 군터는 이런 쓸데없는 연회 같은 것은 집어치우고 현황을 적은 지도부터 가져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노회해졌다. 세월이 쌓은 경험은 그에게 여유를 선물해주었다. 이제는 마음만 앞세운다고 해서 뭐가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서두를 때는 서두르더라도 쉴 때는 쉬어야 한다. 고삐를 계속 당기기만 해서는 말을 오래 달리도록 할 수 없다. 간간이 긴장을 풀게 하고, 휴식하게 하면서 소진된 기력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말과 사람이 다르지 않으니, 군대 역시 마찬가지.
아록에 들어선 뒤부터, 이곳의 심상치 않은 공기에 어깨마저 굳어버린 저들의 피로와 긴장감부터 풀어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작 달려야 할 때 달리지 못할 테니.
노만 카리아가 준비한 연회는 적당했다. 음식과 술이 있었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음악과 여자는 없었다. 적당히 선을 지키면서도 성의는 보인, 말 그대로 적당한 연회.
이 적당함에 아쉬워하는 이들도 몇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만족해하는 분위기였다. 병사들처럼 티는 내지 못했어도, 내심 마음이 무거워졌던 이들이 연회 자리에서는 긴장을 풀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
“전황은 어떻소?”
상석에 앉은 군터는 그의 왼쪽 아랫자리에 앉은 노만 카리아에게 분위기가 적당히 풀어졌을 즈음 나직이 물었다. 그에 노만 카리아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좋지 못합니다. 적의 공세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셉니다. 부친께서 모든 힘을 다해 막고는 계십니다만…….”
그가 조용히 말끝을 흐렸다.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내용이 무엇이었을지 대강 짐작이 갔다.
의아해졌다. 카리아의 직계나 되는 자가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하다니. 가문과 부친의 위세를 깎아 먹는 일이 아닌가. 혹시 일부러 약한 척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먼 길을 달려온 원군 앞에서 약한 척을 한다고 한들 얻을 게 무엇이겠는가.
정치하는 자들, 특히 이름 높은 귀족들의 생리에 대해서는 볼 만큼 보았고 겪을 만큼 겪었다. 그들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온갖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노만 카리아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거짓돼 보이지 않았다.
군터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꾸며낸 그늘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지금은 믿어서 손해 볼 것도 없지 않은가. 단순하게 생각해서, 그만큼 힘들다는 것이겠지.
“적은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습니다. 주공은 바라눔이 이끄는 군대이나, 나머지도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렇게나 힘든 상황인가?”
노만 카리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전 초기부터 몇 달 동안은 효과적으로 적을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리 생각했지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상당히 안일했던 것 같습니다.”
“안일했다?”
“그동안은 제대로 하고 있던 게 아니라는 듯, 한순간에 돌변하더군요. 나중에 소식을 듣고 알았습니다. 판니른에 아바시스군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아마 그들과 보조를 맞춘 것이겠지요.”
“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아록에서 줄곧 전투를 치러온 이의 입으로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아말로페, 그 역적놈은 아바시스와 손을 잡았지요. 그런데 보아하니 바라눔 그놈 또한 역적이었습니다. 지금 아군은 그 사실을 널리 알리고 있지요. 아마 테리브란의 조정에서도 바삐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그게 도움이 되나?”
“저쪽에서야 터무니없는 모략이라고 선전하고 있지요. 실제로 그렇게 크게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외치고 있는 중입니다.”
시작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일단 한 번 시작된 전쟁의 열기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그 가늠할 수 없는 광기 앞에서는 대의, 명분,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이틀 뒤에 출발하겠소.”
“그러시지요.”
노만 카리아는 군터가 서둘러주는 것이 기쁜 듯 미세하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를 보며 군터는 그의 얼굴에 드러난 모든 것이 거짓되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 * *
“거듭 말씀드리오만,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과분한 말씀 거두어주시지요. 장군께서는 마땅히 소관에게 하대하셔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지. 그대와 나의 소속이 다를뿐더러, 그대는 크렘보르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오. 전장에서 만났다고는 해도 신분에 따른 예의는 갖춰야지.”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부드러운 말에 보리스는 절로 표정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흔히 보았던, 허세에 찌든 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신분 운운하는 것과는 달랐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보이는 태도는 그런 같잖은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이전부터 프란시스 티브리악이라는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때는 그저 티브리악의 후계자라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번 전쟁에 티브리악의 대표로서 일군을 이끌고 나섰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경쟁심을 느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내내 어떤 자일까 궁금했었다. 온갖 얼굴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졌지만, 그 얼굴 중에 이런 얼굴은 없었다. 그렇기에 뜻밖이었고, 호감이 갔다. 나를 존중해주는 상대에게 나쁜 마음을 먹는 자는 없겠지만, 그것을 제하더라도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상당히 괜찮아 보이는 사내였다. 휘하 장교와 병사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나같이 단순한 상관을 넘어,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자의 눈을 하고 있지 않은가.
“상황은 어떻습니까.”
“좋지 못하오. 솔직히, 그대가 도착하는 것이 이틀만 늦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몰랐을 거요.”
장군이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보리스의 눈에는 여기저기 피가 묻고 갈라진 갑옷이 그 어떤 화려한 갑옷보다 그럴듯해 보였다.
“적은 오면서 보았습니다.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더군요.”
“그대들을 막기 위해 포위진을 흐트러뜨렸다가 우리가 안에서부터 치고 나올까 우려한 것이겠지. 안팎으로 적을 상대하는 것은 좋지 못하니까 말이오.”
“소관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차라리 한쪽에 가둬두고 상대하겠다는 생각이었겠지요.”
“오. 공도 그것을 계산했구려.”
“예. 그래서 말입니다만…….”
보리스가 말끝을 흐리자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눈이 일순간 날카로워졌다. 조금 전까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던 사내가 기회를 노리는 짐승처럼 눈을 빛내는 것을 보며, 보리스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제가 이끌고 온 병력은 3천 5백입니다. 지금 성에 들어와 있는 병력은 2천이고, 나머지는 성 밖에 매복한 채 대기하고 있지요. 소관이 신호를 보낸다면 그들은 즉시 적의 뒤를 칠 것입니다.”
“치밀한 것 이상으로 대담하군. 전투를 첫날에 끝낼 생각이었소?”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 부정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먼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하겠지요. 하루 정도는 쉴 것이라 생각할 겁니다. 적의 의표를 찌를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옳은 말이오. 사고의 사각을 찌르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지.”
“허면…….”
“본래는 약소하게나마 자리를 마련할까 했지. 하지만 그 자리는 조금 미뤄야 할 것 같군. 밤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조금 쉬어야겠소. 요 며칠 동안은…솔직히 조금 무리를 한 터라.”
보리스가 이해한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쉬십시오. 때가 되면 소관이 깨워드리겠습니다.”
“하하. 먼 길을 달려온 귀한 손님에게 그런 일까지 맡길 수는 없지. 내 알아서 눈 뜨리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크게 웃으며 그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은밀하게 준비를 마친 병사들이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와아아아―!
이제껏 궁지에 몰린 쥐처럼 잔뜩 움츠리고만 있던 이들은 억눌린 분노를 토하며 거세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멀리 떨어진 적진이 들썩이는 것이 보리스의 눈에는 보였다.
‘당황했군.’
하지만 기뻐하기에는 이르다. 적은 아군이 적진에 다다르기 전에 방비를 마칠 것이고, 잘 준비된 적과 부딪친 아군이 승기를 잡기는 힘들다.
‘자. 한 번 보여주시오.’
보리스는 달리는 말 위에서 호각을 입에 물었다.
우우우우우―!
긴 울림이 밤하늘에 퍼졌다. 그러자 저 멀리, 적진보다 더 먼 곳에서 숨죽이고 있던 일단의 병력이 몸을 일으켰다.
“솜씨가 무뎌지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니클라스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검집으로 땅을 짚고 일어났다.
“대장님께서는 아직 현역이십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곧 알게 되겠지. 자, 움직인다.”
니클라스와 병사들이 한창 부산을 떨고 있는 적군을 향해 아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