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9화
출병 명령이 떨어지기 전, 군터는 출병하게 된다면 테리브란에 들러야 하리라 짐작했었다. 온갖 자질구레한, 소위 격식이라는 것을 그렇게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귀족들인 만큼, 군대가 테리브란의 동문으로 들어가 서문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시민들의 눈요기가 돼야 하리라는 추측은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그럴듯했다.
하지만 마침내 내려온 황자의 명령은 테리브란을 거치지 말고 즉시 아록으로 향하라는 것이었다.
“그 거들먹거리는 작자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상황이 안 좋긴 안 좋은 모양이오.”
로드니 캄브라이는 전장으로 가지 못해 잔뜩 안달이 나 있던 것이 언제냐는 듯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때를 기다려왔고, 준비 또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음에도 죽음이 흘러넘치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군터는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던(혹은 그렇게 가장했던) 그를 비웃지 않았다. 로드니 캄브라이는 본래 군인이 아니라 정치인에 가까운 자가 아니던가. 평생을 귀한 가문에서 곱게 자라온 자가, 비록 처지가 곤궁해져 나름대로 험지라면 험지인 곳에서 독하게 얼마간 버텼다지만 한순간에 굳센 전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판니른을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점점 아록에 가까워져 갈수록, 중간중간 보급을 위해 들렀던 도시와 요새들에서 점점 진해지는 전장의 냄새를 맡을수록 그의 얼굴에서는 여유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마른고기가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싶소. 적어도 열흘 이상은 계속 이동해야 할 테고, 아록에 도착한 직후에 전장으로 투입될 수도 있는데 지금 보유한 양으로는…….”
“충분하오.”
“화살이 모자란 것 같지 않소? 우리가 간다고 해도 결국 농성을 하게 될 터인데, 그러려면 역시 화살이 많아야…….”
“그 또한 충분하오.”
“그럼…….”
“조금 진정하는 게 좋겠군.”
4만 대군을 이끄는 지휘관이라는 자가(물론 실질적인 지휘권은 군터에게 있었지만, 로드니 캄브라이 역시 군사 회의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엄연한 지휘관이었다) 처음으로 전장에 끌려온 신병처럼 굴고 있었다. 뭐 사실 그게 틀리지 않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끝도 없이 흔들리는 것은 좋지 않았다.
“진정? 진정이라. 그래. 장군의 말이 맞소. 내가…음, 각오는 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머릿속 세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지.”
“그런 것 같소. 아록에 도착하게 되면…그곳은 또 다르겠지.”
“아쉽지는 않은가?”
“뭐가 말이오?”
“테리브란에 들르기를 고대하고 있었잖소.”
“하하. 물론 아쉽지. 아쉽고말고. 대군을 이끌고 테리브란의 성문을 지날 때, 그 작자가 나를 보며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꼭 보고 싶었는데 참으로 아쉽게 되었소.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오. 정확히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그런 것 같았다. 로드니 캄브라이가 매일 밤 그의 막사 앞에서 호위 무관에게 검술을 지도받고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자들은 다 알았다.
여기까지 와서 검 좀 휘두른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마는, 그런 식으로라도 긴장을 푸는 그를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다만 이 이야기가 병사들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지휘관의 체면이 우습게 될지도 모르니, 소문나지 않게 입단속은 하고 있었다.
“군을 이끄는 것은 장군의 몫이오. 판니른을 나온 순간부터 나는 장군에게 의지하고 있소.”
“음.”
군대를 준비하는 것까지가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로드니 캄브라이는 그의 몫을 충분히 해냈다. 판니른의 모든 힘을 짜내다시피 하여 4만이라는 대군을 만들어낸 것부터가 그의 수완이었다. 그가 이 그럴듯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협상하며 그들의 지원을 끌어냈는지에 대해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찌나 극성이었는지, 판니른의 젊은 총독이 전공을 세우고 싶어 눈이 뒤집혔다는 소문이 한참 전부터 자자하게 퍼졌을 정도다.
그의 노력 덕분에, 4만 군대는 군터의 눈에도 썩 나쁘지 않은 구색을 갖출 수 있었다. 무장 상태야 더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훈련 상태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만족스럽냐고 하면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망설여지지만, 못마땅한 정도는 아니었다.
“바라눔 트라소프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들었소. 위쪽에서는 쥬드 포트락의 아들이 아버지의 군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더군.”
벌써부터 아버지 못지않은 아들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 소문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이 저쪽에서 열심히 떠들어댄 것이라고 해도 이쪽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제국 최고 무장의 아들이 아버지의 밑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것은, 호사가들이 써먹기 좋은 소재가 아닌가. 대를 잇는 젊은 영웅의 등장 같은 것 말이다. 바꿔 말하면, 그 상대인 아군은 젊은 영웅이 이름을 드높이는 과정에서 스러지는 무수한 제물 중 하나가 되는 꼴이다. 물론 신경 쓰지 않는 자들도 있지만, 안 그런 척하면서도 은근히 신경 쓰는 자들도 있었다. 바로 이 로드니 캄브라이처럼 말이다.
“아비의 후광에 과대평가된 애송이일 뿐이오.”
깔보는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높이 사는 마음도 없었다. 겪어보지도, 눈으로 보지도 않았는데 뭘 평가하고 말고 하겠는가. 하지만 불안해하는 아군을 위해 이런 말 한마디 못해줄까.
그러나 로드니 캄브라이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바라눔 트라소프는 다르오. 그는…선황의 재림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뛰어난 자요. 그가 향하는 곳에는 승리뿐이라더군.”
“승리할 곳만 찾아다닌 것일 수도 있지.”
“음? 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룬차이의 군대와도 겨뤄보았어. 그때, 싸우기도 전부터 병사들은 겁에 질려 있었지. 하지만 끝내 승리한 후, 그들은 전설적인 명성을 지닌 군대보다 그들이 지레 품었던 두려움이 더 무섭고 위력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소이다.”
“어차피 내친 걸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한번 지켜보시오. 내가 보기엔 젊은 포트락이든, 바라눔 트라소프든, 룬차이보다 대단하지는 않을 것 같군.”
사실 군터는 룬차이의 군대와 겨뤘을 뿐, 룬차이와 겨룬 적은 없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니 이런 식으로 지껄여댄다 한들 문제 될 것이 무엇인가. 이 쓸데없는 두려움을 걷어낼 수 있다면, 그는 이보다 더한 거짓말이라도 얼마든지 떠들어댈 수 있었다.
“병사들의 상태는 좋습니다. 행군속도를 여유롭게 잡은 것이 주효했던 걸까요.”
로드니 캄브라이를 애 다루듯 달래고 나면 본격적인 군사회의에 돌입했다. 상석에 앉은 군터와 로드니 캄브라이의 양옆으로 수십 명의 무관이 줄지어 섰는데, 그중에는 다소 낯선 얼굴인 이들이 여럿이었다. 솔롬에서부터 군터를 따라온 이들은 소수였는데, 수는 적을지언정 그 지위는 높게 인정받아 군터에게서 가까운 곳에 자리할 수 있었다.
“여유롭게?”
생소한 얼굴의 무관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드리안이 심드렁하게 때꾸했다.
“여유롭다 못해 하품이 나올 정도지. 아록과 리바스트라에 있는 아군은 지금도 죽지 못해 버티고 있을 텐데, 우리 병사들은 혈색이 아주 파릇파릇하잖소.”
“말이 지나치군. 그럼 뭐, 우리도 병든 닭처럼 혀를 뺄 때까지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야 한다는 건가?”
“그러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겠소?”
나이를 먹고 경험을 쌓으면서 많이 부드러워지기는 했지만, 아드리안 특유의 가시 돋힌 성정은 어디 가지 않았나. 그는 벌써부터 전장에 들어선 것처럼 매사에 예민해졌는데, 군터는 그런 그를 이해했다. 그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예민함을 이런 식으로 아군에게 드러내서 좋을 것이 있겠는가. 그리 생각한 그가 한마디 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할렌이 입을 열었다.
“적과 아군을 혼동하지 마라.”
할렌의 지적에 아드리안이 혀를 차며 조용해졌다. 자칫 더 어색해질 수 있었던 분위기가 할렌의 개입으로 조금 나아지자 군터가 나직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합류 지점은 그대로인가?”
“예. 노만 카리아가 밀토에서 아군을 기다리고 있다는군요.”
노만 카리아. 하브람 카리아의 오남이었을 것이다. 하브람 카리아가 이번 전쟁에 나서며 대동한 두 아들 중 하나로, 비록 후계자는 아니나 부친의 두터운 신뢰를 받는 이라던가.
아끼는 아들을 보낼 정도로 이쪽을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전황이 그만큼 급하다는 뜻도 될 것이다. 이쪽의 힘이 당장 필요할 만큼.
“곧 아록에 들어서게 되면 그때부터는 이런 여유도 끝이다.”
아드리안도, 그와 언쟁 비슷한 것을 벌였던 무관도 찔끔하여 고개를 숙였다.
판니른의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모여 있기는 하지만, 생전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처음부터 잘 맞아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무관이라는 이들이 대개 억센 기질이 있는 만큼, 판니른을 떠나 이곳까지 오면서 자그마한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분위기가 심각할 정도로 나빠지지 않았던 것은 가장 위에서 그들을 찍어누르는 군터의 존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있다가도 그가 한번 입을 열면 눈을 부릅뜨고 있던 모두가 순한 양처럼 눈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부터는 나도 긴장을 조금 해야 할 것 같다. 즉, 지금까지처럼 그대들을 편하게 해줄 수 없다는 뜻이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군터는 휘하 무관들이 서로 부딪치게 놔두었다. 그러면서 감정이 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전장에 도착해서 진정한 적을 마주하게 되면 그전까지의 사소한 악감정 같은 것들은 모두 잊게 되기 마련. 그렇기에 군터는 로드니 캄브라이나 할렌이 우려를 표할 때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하지만 이제 슬슬, 느슨하게 쥐었던 고삐를 당길 때였다.
* * *
“아록의 상황은 끔찍합니다. 이 앞은…지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입니다.”
정찰을 나갔던 장교가 돌아와 그리 말했다. 다소 창백하게 질려 있는 그의 얼굴은 보름 정도 자리를 비웠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초췌했다.
“지옥이라.”
심상치 않은 표현에 모두가 낯빛이 굳었지만, 군터는 표정 변화 없이 지옥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원신의 울타리에 속하지 않은 불신자가 죽어서 떨어지는 곳이라던가. 대다수 제국민들이 그 존재를 믿었지만, 군터는 그 끔찍한 고통이 가득하다는 곳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죽어본 경험이 있으며, 잠깐이지만 사후(死後)를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록의 모든 것을 휩쓸었습니다. 성벽 밖의 마을은 온전히 남은 것이 없다시피 하고, 도처에 피난민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약탈자들이 횡행하며, 그중에는 거짓 깃발을 든 놈들도 수두룩합니다. 한 마디로 지금의 아록은…….”
“되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
들을 만큼 들었다고 판단한 군터가 장교의 말을 끊었다.
아록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되었다. 더 들어봐야 심약한 자들의 사기나 꺾일 테니, 고생한 이를 몇 마디 말로 치하하고 내보냈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오.”
“음? 그게 무슨…….”
“아록과 리바스트라를 방패 삼아 적을 멈춰세운다. 그게 아군의 대전략 아니었소?”
“아아. 그렇지. 맞소. 그게 맞아.”
로드니 캄브라이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잘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