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화
“하브람 카리아는 궁지에 몰렸소. 그에겐 더 이상 바라눔 트라소프를 막을 힘이 없어. 그의 군대는 반쯤 와해되다시피 했고, 지금은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버거운 상태인 듯하오. 어쩌면…지금쯤 비참한 꼴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 비참한 꼴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실질적인 아록의 지배자인 만큼 목이 날아가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더 안 좋은 꼴이 될 수도 있을 터.
“이제는 정말 시간문제요. 나는 이 달 안에 결정이 날 것으로 보고 있소.”
젊은 총독은 몸이 잔뜩 닳은 듯했다. 반쯤은 우스갯소리겠지만, 그가 매일 자신의 화려한 갑옷을 직접 닦고 있다는 소리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반쯤은 우스갯소리더라도 나머지 반은 그럴만해서 나온 것일 테니까.
“장군이 이번에 또 한 번 큰 공을 세웠으니, 곧 그 소식이 테리브란에도 전해질 터. 그리 되면 조정에서도 더는 판니른군을 놀려두지 못할 거요.”
“큰 공이라 할 것은 없는데.”
자세한 사정은 모르더라도, 군터가 대충 간추려서 이야기를 했기에 로드니 캄브라이도 군터가 제대로 일전을 벌여서 아바시스군을 몰아낸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충분히 큰 공이라 할 수 있소. 적의 수급을 얼마나 취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지. 중요한 것은 쳐들어온 적을 패퇴시켰다는 사실이니까.”
군터는 공적을 과장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테리브란 조정에 보낸 장계에도 있었던 일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상세하게 적었다. 토어릭을 비롯한 몇몇 수하들이 괜한 트집을 잡힐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지만, 군터는 트집을 잡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면 조정에 있는 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뜻일 테니, 그때는 그때 가서 다시 생각을 해보면 될 일 아니겠나.
얼마 후. 테리브란에서 사자가 내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괜한 트집을 잡히는 일은 없었다. 조정에서는 몇 마디 듣기 좋은 표현으로 그를 치하했고, 군대를 준비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었지만,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향해가고 있던 로드니 캄브라이는 이 부분에서 크게 기뻐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중한 기색을 보였다.
“기다리던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야 환영할 일이지만, 그만큼 전선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일 테니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구려.”
아무리 귀를 기울인다고 해도 전선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판니른에서 접할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접하는 정보라는 것은 늦으면 한 달 이상, 빨라도 최소 이십 일 정도 전의 것. 따라서 그들이 아는 전장의 상황도 한참 지난 과거의 것일 뿐이다.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짐작뿐.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이 네바락의 함락소식이었으니…지금쯤은 더 밀렸다고 봐야겠고, 우리가 갈 즈음에는 또 어디까지 밀렸을지……. 짐작하기도 힘들군.”
“바크렌의 군대가 남하했다고 들었는데.”
그 말을 들은 로드니 캄브라이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그랬지. 지금쯤이면 아마 아록에 당도했거나, 아니면 이미 전장에 투입됐을지도 모르오. 그들이 얼마나 활약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 덕에 숨통이 조금은 트이겠지.”
반쯤 강요에 의해 차출된 병력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바크렌의 병력은 바로 얼마 전까지, 혹은 지금까지도 실전을 겪고 있는 군대였다. 그들이 투입된다면 힘겨운 전선의 상황도 나아질 거라는 전망이 근거 없이 희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 * *
군터는 열흘 하고도 사흘 전에 하잘에서 로드니 캄브라이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바로 나흘 전, 테리브란 조정에서 출병 명령이 떨어졌다. 날짜를 계산해봤을 때, 그때 사자가 테리브란에서 출발할 즈음에는 이미 결정을 내렸던 것이리라. 나름대로 준비할 시간을 준다고 일부러 명령을 늦게 내린 것이었겠지만, 쓸데없는 배려였다. 판니른의 군대는 이미 오래 전에 준비를 마친 상태였으니까.
“장군. 그나저나…공자님의 일은 어찌 하실 생각이신지요.”
토어릭이 슬쩍 군터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출병 명령이 내려오기 전. 그러니까 군터가 막 하잘에 로드니 캄브라이를 만나러 움직였을 즈음에 보리스가 보낸 서신이 도착했다. 내용인즉슨 이번에 테리브란에서 출발하는 7차 원군에 참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니클라스 공이 따로 전한 이야기로 미루어보면…아무래도 공자께서 이번에 바크렌의 군대가 지나던 때에 크게 자극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자극?”
“듣기로, 바크렌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자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이라고 하더군요.”
“이름이 귀에 익기는 하군.”
하지만 그뿐이다. 얼핏 이름만 들어봤을 뿐, 얼굴은 스치듯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없다. 그나마 유게르 티브리악이 아끼는 자식이라는 이야기를 야스메티가 살아있을 당시에 야스메티를 통해서 몇 번 정도 들은 적이 있었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정실 부인에게서 본 차남입니다.”
“차남?”
“예. 동복 형제인 장남이 있기는 한데, 그는 일찍이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후계 서열에서는 밀린지 오래라고 합니다.”
“무슨 사고였기에?”
“낙마를 했다나…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반신을 못 쓴다더군요.”
거기까지 들은 걸로 충분했다. 팔 한쪽이 날아갔거나 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하반신 불구라면 아무리 장남이라도 결코 후계가 될 수 없다.
“바크렌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활약이 대단했다고 하더군요. 물론 실제로 그런 활약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유게르 티브리악이 크게 아끼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그런 자식을 전장으로 보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인지는 쉬이 짐작이 갔다. 귀족이라는 작자들을 지켜봐 온 세월이 얼마던가. 그들의 남다른 사고방식도 이제 더는 새롭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것은 살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별로 손이 귀한 집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처음 이야기가 나올 때는 유게르 티브리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올 것처럼 흘러갔었는데, 결국 그는 아들을 대신해서 보냈다. 아마 테리브란에 있는 조정 대신들도 처음부터 그리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다. 그런 그가 굳이 위험천만한 전장에 나설 이유가 있을까? 본인 대신 아들을, 그것도 후계자로 삼은 아들을 보낸다면 명분은 충분하다. 설령 그 아들이 전장에서 잘못된다 해도…다른 자식이 있으니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 말이다.
“그의 나이가 올해로 스물 여섯이라던가……. 아무튼, 꽤나 젊은 나이라는 모양입니다.”
“알만하군.”
스물 여섯이면 보리스와 동년배라고 할 수 있다. 자기 동년배의 젊은이가 수만 군대를 이끌고 전장으로 나가는 것에 경쟁심이라도 느낀 것일까.
“공자님께서 그리 생각이 짧은 분은 아닙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살라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설령 그 프란시스 티브리악이라는 자에게 자극을 받은 게 맞다 한들, 그건 여러 이유 중 하나에 불과할 겁니다.”
토어릭이 살라스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개인적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 나이대의 젊은이들이 다 그렇듯, 보리스 역시 공명심을 가지고 있다. 장군의 아들임에도 일개 백부장으로 전장을 누볐던 보리스가 아닌가. 그간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느라 잠잠했을 뿐, 가슴 속에 품은 불덩이가 다 꺼져버린 것은 아닐 터. 오히려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던 것이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허락할 생각이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출병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가시는 길에 장군께서 직접 대동하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토어릭의 말에는 할렌이 대꾸했다.
“그건 공자께서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야.”
“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공자께서는 크렘보르의 후계자이기 전에 독자이시네. 항상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는 없는 위치에 계시다는 말이지.”
토어릭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할렌도 더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고, 살라스는 이런 주제에 더 이상 낄 생각이 없다는 듯 아예 눈을 감았다.
“녀석이 직접 서신을 보냈을 때는, 생각할 만큼 생각했다는 뜻 아니겠나. 난 굳이 이런저런 이유로 녀석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아.”
품에서 벗어난 지 오래인 자식이다. 손을 떠난 녀석에게 언제까지 이래라저래라 하며 애 키우듯 할 수는 없는 노릇.
군터는 보리스의 결정을 존중했다. 처음 전장에 따라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그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장군의 뜻이 그러시다면.”
군터의 마음이 굳은 듯하자 토어릭은 깔끔하게 물러났다. 사실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었기에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장군께서는 너무 무심하단 말이지. 심지어 하나뿐인 아들에게조차도.’
한숨이 나오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내인 것을.
“군의 준비는 만전입니다만, 아무래도 일부는 남겨놔야 할 듯싶습니다.”
“그래야겠지.”
바로 얼마 전에 아바시스군이 침공을 해왔었다. 적의 대장인 가르비아에게 약속을 받은 것이 있다고는 하지만, 순진하게 적의 약속만 믿고 있을 수는 없으니 대비를 해둬야 할 터.
“이번에도 네가 수고해줘야겠다.”
군터가 살라스를 보며 말했다.
지목을 받은 살라스의 표정이 순간 살짝 어둡게 변했으나, 살라스는 언제나 그랬듯 그에게 주어진 일을 거부하지 않았다.
“맡겨주십시오.”
* * *
“기어이 오늘의 해를 보는군요.”
“내 말하지 않았나.”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지쳐서 반쯤 쓰러져 있는 수하에게 웃어 보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면서 성벽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간 그는 눈에 익은 깃발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장군! 적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들이칠지 모르니 계속 경계하라! 특히 성문을 열어 원군을 맞이할 즈음에는…….”
언제 웃었냐는 듯, 거칠어진 목소리로 소리치면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린 그는 가까워진 깃발을 보며 성벽을 내려갔다.
잠시 후. 근 보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고, 일단의 병력이 성 안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와주니 반가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프란시스 티브리악이라 하오.”
깃발과 상대의 복색을 살핀 후였다. 자신보다 직급이 낮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말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에 반응하듯, 선두에서 말을 타고 온 지휘관은 훌쩍 말에서 뛰어내려 깍듯이 예를 취했다.
“티브리악 장군을 뵙습니다. 보리스 크렘보르라 합니다. 최대한 서두른다고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너무 늦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무슨 말씀을. 딱 맞춰 오셨소.”
두 젊은 무관의 시선이 마주치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의 눈에 묘한 빛이 감돌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