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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07화 (707/1,064)

707화

“군마 오백 필. 화살 오천 개. 창 이천 자루…….”

요구를 하면서도 다소 과한 요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르비아가 난색을 표하면서 양을 조절한다면 못마땅한 기색을 풍기며 양보해주는 척 하려고 했다.

“알겠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가르비아는 이쪽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반응이 너무 시원시원해서 오히려 살라스와 토어릭 등이 내심 당황할 정도였다.

아무튼, 이쪽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면 좋은 일이었다. 살라스와 토어릭을 비롯한 협상단은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협상장을 나섰다.

“무슨 생각일까?”

돌아오는 길에 살라스가 토어릭에게 물었다. 그로서는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아바시스군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글쎄요. 사실 우리의 요구가 그렇게까지 무리한 것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들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어. 전투가 한창일 때 저들이 승기를 잡았던 것도 사실이고.”

“승리를 하더라도, 그 와중에 입을 피해를 감수할 생각이 없다는 거겠지요. 우리에게 거둘 승리가 저들에게는 그리 가치가 없을 수도 있고요.”

“승리가 가치 없다?”

“아시겠지만, 승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승리를 거둔 후에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요. 우리에게 승리한들 저들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우선 생각나는 것은 솔롬과 판니른이었다. 하지만 전자야 그렇다 치고, 후자는 쉽지 않을 터였다. 솔롬이 무너진다고 해도 방위군단이 통째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며, 하잘과 총독이 건재하니까.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와 바라눔 트라소프가 열심히 싸우면서 서로 힘을 빼는 것이 최상이겠지요.”

“남의 싸움이다 이거로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니. 자네 말이 맞아. 들개 같은 놈들이로군.”

시원하게 그 들개의 주둥이를 뭉개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으니 아쉬울 뿐이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입니다. 짧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것 같군요.”

“내 생각도 같아. 정말…쉽지 않군.”

터무니없이 거대한 전쟁에 휩쓸렸다. 그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매일 실감하고 있었는데, 이 거대한 전쟁조차 더 큰 혼란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니 맥이 풀려서 순간적으로 머리가 다 멍해질 지경이었다.

“허무하게 휩쓸려버리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겠군.”

“저는 진작 그러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도 중심을 잡고 버티기가 영 쉽지 않군요.”

“그런가? 더 노력해야겠군.”

“예. 그래야겠습니다. 하하.”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시신들을 보았다. 창칼에 찔리고 베인 것부터 시작해서 바위에 깔려 흉해진 것들까지, 온갖 종류의 시체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천천히 걷는 말 위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 싸움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어쩌면 시답잖은 의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그 시시한 질문에 대한 답을 쉽사리 떠올리지 못했다.

* * *

대외적으로는 판니른을 침공해온 아바시스군을 군터 크렘보르가 이끄는 군대가 패퇴시킨 걸로 알려질 것이다.

물론 내밀한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바깥에서 봐서는 그 차이를 알아차릴 수 없으리라. 그만큼 전투 이후에 이루어진 양측 군대의 퇴각은 자연스러웠다.

“좋게 끝났다는 것은 압니다만…영 찝찝하군요. 전투 후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처음입니다.”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할렌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심정인 듯했고.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네.”

“살라스님은 납득하신 모양입니다.”

“장군께서는 우리보다 더 큰 것을 보신다네. 좁은 안목으로 그분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삼가야지. 나는 단지 장군께서 보시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네.”

“항상 겸손하십니다. 장군에 대한 충심은 말할 것도 없고요.”

아드리안이 장난스럽게 툴툴거렸다.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나머지는 진심이었다. 군터에 대한 살라스의 충성심은 대단한 수준을 넘어서 맹목적이까지 했다. 가끔 옆에서 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렇게까지 충실하게 따를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살라스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조금 전에 느낀 찝찝함 같은 것이 모두 하찮게 느껴진다.

“군마가 적은 것이 문제로군요. 아바시스 놈들에게서 뜯어낸 것도 고작 500필이니.……”

화제가 넘어갔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침묵하고 있던 이들도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번 전투로 다른 것보다 기병의 손실이 큽니다. 요즘에는 군마 값이 거의 금값이라…….”

“값이 문제가 아니라, 질 좋은 군마는 돈이 있어도 구하기가 어렵다고 들었소. 보나마나 장군께서는 군마를 보충하라 하실 터인데, 이거 참.”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들의 상관이 기병을 무척이나 편애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병 전력이 군대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군터의 경우는 그 정도가 아니라 거의 집착 수준이었다. 다들 쉬쉬하기는 하지만, 본인이 초원의 기마민족 출신이라서 그렇다는 것이 아랫사람들 사이에서는 거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었다.

“군마를 자네들이 구해오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러나.”

살라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군마도 그렇고, 군대의 보급을 책임지는 것은 내무를 보는 관리들이었다. 군마 보급 문제로 머리가 아플 이들도 그들이었고.

“그건 그렇다 치고, 다른 말들이 나오지는 않나?”

“당시에는 다들 경황이 없었으니까요. 뭐, 일부는 의아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만…대체적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않는다?”

“살라스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이곳에서 애국심에 목을 매는 놈들은 보기 힘듭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제국과 아바시스가 오랜 숙적이라는 것은 모르는 이가 없지만, 모든 제국민이 아바시스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국이 워낙 넓다 보니 아바시스와의 국경에서 멀수록, 그리고 황도에서 멀수록 그런 감정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판니른을 비롯한 제국 북부 쯤에 이르게 되면 아바시스라는 나라는 이름만 얼핏 들어본 수준에 그치게 된다. 뿌리 깊은 적개심? 그런 것은 깨어있는 척, 고상한 척 하기를 좋아하는 글쟁이들이나 억지로 연기하지 않을까?

이 땅의 평범한 백성, 병사들에게 있어서 아바시스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바시스군이 쳐들어온 후에야 그들은 아바시스가 적이라는 것을 자각했으리라.

그들은 군터가 제국의 숙적을 앞에 두고 말머리를 돌린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조금 전까지 치열하게 싸우던 적을 왜 고이 보내주는지를 의아해 할 뿐.

“적당히 모양새를 냈으니 자네들이 힘써서 가라앉히도록 하게.”

“예.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모양새가 꽤 잘 나왔으니까요.”

아바시스의, 아니 가르비아라는 작자의 적극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고맙지는 않다. 아무리 좋게 포장을 해도 그가 적이었고 침략자였던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나저나…시간문제겠군요.”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말이었으나,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이는 없었다.

살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엊그제 들어온 소식으로는, 아록이 아주 엉망이 되었다던데 말입니다.”

엉망이라는 것도 굉장히 순화한 표현이었다. 서신에서는 글 몇 줄로 요약했지만, 아록의 참상은 상상 이상일 터였다.

“지금은 더 심각해졌을 테지.”

추측이지만,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가르비아는 그가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이 바라눔 트라소프와의 거래 때문이라고 실토했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지금쯤이면 숨을 고르던 서쪽의 황자가 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을 터.

“아록이 넘어갔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니길 바라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너무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일까.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 주가 넘어가느니 마니 하는 것도, 기껏해야 주 방위군의 장교에 불과한 그들에게 있어서는 너무 거창한 이야기였다.

“장군께서는 아직 그…….”

“수련.”

“예, 예. 수련 중이십니까?”

“음.”

이런저런 이야기가 자유롭게 오가던 중에 수련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막사 안이 조용해졌다. 살라스는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분위기에 내심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들은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걸까.

“껄끄럽게 여길 수 있다는 것을 아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자네들이 껄끄럽게 여기는 그 힘이 이번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는지를 생각해보게나. 아니지. 병사들뿐인가? 나를 비롯해서, 자네들 중에도 분명 몇 있을 텐데.”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러자 할렌이 어색함을 깨려는 듯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타박하지 마십시오. 이 친구들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다들 마음이 여려서 그런 게지요. 곧 익숙해지지 않겠습니까?”

“1년 전쯤에 그런 소리를 했다면 이해했겠지. 하지만 적응이 너무 느린 것이 아닌가?”

“뭐, 그렇기도 하지요. 하지만 걸어 다니는 시체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할렌의 변명 아닌 변명에 살라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병사들은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자네들까지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자네들 모두 장군을 따른 세월이 짧지 않은데, 이제는 장군에 대해 알 만큼 알지 않나. 그분께서는 전투 때마다 늘 선봉에 서시지. 일군을 이끄는 대장인 분이 말이야. 자네들은 그런 분을 상관으로 모실 수 있음을 자랑스러워 해야 하네.”

일장연설을 마친 살라스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리들이 오가지 않도록 잘 단속하게.”

그 마지막 한 마디에는 은근하게 힘이 실려 있어서, 듣는 이들이 적잖은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 * *

성벽에 붙은 불길은 꺼질 줄을 몰랐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기세 좋게 피어 오르고, 성벽 위에 주저앉은 병사들은 거뭇해진 얼굴로 감자 한 알을 아껴 먹었다.

“오늘로 벌써 사흘째인가.”

“예.”

“원군은? 아직 소식이 없나?”

다시 한 번 예, 하고 힘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앉아있었다고 그새 몸이 굳었는지, 두 다리로 똑바로 서기까지 그는 두어 번을 휘청거려야 했다.

“식량은 얼마나 남았나.”

“계속 이렇게 보급한다면 보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름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너무 낙관적인 전망 아닌가?”

“…….”

비꼬려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답답한 상황 때문에 심사가 비틀렸을 뿐. 결과적으로 괜한 화풀이를 한 셈이라,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혀를 차며 성 밖을 바라보았다.

시커멓게 도열한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속이 더부룩해진다. 그렇게 싸우고, 그렇게 죽였는데도 아직 저렇게나 많이 남았다니.

“내일 아침부터는 배급을 조금 더 넉넉하게 하도록.”

“넉넉하게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지.”

“닷새.”

“닷새…입니까.”

“놈들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이야. 오늘 해가 지기도 전에 물러난 것이 그 증거지. 힘을 아끼고 있어.”

부관은 그것을 어찌 장담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의 젊은 상관은 이제껏 나이에 걸맞지 않은 역량을 여러 차례 보여왔다. 신뢰라는 것이 쌓이기 충분한 시간이었고, 경험이었다. 그는 이제 젊은 상관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닷새만 버티면 되네. 버티든, 버티지 못하든 그걸로 끝이야.”

“닷새를 버텨도 원군이 당도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끝이라는 거지.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돼. 그 이후의 일은 원신께서 굽어살피시기를 바랄 수밖에.”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때 탄 얼굴로 싱긋 웃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말끔한 얼굴이었다면, 아마 그 미소는 꽤나 근사했으리라.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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