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화
군터와 가르비아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충직하고, 용맹스러운 수하들이군. 이런 곳에서 스러지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군인은 대부분 전장에서 죽는다.”
틀린 말이 아니다. 전장을 떠나 군인이 아니게 된 채 죽는 이들을 제외하면 군인은 대부분 군인으로서, 전장에서 죽는다.
짧은 말 속에 담긴 뜻을 가르비아가 읽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이건 그의 생각보다도 더 심각했다.
“기어코 내 목을 가져가셔야겠다?”
“야심이 큰놈이로군.”
“그게 무슨 상관이지?”
“네 목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네 스스로 이야기해봐라.”
가르비아의 말은 특유의 교묘함을 걷어내더라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감정적으로는 이 자리에서 끝을 보고 싶었지만, 조금 열을 식히고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여기서 끝을 보려면 많은 피를 흘려야 할 텐데,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가르비아의 말처럼, 아직 진짜 싸움은 시작도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저들이 당도하려면 멀었어.”
“그 전에 내 목을 가져갈 수 있을 것 같나?”
군터의 말에 가르비아가 주변을 돌아보며 얼마 남지 않은 시체들을 보았다.
마치 너도 보라는 듯한 몸짓에, 군터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숨결을 따라, 쓰러진 시체들에서 영혼들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망가진 육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육신에 깃들었다.그 과정은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웠다.
“아, 이런.”
가르비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명령을 따라 싸우던 병사들이 적이 되어 일어나는 광경을 보는 건 지휘관으로서 썩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얼마 남지 않았던 적장의 호위병력이 다시 처음처럼 돌아갔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보다는 아군 병사들의 수가 많아졌지만, 저 죽지 않는 장애물들을 넘으려면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 가. 또, 기어이 넘는다고 해도 지금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때는 또 어쩔 것인가.
‘사령술사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좋겠군.’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악몽인가 싶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수백이나 되는 강력한 시체들을 저리 손쉽게 부릴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이야기를 할 마음이 생겼을 것 같은데.”
저 담담한 목소리가 이제는 얄밉게 느껴졌다. 가르비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야 할 것 같군. 아, 내 목에 스스로 가치를 매기라고 했었던가? 난 원탁 의회의 의원이고, 이 원정군을 이끄는 대장이지만 그뿐이네. 아바시스에는 나 같은 이들이 적지 않지.”
“잡설이 길군.”
“뭘 원하나?”
“뭘 해줄 수 있지?”
“글쎄. 모르겠군. 자네가 뭘 원하는지에 달렸겠지.”
“첫째. 지금 즉시 이 땅을 떠나라.”
“물론 그리 해야지.”
“또한 향후 5년간 이 땅에 발도 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며.”
“약조하지.”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했던 바이며,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각서를 쓰라고 해도 기꺼이 쓸 수 있었다. 어차피 계획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카라누르 북부에 5년 내로 발을 들일 일은 없을 텐데 각서가 대수겠는가.
“아말로페 트라소프와 손을 잡았지? 이번에 쳐들어온 것은 바라눔 트라소프와 관련이 있나?”
“답해주기 어려운 부분이군. 말했듯, 난 일개 장수에 불과해서 말이야.”
“거래를 하자고 해놓고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발을 빼는군. 조금 전에 한 말의 진정성이 의심 돼.”
“자네, 나를 정말 곤란해지게 만드는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결착을 내도 좋다.”
“후우.”
단호하다 못해 심드렁한 태도를 보아하니 조금도 양보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슬슬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여기까지 와서 판을 접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가르비아는 입을 꾹 다물고 차분하게 득실을 따져보았다. 얼간이 황자와 손을 잡은 것이야 공식화만 되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걸 아바시스의 의원이자 원정군의 대장인 그가 인정해버린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어쨌든 큰 부담은 아니다. 문제는 후자.
바라눔 트라소프는 얼간이 황자와는 차원이 다른 자다. 그는 우습게 볼 수 없는 상대이니, 자그마한 빌미라도 줄 수 없다.
‘뭐, 어차피 지금쯤이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겠지만.’
당초 목적은 바라눔 트라소프가 전력으로 싸우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면 처음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향후 일이 어떻게 풀릴지 모르니 최대한 조심해야 할 터.
“맞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나중 일이 아닌가. 크나큰 피해는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데,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피하고 봐야 할 것이 아닌가.
“발이 넓군.”
“아국이 발이 넓다기보다는, 황자들의 권력욕이 상상 이상인 덕이지. 아니면 과거야 어쨌든, 미래가 중요하다는 것일 수도 있고.”
“지금 한 말. 글로 남길 수 있나?”
“가능할 것 같나?”
“차라리 목을 베라고 할 기세로군.”
“정확해. 여기까지는 아슬아슬하게 내 권한 하에 덮을 수 있지만, 이 이상은 내 목 하나로도 부족해지거든.”
가르비아는 전에 없이 단호하게 받아 쳤다.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는 그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군터도 무리를 하지는 않았다.
“너희의 공격으로 아군은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배상해라.”
“하아.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그리 하지. 더 없나?”
“더 요구한다면 들어줄 텐가?”
“들어줄 수는 없고, 칼을 뽑아줄 수는 있지.”
코웃음을 친 군터가 비스듬히 치켜들고 있던 창을 늘어뜨렸다. 그에 가르비아가 눈짓으로 신호하자 한 병사가 조심스럽게 말 한 마리를 끌고 나와 군터에게 건넸다.
“자네가 타고 있던 녀석만큼은 아니겠지만, 탈 만은 할 걸세.”
군터는 대꾸하지 않고 말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의 수하들이 다가오고 있는 방향으로 말을 달렸다.
가르비아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곧 한숨을 쉬며 똬리를 틀고 앉았다. 진이 잔뜩 빠진 모습이었다.
“장군.”
하킬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어려운 싸움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소관도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까지 굽히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자존심이 상하는가?”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승기는 아군에게 있으니, 이대로 계속 싸워도 그 결과가 나쁘지 않았을 터인데.”
“이기긴 이겼겠지.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치러야 할 손해는 어느 정도였겠나? 이 촌구석을 손에 넣기 위해 아국의 장정들이 뿌려야 할 피가 얼마였겠느냐는 말이야.”
“으음.”
“손에 넣는다고 해도 문제지. 대협곡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을, 아국이 언제까지 지킬 수 있겠나? 뭐 어찌어찌 지킬 수 있다고 쳐도, 이 땅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가르이바는 계속해서 가치를 입에 담았다. 그건 그가 이 전쟁을 어찌 보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단어였다.
“명심하게. 이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야. 여기서 물러난다고 해서 아국의 성이나 도시가 위협받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이것은 카라누르 놈들의 전쟁이고, 우리는 단지 그 전쟁에 주워먹을 만한 것을 찾아 고개를 들이민 것에 불과해. 그런 전쟁에서 괜한 자존심 때문에 피를 흘린다면, 그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소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장군의 깊은 헤아림을 알지 못하고 경솔하게 입을 열었군요.”
“탓할 생각은 없네. 군인이 눈앞의 적을 두고 등을 돌리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은 당연해. 하지만 그 전에, 적이 누구인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나?”
“장군의 가르침을 구합니다.”
“간단하게 생각하게. 아국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자가 바로 적이야. 난 싸움을 위해서 싸우지 않고, 승리를 위해 싸우지 않아. 아국의 이익을 위해 싸우지. 개인적인 바람이네만, 자네도 그랬으면 좋겠군.”
하킬은 가르비아의 말에 적잖이 감명받은 것 같았다. 그는 ‘아국의 이익’이라는 말을 몇 번 조용히 되뇌더니 눈빛이 달라졌다. 가르비아를 향한 그 눈빛은, 가르비아가 바라 마지 않던 것이었다.
‘됐군.’
가르비아는 내심 크게 미소 지었다. 그가 이렇게 생고생을 자처한 이유가 바로 이것을 위해서였다.
하킬은 생각이 단순한 전형적인 무부였지만 군 내에서 그의 위상은 꽤나 높았다. 높은 지위에 있는 이답지 않게 아랫사람들에게 너그럽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성미 때문이었다. 비록 대장은 가르비아였지만, 의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경향은 장교보다 병사들 사이에서 더 강했는데, 그들은 가르비아보다는 하킬을 더 따랐다. 가르비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장 손을 쓸 수가 없어 좋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킬과 그의 조카는 내게 목숨을 빚졌지.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이 어느 정도 먹힌 것 같으니 앞으로 내가 크게 엇나가지 않는 한 그의 지지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킬의 지지를 얻는 것은 곧 군대 전체의 지지를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하킬이 마음을 돌린다면 군대의 지지 또한 흔들리게 될 테지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면 될 일이다. 하킬 같은 단순한 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야 어려울 것이 없고, 천천히 병사들의 마음을 얻는다면 나중에 하킬을 치워버리더라도 문제가 없을 터.
그때가 되면 원정군 전체가 손에 들어오는 셈. 그것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어리석은 놈들. 남의 집안 싸움에 끼어들어서 뭘 얻을 수 있겠느냐고?’
원탁에 둘러앉은, 소위 의원이라는 놈들은 자신들의 권세에 취해있다. 그들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나라 안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 밖의 문제였으나,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들은 세상이 자기들의 것인 양 거드름을 피워댔다. 그들은 아바시스의, 세상의 모든 일이 그들의 앞에 놓인 원탁에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원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사이 좋게 지내자고 둥근 탁자를 놓았건만, 거기에 둘러앉은 이들은 모두가 양보는 없이 욕심을 내기만 한다. 그러니 결국 자그마한 것 하나에도 언성을 높이고, 서로를 끝없이 견제하게 된다.
가르비아는 그 치열한 다툼의 장에서 무언가를 성취할 생각은 오래 전에 버렸다. 그가 노리는 기회는 자그마한 원탁 위가 아니라 더 넓은 세상에 있었다.
‘황좌의 주인이 정해진다고 해도 카라누르의 혼란이 금방 가시지는 않아. 카라누르가 시끌시끌하면 아국도 조용할 수는 없지. 얻어내는 것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힘은 더 커질 것은 당연한 일.’
원탁 의회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의회 내에서 가르비아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나가 일족을 대표하는 상징성 때문에 의석이 주어졌을 뿐, 그가 지닌 권력이나 명성 같은 것은 다른 의원들에 비하면 사소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가 의회 내에서 할 수 있는 일도 기껏해야 거수기 노릇을 해주고 약간의 대가를 받는 정도가 다였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어디 가서 행세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가르비아의 야심은 그 정도에 만족하기에는 너무 컸다.
‘지금은 나를 비웃고 있겠지. 하지만 두고 봐라. 내가 개선문을 지나는 날, 너희 모두가 키펠의 대로까지 나를 마중 나와야 할 것이야.’
원대한 꿈. 하지만 결코 멀지 않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굴욕이야 몇 번이든 감내할 수 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