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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05화 (705/1,064)

705화

군터는 적장이 느닷없이 돌진해 들어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창을 내질렀다. 적장, 가르비아는 그에 빠르게 몸을 뺐으나 그가 내뱉은 연기는 이미 다 퍼지고 난 후였다.

‘이건…….’

생소한 냄새. 하지만 익숙했다. 코를 살짝 마비시키면서 몸에 오한이 돋게 하는, 이런 비슷한 느낌을 이전에도 몇 번이나 겪은 적이 있었다.

“독?”

가르비아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희한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볼 뿐. 그런 그의 반응이 곧 답이나 마찬가지였다.

“버티는군. 해독 능력이 있는 법구라도 지니고 있나?”

“신기한 재주로군.”

“뭐,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여유로워도 되나? 자네는 몰라도, 자네의 말은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순간, 군터는 아차 싶었다. 그가 시선을 내림과 동시에 갑작스레 말이 휘청거리더니 몇 발자국을 난잡하게 내딛다가 기어이 쓰러지고 말았다.

군터는 쓰러지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경련을 일으키는 말에게서 시선을 떼고 가르비아를 바라보았다.

“말을 노린 건가?”

“장군쯤 되면 호신용 법구는 여럿 지니고 있기 마련이니까. 내 독이 법구의 능력을 뚫을 정도로 강한 건 아니라서 말이지.”

깔끔하게 당했다. 함정에 빠진 것도 그렇고, 지금 이 상황도 그렇고, 상대에게 여러 번 물을 먹었다. 아무래도 머리 쓰는 재주는 못 따라갈 듯싶었다. 뭐, 원래 그런 쪽으로 자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어때? 이제 좀 생각이 바뀌었나?”

“그럴 리가.”

헛웃음이 나왔다. 말 하나 쓰러뜨렸다고 여유를 부리는 상대가 우스워서다. 설마하니 말에서 내리게 했다고 뭔가 달라졌다 생각하는 걸까.

‘고집부리지 말고 이제 슬슬 굽혀줬으면 하는데.’

군터의 추측은 정확했다. 가르비아는 군터의 용력이 대단한 것은 알았지만, 말을 잃었으니 이제 한계라 여겼다. 시체들이 까다롭기는 하지만 꾸준히 수가 줄고 있었고, 이제 곧 아군 병사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터였다. 그때가 되면 놔주고 싶어도 놔줄 명분이 마땅치 않게 된다.

‘이봐. 너무 늦기 전에 내 손을 잡으란 말이야.’

여기서 끝을 볼 생각은 없다. 누구 좋으라고 그런단 말인가? 저 서쪽에 있는 황자를 위해서? 아니면 카라누르를 위해서? 여기서 피를 흘리는 건 아무런 쓸데없는, 무의미한 희생에 불과하다. 적어도 가르비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냉정해져라. 말도 잃은 네가 맨몸뚱이 하나로 뭘 할 수 있지? 이쯤에서 접는 것이 네게도 최선이란 말이다.’

가르비아는 상대가 조금만 더 머리를 써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바람은, 상대의 신형이 흐릿해지는 것을 보며 산산이 부서졌다.

‘어리석은!’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어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상대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너무 빨랐던 탓이다. 눈에는 자신 있는 그로서도 움직임을 간신히 따라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상대가 돌대가리라서, 기어이 덤벼들 수 있으리라는 것도 예상했다. 하지만 그 빠르기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말에서 내렸는데도 거의 말에 타고 있을 때와 차이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카앙!

막았다. 역시 말에 타고 있을 때보다는 막을만했지만, 그래도 두 팔이 저릿한 것은 여전했다. 그의 몸이 부드럽게 뒤로 밀려났다.

“장군! 돕겠습니다!”

하킬이다. 혹 그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이 고생이 다 수포로 돌아갈 터. 어지간하면 끼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조심하게!”

말을 잃은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거래를 제안한 것을 도발로 받아들인 것인지는 몰라도 상대의 공세는 맹렬하기 그지없었다. 번뜩이는 창을 한번씩 받아낼 때마다 몸 전체가 크게 들썩일 정도였다.

“저, 저도 거들겠습니다!”

휴더가 그리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에 하킬이 와락 인상을 구겼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조카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만류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야말로 조카가 아니라 어린 아이의 손이라도 빌려 쓸 수만 있다면 써야 할 판이었다.

쾅!

도끼창이 튕기고, 하킬의 몸도 크게 튕기며 나뒹굴었다. 검은 창이 그 뒤를 쫓으려는 것을 가르비아가 막아섰고, 등을 보인 군터에게 휴더의 칼이 날아들었다.

* * *

“후우.”

그렇게나 날뛰었는데도 아직 힘이 남아돌았다. 이게 정말 자신의 힘인가 싶어, 할렌은 괜히 한번 주먹을 쥐어보았다.

‘위험해.’

모페이브가 숱하게 했던 말이, 경고가 떠올랐다. 이 힘은 생명을 태우는 힘이며, 그렇기에 반드시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만큼만 사용해야 한다던.

하지만 너무 심취해 버렸다. 처음이라서 그랬다고 변명하기에는, 경각심을 느끼고 있는 지금도 이 넘치는 힘이 너무도 매혹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힘이라면, 난 언제까지라도…….’

“대장!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다급한 목소리에 할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굴에 피를 뒤집어쓰다시피 한 수하가 보였다. 그리고 아직 그치지 않은 화살 비와, 여기저기서 몰려들고 있는 적들도.

“이제 슬슬 합류해야 합니다! 더 지체했다가는 발을 빼지도 못하게 될 거에요!”

“알겠다! 나머지 녀석들은?”

“살아있는 놈들은 다 물러났을 겁니다. 도대체가, 아까부터 고래고래 소리쳤는데 듣지 못한 겁니까? 어디까지 들어가려고 하신 겁니까?”

수하의 핀잔에도 할렌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스스로도 너무 흥분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처음 전장에 나온 애송이처럼, 눈과 귀가 멀어버리고 말았다.

‘조심해야겠어.’

이미 다른 아군은 대부분 물러난 후였다. 지금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대로 적군 속에 고립이 될 판이었다. 수하의 다급한 외침이 목숨을 살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판이라, 다소 시건방지게 나오는 수하에게 더더욱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살라스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뭐, 지금쯤 모을 수 있는 병력은 다 모으셨겠지요.”

예상이 아니라 희망사항에 가까웠으나 할렌은 그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도 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렌! 왜 이리 늦었나!”

다그치는 목소리마저 반가웠다. 살라스는 기대했던 대로 병력을 잘 수습한 듯했다. 병사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태가 괜찮았다.

“장군께서는?”

“아직이네. 곧 오시겠지.”

담담한 목소리에서는 조금의 의심이나 걱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확고한 믿음이라니, 할렌은 그런 살라스가 대단하게 여겨져 피식 웃었다.

웃기는 했지만, 할렌 역시 비슷했다. 그 역시 군터가 곧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길을 열어야지.”

“길목이 군데군데 끊겼습니다. 한번에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디만.”

“길은 뒤쪽으로만 나 있지 않네.”

“예?”

할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설마…….

표정으로 할렌의 속내를 읽었는지, 살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을 수 있는 병력은 다 모았네. 어차피 이렇게 고립된 이상 본군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막힌 길을 뚫고 돌아가는 것도 무리가 있어. 그럴 바에야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네. 적도 우리가 탈출할 것만 생각했지, 도리어 앞으로 뚫고 나가려고 하는 것은 생각지 못했을 가능성이 커.”

위험하기는 하지만, 일리는 있었다. 어차피 살라스의 말처럼 이대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막힌 길을 뚫으며 돌아가는 것도 무리라면 차라리…….

살라스와 할렌의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군터는 자신이 있었다.

비록 말을 잃었지만, 말 없이도 적장의 목을 취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상대가 셋, 어쩌면 조금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창을 찌르고 휘두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것이 조금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쾅!

제대로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막아낸 적장은 크게 흔들렸을지언정, 이번에도 어떻게든 버텨내는 모습이었다. 그가 자세를 회복하기 전에 달려들려고 했지만, 발을 떼기도 전에 도끼창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챙!

창대로 비스듬히 흘려 막았다. 충격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흘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저릿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군터는 전혀 놀라지 않았는데, 이게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도끼창과 부딪칠 때마다 손이 저리고 몸이 조금씩 굳는 것이, 아무래도 저 도끼창이 법구인 듯했다.

‘부딪치는 것보다는 피하는 편이 낫겠군.’

아주 잠깐, 감각이 조금 무뎌지는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거슬렸다. 군터는 창을 크게 휘둘러 거리를 벌리는 동시에 뒤에서 달려들던 적병의 팔을 낚아채고 그대로 꺾어버렸다.

“아아악!”

그리고는 비명을 지르는 적병을 걷어차 적장 쪽으로 날려버렸다. 적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아니, 그 전부터 굳어 있었던가?

표정이 굳어진 것은 저쪽이지만, 사실 상황만 놓고 따지면 이쪽이 더 좋지 않았다. 어느새 그가 부리는 시체는 3분의 1 정도로 줄어 있었고, 뚫고 들어오는 적병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꼼짝없이 포위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승부를 봐야 한다. 최대한 빠르게.

그러나 문제는, 그걸 알고 있다고 해도 그대로 실행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신기한 재주를 여럿 사용하는군.”

“어쩌겠나? 살려면 있는 재주, 없는 재주 다 꺼내놔야지.”

적장은 신기한 생김새만큼이나 신기한 재주를 여럿 가지고 있었다. 입에서 독을 뿜어대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쇳덩이 같은 꼬리를 칼을 휘두르듯 기습적으로 휘두르는 것도 그렇고, 인간의 신체구조로는 불가능한 온갖 기묘한 자세로 공격을 가하거나 방어하는 것도 그랬다. 그의 기상천외한 전투방식은 군터로서도 반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이제 조금 눈에 익어 서서히 적응이 되고 있었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흐르고 말았다.

“어떤가? 아직도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

“집요하군.”

“내 제안을 너무 고깝게 듣지 말게. 이보게. 우리가 싸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나도 자네도 서로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나?”

“먼저 쳐들어온 것은 네놈이다. 이제 와서 몸을 빼겠다고 하지만, 그걸 내가 들어줘야 할 이유가 있나?”

“내가 지금 굽히고 있다고 해서 궁지에 몰려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게나. 정말 독하게 마음먹는다면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볼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렇다면 그렇게 하면 될 일 아닌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군터가 창을 휘둘렀다. 창이 그리는 궤적에서 반투명한 검은 선이 쏘아져 나갔다. 가르비아가 다급히 몸을 뒤로 꺾어 그것을 피했지만, 그의 뒤에서 숨을 고르던 병사 두 명은 그러지 못했다.

“으아악!”

날아든 검은 선을 피하지 못한 그들이 쓰러져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얼굴이 빠르게 메마르며, 썩어 들어갔다. 그를 본 가르비아가 이를 갈며 외쳤다.

“정말 이렇게 나올 텐가! 자네 하나는 그렇다 치고, 수하들까지 다 죽어나가도 좋다는 거냐 이 말이야!”

솔직한 심정으로, 가르비아는 정말 여기서 끝내고 싶었다. 시체들은 점점 쓰러지고 있고, 주변에 아군 병사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작정한다면 저자의 목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저 검은 창이 자신의 목에 날아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 자신의 목뿐만 아니라 하킬의 목도 걱정이었다. 다 된 마당에 그가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이 이상의 싸움은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아. 그걸 정말로 모르겠나?”

분명 전황은 이쪽이 더 유리한데, 왜 이렇게 매달리듯 설득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숨을 헐떡이는 하킬이나, 주변을 둘러싸고 있음에도 얼굴에 불안감이 가득한 병사들을 보고 있자니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거워지는 팔에 억지로 힘을 주며 창을 치켜 들었다. 그러면서 언제 치고 들어올지 모르는 공격을 경계했다.

“장군. 그대를 위한 전장은 넘쳐나게 남아 있어. 괜히 여기서 얻는 것도 없이 힘을 뺄 필요는 없지 않겠나.”

이번에도 먹히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이 끝장을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때, 저 앞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퇴각하는 대신 뚫고 나가겠다는 건가.’

저 소란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가르비아는 상황이 참 재미있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면서 적장의 눈치를 살폈다.

“충직한 수하들이로군. 이런 곳에서 잃기에는 아까운 인재들이야.”

“생긴 것처럼 교활하군.”

평소의 그였다면, 이런 모욕을 결코 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애써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연기하면서 대꾸했다.

“칭찬으로 듣지. 하지만 장군. 잘 생각해보게. 이건 결코 지금의 자네에게 나쁜 제안이 아니야. 물론 내게도 그렇고.”

“…….”

가르비아는 답이 없는 상대를 보며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입술만이 아니라 피가 다 마르는 느낌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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