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4화
옛이야기, 그것도 꽤 끔찍한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음산한 사기를 풍기는 시체들이 산 자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잘 무장한 병사들은 그런 시체들을 이겨내고 뚫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아무리 창칼을 휘두른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시체들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군터는 죽은 자들 사이에서 홀로 숨 쉬었다. 그는 자연히 아바시스 병사들의 표적이 됐다. 그의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품 있어 보이는 무장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가 이 시체들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술법에 무지한 병사들도 다 알았다.
“저놈을 죽여!”
수백 명이 그의 목을 베겠다고 달려들고 있지만, 군터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시체들은 몸에 창칼이 박혀도, 사지가 잘려나가도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이 적을 물리치거나, 시간을 벌면 군터는 거리낌없이 그의 창을 휘둘렀다.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 적병 둘의 목, 그리고 시체의 허리가 잘려나갔다. 몸이 반 토막이 난 시체는 잘려나간 상체만 기어서 또 다른 살아있는 자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었으나 군터는 이 순간 조금 다른, 엉뚱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몸의 어디가 잘려나가도 죽지 않는다. 하긴, 살과 피가 다 사라지고 뼈만 남은 채로도 잘만 움직이는데 어딘가 잘려나갔다고 못 움직이게 된다면 그것도 웃긴 일이다.
사령술로 일으킨 시체는 그것에 깃든 영혼과 죽음의 힘으로 움직인다. 그 둘이 한 점에 응어리진 것이 동력원이자 급소. 모페이브는 그것을 핵이라고 이름 지었다. 고렘으로 치면 기석과 거의 같은 일을 하는 그것은,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없앨 수 없다. 시체에 깃든 기운이 자연스럽게 소모되어 사라지거나, 아니면 술법의 힘으로 핵을 파괴해야 한다.
“으아아아!”
즉, 지금 아바시스의 병사들이 하는 것처럼 무턱대고 칼질을 해대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사지가 잘려나가고, 지금 기어가는 시체처럼 아예 하반신이 날아가면 무력화가 되기는 한다. 완전한 무력화는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 군터가 부리는 시체들이라고 해도 무적은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멀쩡히 서 있는 시체들의 수가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푸욱!
화살 한 대가 견갑을 뚫고 살을 파고들었다. 계속 창을 휘두르면서도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는데, 어깨를 파고든 이 화살은 그의 예상보다 더 빨랐다.
“후우.”
살짝 거칠어진 숨을 고른 군터가 고개를 돌렸다.
제법 거리가 떨어진 곳. 큼지막한 활을 든 무관이 보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어깨가 떡 벌어진 것이, 제법 힘 좀 쓰게 생긴 사내였다. 눈매가 일그러진 것을 보니 어깨가 아니라 머리를 꿰뚫고 싶었던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군터가 마지막 섬뜩함을 순간에 몸을 틀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자 핏줄기가 솟구쳤다. 생각보다 깊게 박힌 모양이었다. 튼튼한 갑옷을 뚫고 이렇게 깊숙이 파고들 정도라면 화살에 실린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갔다. 아마 머리에 맞았더라면 투구가 있었더라도 치명상을 입었을 터.
“다음번엔 머리통을 꿰뚫어주마!”
목청이 좋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군터는 대꾸하지 않고 창을 휘둘렀다. 숨죽인 채 달려들던 적병 하나가 허공에서 목이 달아났다.
‘건방진 놈.’
지금처럼 길목만 틀어막고 있어도 되는 것을, 굳이 뛰쳐나갈 이유가 있을까. 저 시건방진 도발을 응징하고픈 마음이야 당장이라도 말을 몰고 달려가서 목을 베어버려도 시원찮을 정도지만, 저런 노골적인 도발에 넘어가기에는 그동안 전장에서 보낸 세월이 너무 길다.
‘저놈을 노려라.’
직접 대응하는 대신, 시체들을 시켜 화살이 날아온 방향 쪽으로 덤벼들게 했다. 잡병들이야 몇 놈이 덤비든 체력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날카로운 공격은 신경이 분산된 상태로는 제대로 반응하기가 힘들다.
“배알도 없는 놈이로구나!”
활 솜씨는 쓸만하나, 도발에는 소질이 없는 놈이 분명하다. 외치는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한데, 목소리만 들어서는 누가 누굴 도발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다.
‘화가 난 건가?’
어쩌면,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지금 덤벼들고 있는 시체들은 모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바시스의 장병들이었으니까. 동료였던 이들과 창칼을 맞대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
‘애송이로군.’
그렇게 결론 내린 군터는 그에게서 신경을 껐다. 수십이 넘는 시체들이 일제히 달려드니 조금씩 아바시스 병사들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고, 그 뒤에 있던 젊은 무관도 덩달아 압박을 받아 바빠졌다. 두어 번 정도 더 화살이 날아왔지만, 이번에는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터라 창을 휘둘러 어렵지 않게 쳐냈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그에게로 몰려간 시체들이 다 쓰러지기 전에는 물러설 테니, 다시 얼굴을 보게 된다면 군을 추스른 후에 다시 일전을 벌일 때가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젊음의 혈기는 그의 생각보다 더 뜨거웠다.
* * *
“휴더! 저 바보 같은 놈!”
하킬이 버럭 화를 냈다. 전황을 내려다보며 표정을 구기고 있던 가르비아가 그 소리에 놀라 돌아보았는데, 하킬은 상관의 시선도 느끼지 못하는지 안절부절못하며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아는 자인가?”
“아, 장군. 송구합니다. 제 조카 녀석입니다.”
그 말에 가르비아는 적장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젊은 무관을 다시 보았다. 화살을 날릴 때부터 알아보았지만, 덤벼드는 시체를 밀쳐내며 적장에게 접근하는 모습만 봐도 일신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임을 알 수 있었다.
“누이의 아들놈이지요. 어린 나이임에도 재주가 있는 것 같아 데려왔는데,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종종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함부로 쓰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놈이 이번에도…….”
하킬의 하소연인지 분풀이인지 모를 말이 이어지던 중. 가르비아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동시에 하킬의 눈이 부릅 뜨였다.
* * *
“목을 내놔라! 카라누르의 개야!”
기세 하나만은 인정할 만했다. 끊임없이 달려드는 시체들을 이겨내고 그의 앞까지 온 것만 해도 말이다.
하지만 혈기만 가지고서는 무모함에 대한 대가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호흡은 상체가 크게 들썩일 만큼 흐트러졌고, 얼굴에는 피에 가렸지만 굵은 땀이 흐른다. 이런 몰골이 되어서도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것은 착각이고, 오만이다. 기세만으로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는 법. 어쩌면 이 젊은 무관은 아직 그런 이치를 모르는지도 모른다.
“대단하군.”
순수한 감탄이었다. 물론 그 감탄의 이유는, 듣는 당사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를 테지만…아무래도 당사자는 그 차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젊은 무관은 씩 웃으며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군터는 굳이 짤막한 휴식을 취하는 상대를 공격하지 않았다. 먼저 전장을 누벼온 선배로서, 이 무모한 후배에게 그 정도 관용은 베풀 수 있었다.
“카라누르의 개답구나. 이런 사악한 술법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그래. 유언은 듣지 않겠다. 네 목으로 이 휴더의 무명을 높일 것이다. 이 몸의 무용담의 일부가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누가 너를 전장에 내보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그는 후회하고 슬퍼하겠구나.”
“무슨 개소…….”
들을 말은 다 들었으니 이제 더는 기다릴 것도, 참을 것도 없었다. 군터는 예고 없이 말의 배를 찼다. 신호를 들은 군마가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거칠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검은 창이 번개처럼 젊은 무관, 휴더를 찔렀다.
“윽!”
휴더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른 일격에 크게 당황했다. 사실 그는 적장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습적으로 쏘아냈던 화살에 반응한 것만 봐도 만만한 상대라는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었고, 무엇보다 상대가 지쳤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이런 사악한, 대규모 술법을 부리고 있다. 거기에 직접 창을 휘두르며 수십 명의 병사를 죽였다. 그 무공은 실로 가공할만한 것이었지만, 사람인 이상 체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 아무리 체력이 좋다 해도 이제 슬슬 지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그런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휴더는 다소 무리를 하면서까지 적장의 앞에 섰다. 다른 누군가가 공을 빼앗아가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는 조바심도 그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공격은 뭔가? 창이 뻗어오는 것이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번뜩인 순간, 반쯤은 감에 의지하여 가까스로 그것을 막았다.
쾅!
굉음이 터지고, 휴더는 바르르 떨리는 칼과 함께 크게 뒤로 밀려났다.
손이 아렸다. 팔 전체가 찌르르 울리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순간적으로 숨이 턱하고 막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격은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조금 전과 같은 공격이, 희끄무레한 잔상이 대여섯 개가 한꺼번에 번뜩였다.
휴더는 정신없이 칼을 움직였다. 스스로도 어떻게 막아내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그의 방어는 훌륭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그의 몸이 절로 반응하는 듯했다.
“허업!”
몇 발자국이나 밀려났을까. 세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 한참을 밀려난 그는 다급하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이 또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허공에 몸을 날리던 찰나의 순간, 휴더는 무언가 거무튀튀한 선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저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건 막을 수 없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확신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저것에 맞서서는 안 된다고. 칼날로 막을 수 없는, 일종의 술법인 것이 분명했다.
“허억…허억!”
잠깐의 공방. 불과 숨 몇 번 쉴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부딪친 것뿐이었으나 휴더는 한계를 느꼈다.
숨은 목구멍에서 막히기라도 한 듯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몸은 사지에 쇳덩이를 단 것처럼 무거웠다. 그나마 칼이라도 제대로 들고 있는 것이 다행일 지경이었다.
“으으!”
흉악한 기세가 그를 짓눌렀다. 사납다고 소문이 난 맹수를 여러 번 눈앞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 섬뜩함은 흡사, 날카로운 이빨을 목줄기에 가져다 대고 있는 것 같은…….
‘터무니없는 만용이었다. 나는…이 무슨 어리석은!’
상대는 숨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야속한 말이 다시 한번 달리기 시작했을 때, 또다시 번뜩이는 검은 창을 보며 휴더는 죽음을 직감했다.
두렵고, 허무했다. 만용을 부린 조금 전의 자신에게 화도 났다.
최후의 순간. 그는 눈을 감았다. 비겁하지만, 도저히 다가오는 죽음을 정면에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카앙!
그렇기에, 그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을 때도 바로 눈을 뜨지 못했다.
“얼간이 녀석! 눈을 떠라!”
그를 꾸짖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직후에야 다시 눈을 떴다.
“수, 숙부님?”
휴더가 눈을 떴을 때, 그의 숙부 하킬이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평소 그가 애지중지하던 도끼창을 비스듬하게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여전히 두려운 기세를 풍기고 있는 적장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숙부님이 날 구하셨구나!’
상황을 이해하고, 안도감이 들자 다리가 풀렸다. 휴더는 그대로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간신히 견디고 애써 목소리를 냈다.
“숙부님. 감사합니다. 그리고…면목 없습니다.”
“감사 인사는 내가 아니라 장군께 하거라!”
“예?”
영문 모를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보였다. 그의 숙부보다 앞에 등을 보이고 있는 한 사내가.
* * *
“이러고 싶지는 않았어. 정말이야.”
진심이었다. 가르비아는 군인이었고, 무인 기질도 갖춘 사내였지만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은 질색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그의 관점에서 대단히 무모했다.
적장, 군터 크렘보르는 심상치 않은 자였다. 이런 자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상황은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휘하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죽어나간 병사들이 시체가 되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나서지 않았다. 이미 유리한 상황에 직접 나섰다가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무슨 손해인가. 아니,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총대장이 직접 칼부림을 벌이는 것 자체가 가르비아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놈은 나랑은 정말 안 맞는 놈이란 말이지.’
일군을 이끄는 대장이나 되어서 선봉에 서다니. 정신이 나간 자가 아닌가. 물론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그러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무모한 것은 마찬가지다.
“내가 제안 하나 하지.”
“제안?”
생각보다 목소리는 평범하다. 무지막지한 행태나, 겉모습을 봐서는 목소리도 조금 더 험악할 줄 알았건만.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나? 짐작했겠지만, 우리는 할 일을 다 했어. 굳이 더 피를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만약 그쪽이 지금 물러나겠다면 곱게 보내주겠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가르비아는 자신의 제안이 대단히 합리적이고, 관용 넘치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어지간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물러가지. 단, 너희 셋의 목을 벤 후에.”
그렇기에 자신의 제안이 곧바로 거절당했을 때, 가르비아는 그답지 않게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일군을 이끄는 장수라면 감정에 휩쓸려 결정하지 말도록.”
“감정에 휩쓸려? 아니. 아니지. 챙길 수 있는 것은 챙기고 싶을 뿐이다.”
목소리는 평온했다. 내심까지 그런 것일까? 정말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가르비아는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았지만, 보이는 거라고는 불길하게 일렁이는…착각일지도 모를 무언가뿐이었다.
“좋아. 정 그렇게 나오겠다면.”
가르비아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그 속도는 막 달리기 시작한 말 못지않았다.
“후욱!”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졌을 때, 가르비아는 기습적으로 입을 벌렸다. 그의 입에서 푸르스름한 안개가 흘러나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