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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03화 (703/1,064)

703화

군터의 외침이 있기는 했으나, 이미 흩어져 있던 병력이 단번에 뭉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움직인 쪽은 상황이 나았지만, 졸지에 큼지막한 바위며 나무들 때문에 앞뒤가 막혀버린 병사들은 혼란에 빠진 상태로 머리 위를 뒤덮는 화살 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방패 들어!”

일반적인 군대였다면 길게 늘어선 상태에서 지금처럼 대열이 끊기고 혼란에 빠진 순간 자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군터가 이끄는 군대는 전투 경험이 풍부했으며, 특히 장교들의 군 경력이 길고 화려한 편이었다. 정말 고참급 중에서는 베이고르에서부터 군터를 따랐던 이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그들의 경험은 동년배 군인들과 비교해도 특출한 편에 속했다.

게다가 단순히 경험만 많은 것이 아니다. 그 경험 중에는 온갖 혹독한 상황 속에서 쌓아 올린 것도 상당수 있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전혀 예상치 못한 위기 속에서도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대응할 수 있었다.

“제법 버티는군.”

가르비아가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는 제국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킬이 못마땅한 기색인 가르비아를 힐끔 곁눈질했다.

“버티는 것이 고작이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은 버텨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저쪽. 길을 뚫고 있는 게 보이지 않나?”

하킬의 시선이 가르비아를 따라 움직였다.

보였다. 고작해야 오백이나 될까 싶은 적 기병이 아군을 무슨 짚단 베듯 베어 넘기며 전진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만, 의미 없는 발악 아니겠습니까?”

“모르는 일이지.”

모르긴 뭘 모르나. 오백 가량의 적이 활개를 친다고 쳐봐야 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하킬은 그런 속내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르비아가 걱정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이마저도 철저하게 하려는 신중함에서 나온 것이라 이해하기로 했다. 어찌 됐든 그의 상관은 이전에도, 지금도 결과로 보여주지 않았나.

“음?”

또 뭔가 있는 걸까. 하킬은 가르비아가 본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지만, 그의 눈에는 별로 특별해 보이는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뭐가 있나?’

아예 잔뜩 놀란 얼굴로 눈을 부릅뜨는 가르비아를 보고 다시 한번 아래로 눈길을 던졌지만, 역시 이번에도 특별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 * *

지휘관으로서,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군을 추스르는 것이 맞았다. 말머리를 돌려서, 길을 틀어막은 장애물들을 어떻게든 지나서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이 함정을 빠져나가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이었다.

군터도 순간적으로 그리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살라스를 비롯한 수하들도 그것을 권했고.

하지만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함정에 빠졌다. 여기서 뒤늦게나마 병사들을 추스르고 퇴각한다 한들, 함정 속에서 발버둥을 치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성공적으로 함정에 빠뜨렸으니, 이제 곧 적의 공격이 이어질 터. 그것을 고스란히 견디면서 무사히(이미 함정에 빠진 것만으로도 무사히라는 말은 어폐가 있지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추격한다.”

“예?”

잘못 들었다는 듯, 살라스가 눈을 크게 떴다. 어떤 명령을 내리든, 늘 대꾸 없이 따랐던 살라스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지금 군터가 내린 명령이,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적들, 특히 방패병들을 추살한다.”

군터는 설명하지 않았다. 명령을 번복하지도 않았다. 그저 따를 것을 강요했고, 살라스를 비롯한 그의 수하들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따랐다. 그들은 군터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이 군터를 따른 것이 한두 해던가. 그들은 그들의 상관이 이런 상황에서 머리가 어떻게 되거나, 감정에 휩쓸릴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처럼, 군터가 아무 이유 없이 무모한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바시스의 방패병들을 떠올렸다.

‘평범한 놈들이 아니었다.’

방패를 이어붙여서 벽처럼 단단해지는 재주야 말할 것도 없다. 군터가 주목한 것은 그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그런 능력을 발휘했던 병사 하나하나였다.

하나같이 체격이 좋고, 고도로 훈련받은 티가 났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몸에 각인이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벽이 깨진 뒤에도 일반 병사들보다 강한 힘을 발휘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강체술 같은 것을 사용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일반 병사보다 월등한 신체 조건을 지녔음이 분명했다. 군터가 주목한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시체를 일으키기에 최상의 소재다.’

사령술로 일으킨 시체가 얼마만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느냐는 두 가지 조건에 달렸다. 하나는 시체에 깃드는 망령, 즉 영혼이 얼마나 강한가. 그리고 둘째는 소재가 될 육신이 얼마나 강한가. 이 두 번째 조건에는 시체가 품고 있는 사기도 포함된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신일수록 품고 있는 사기가 강하고, 사령술로 일으켰을 때 발휘할 수 있는 힘도 커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갓 죽은 시신을 일으킨다면, 그것도 생전에 강한 전투력을 보유했던 시신을 죽자마자 바로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령술의 소재로는 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군터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어차피 곧 적이 공격해온들, 전장 자체가 이렇듯 협소하기에 밀고 들어오는 데 한계가 있을 터. 시체를 이용해 길목을 틀어막은 채 그들을 상대한다면, 이 불리한 형세를 뒤집을 가능성이 생긴다.

‘일어나라.’

도망가던 적병들을 추살하고, 즉시 영혼감옥에 갇혀 있는 영혼들을 풀어놓았다. 그것들은 그의 뜻에 따라 막 죽은 병사들의 몸뚱이에 깃들었고, 곧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나는 시체들을 보고서야, 살라스나 할렌 등은 군터의 계획을 눈치챘다.

“살라스.”

“옛!”

“이곳은 내가 최대한 막아보겠다. 너는 즉시 돌아가 병사들을 수습해라. 내가 늦지 않게 돌아갈 테니, 그전까지 최대한 병력을 집결시켜.”

“알겠습니다.”

“너희들도 모두.”

“예?”

살라스에게만 하는 말인 줄 알았던지, 할렌과 아드리안 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들마저 다 가버리면 누가 곁을 지키냐는 듯.

“방해된다.”

군터는 수하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런 반응에 신경 쓰고 있을 겨를이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알겠습니다.”

수하들이 모두 움직이고, 군터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정확히는 살아있는 자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의 곁을 둘러싼 것은 숨 쉬지 않는, 죽은 자들뿐.

식어가는 몸뚱이들에 둘러싸였지만, 이상하게도 오히려 안심되는 느낌이었다. 살아있는 수하들이 곁에 있을 때는 그들이 죽거나, 낙마하지 않는지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지만 죽은 자들은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

시체들이 움직인다. 달려가는 움직임이 살아있는 사람 못지않게 힘 있고 자연스럽다. 얼핏 봐서는 시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다. 영혼들 때문일까? 아니면 뛰어난 몸뚱이 때문일까.

말끔한 복색의 적병들이 좁은 길목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다. 나무와 수풀 사이에서 화살이 날아든다. 여기서 끝을 보거나, 못해도 확실하게 승리를 거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가라.’

시체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적이 조금 전까지 아군이었던 이들을 향해 창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두려움 없는 시체들은 몸에 창칼이 박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저돌적으로 달려들었고, 곧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며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히히힝!

그 혼란의 틈바구니에, 군터가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 * *

“집결하라! 집결해!”

살라스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뭉쳐있는 이들보다 흩어져 있는 이들이 더 많았고,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살 비는 그들이 한데 뭉치는 것을 방해했다.

“하압!”

할렌은 살라스가 병사들을 집결시키는 사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적에 맞섰다. 산 비탈을 타고 내려온, 가볍게 무장한 적들은 마치 암살자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공격해왔다. 짧은 칼과 등에 진 활 등을 보면 이들이 병사인지 사냥꾼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으나, 그들은 철저하게 서로 협력하며 병사로서 싸웠다. 그 까다로운 움직임은 일전에 상대했던 요정들을 보는 듯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정말 요정들만큼 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에 준할 정도로 까다롭다는 것일 뿐.

‘이놈들이군.’

무슨 묘기를 하듯, 밀어낸 힘을 이용하여 뒤로 몸을 훌쩍 날리는 적을 보며 할렌은 이들이 일전에 폴츠의 원군을 대파했던 이들임을 확신했다. 이 독특한 전투 방식. 당시 받았던 보고의 내용과 일치했다.

‘그래. 그랬군.’

이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치밀하게 함정을 파 놓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그 의문이 풀렸다.

‘원군을 견제하던 병력을 모조리 빼낸 거다.’

어떻게 그렇게 과감할 수 있었을까. 만약 다시 원군이 왔다면 길을 훤히 열어주는 꼴이 되는 것인데, 어떻게.

‘뭐, 깔끔하게 당해버렸으니 할 말은 없다만.’

슬쩍 주변을 곁눈질해보니, 역시 수하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지친 것도 지친 것이지만, 조금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나무와 수풀 틈으로 들어가 버리는 통에 상대하기를 버거워하고 있었다.

사실 꼭 이겨 먹을 필요는 없다. 살라스가 병력을 수습할 때까지 시간만 벌면 된다.

하지만 왜일까. 조금 전 들었던 방해된다는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까닭은.

“흐읍!”

할렌은 망설임 없이, 그의 몸에 각인된 힘을 깨웠다.

모페이브가 경고하길, 이것은 그의 생명을 갉아먹는 힘이라 꼭 써야 할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그때인가?

모른다. 그러나 머리가 뜨겁고, 몸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후우.”

내뱉는 숨이 뜨겁다. 몸이 타들어가는 듯했으나 뜨겁거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조금 지쳐있던 몸에 힘이 넘쳐흘렀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리를 벌리고 들개처럼 흉흉하게 틈을 살피는 적병의 목을 꺾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험해보았다.

탁!

땅을 박차고.

슈웅!

창을 내질렀다.

상대는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돌진에 놀란 것일까,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에 호흡이 흐트러진 것일까.

채앵!

자그마한 칼과 창이 부딪쳤고, 상대의 몸이 흔들렸다. 할렌은 곧바로 거리를 좁히며 창을 회수할 생각도 않고 냅다 팔을 뻗었다.

콱!

활짝 벌린 손아귀에 가느다란 목이 잡혔다. 살기 어린 눈과 크게 떠진 눈이 마주치고, 우둑! 하는 굵직한 파열음이 터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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