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2화
군터는 일전에 보았던 그 방패병들이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았다. 그때 상대했던 것보다 수가 더 많았는데, 이쪽도 그때보다 수가 더 많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돌파하기가 영 쉽지 않아 보였다. 육중한 방패를 빈틈없이 세우고 있는 적병 뒤쪽에, 활을 든 병사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단번에 뚫지 못한다면 벌집이 되겠군.’
문제는 단번에 뚫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전에 저 방패의 벽과 부딪쳐본 군터로서는, 설령 뚫는다 해도 피할 수 없을 막대한 피해가 못마땅하기 그지없었다.
“주머니를 풀어라!”
단순한 돌격으로는 상대를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군터는 준비해뒀던 것을 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전에 아바시스의 방패병들을 상대하면서, 저런 적을 상대로는 자신이 선봉에서 이끈다고 해도 기병 돌격이 제대로 힘을 쓰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았는데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 리 없지 않은가. 파훼법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선에서 준비는 했다.
“던져!”
빠르게 달리던 기병들이 군터의 호령에 맞춰 안장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가죽 주머니였는데, 얼핏 봐서는 물주머니라고 생각하기 쉬울 법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방패의 벽에 부딪혀 터져 고약한 냄새가 퍼졌을 때, 아바시스 병사들의 얼굴은 다급하게 일그러졌다.
“기름이다!”
모페이브의 생각이었다. 사실 술법에는 술법으로 받아치는 것이 최선이지만, 안타깝게도 군터의 군대에 숙련된 전투 술사는 없었으므로 대안을 찾은 것이다. 모페이브는 화공을 이야기하면서도 통할지 안 통할지는 모른다고 했다. 다만 군터는 무작정 부딪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하여 그대로 준비하게 했다.
화르륵!
그리고 지금 보니, 그 준비가 헛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악!”
“버텨라! 물러서지 마!”
효과는 있었다. 불길이 일어났고, 적을 집어삼키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다소 아쉬웠다. 계속 번져나가나 싶었던 불길은 어느 수준 이상으로 커지지 않았고, 불길에 휩싸인 적병들은 놀랍게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한, 설령 가능하다 해도 수백 명이 넘는 병사들이 모두 그러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패벽의 힘인가? 아니면 다른 무장의 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예상 밖의 상황. 군터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이 순간에도 거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벽은 흔들렸을지언정 무너지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피해를 감수해야 할듯했다.
“돌파하라!”
군터는 언제나 그랬듯, 가장 먼저 불타는 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창을 내지르고, 창끝이 커다란 방패와 격돌한 순간. 일전에 느꼈던 것보다 더 큰 반발력에 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곧장 그의 뒤를 따라온 병사들이 함께 벽을 향해 부딪쳤고, 버티는 벽과 계속해서 부딪치는 기병들 사이에 힘 싸움이 벌어졌다.
* * *
“준비는?”
“만전이라고 합니다!”
묻는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격정적이었다. 지금도 뒤쪽에서는 한바탕 혈전이 벌어지고 있으니, 급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장 가르비아조차 평온함을 가장하고 있을 뿐, 속은 그를 흔들려는 조급함과 싸우느라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좋아. 퇴각을 명해라. 북을 쳐.”
“괜찮겠습니까? 지금도 간신히 버티는 중입니다. 북을 울렸다가는 전열이 흐트러져 한 번에 무너져버릴지도 모릅니다.”
“괜찮다. 놈들이 기세를 타서 밀고 들어온다면, 그거야말로 원하는 바니까.”
“으음.”
“이보게 애송이. 한 가지를 또 배우는군. 잘 기억해두게. 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승리는 없다. 설령 있다 해도 나는 알지 못해. 그러니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나.”
“소관이 어리석었습니다. 즉시 북을 울리도록 하겠습니다.”
깍듯이 고개를 숙인 로츠가 서둘러 달려가 명령을 전달했다. 곧 전고의 웅장한 울림이 좁은 산길을 가득 채웠고, 그 신호를 들은 후미의 병력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 * *
한창 전투에 몰입하고 있으면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놓치기 쉽다.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병사들을 지휘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장교들조차 제대로 이성을 유지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병사건 장교건, 그들 모두를 통솔해야 하는 지휘관 한 명만큼은 언제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매 순간 형태를 바꾸는 전장에서 그때그때 최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전투에 휩쓸리지 않도록 멀찍이 자리 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군대 전체를 책임지는 지휘관임에도 누구보다 앞장서 싸우는 군터는 별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와중에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놓치지는 않았다. 창을 휘두르면서도 그의 감각과 머리는 말끔하게 깨어 있었고, 전투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북소리가 들리고, 완강하게 버티던 적이 어느 순간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을 때. 군터는 느슨해진 벽을 더 강하게 파고들면서도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부자연스러움을 감지했다.
‘어째서?’
퇴각을 명할 수는 있다. 어차피 언제까지 여기서 버티며 싸울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마치 다 들으라는 듯이 북을 치면서 퇴각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히히힝!
“밀어붙여!”
4대 6 정도로, 아바시스군이 밀리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팽팽하게 유지되던 전황이 한순간에 기울어졌다. 물러나라는 신호를 받은 병사들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면서 전열이 붕괴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장군!”
투구를 온통 피로 물들인 살라스가 후속 명령을 요구했다. 계속 따라붙을 것인가, 아니면 잠시 숨을 돌리면서 상황을 살필 것인가.
“전고를 울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두 가지 중 하나겠지요. 선두가 길을 다 통과했거나, 아니면 함정을 파놨거나.”
그렇다. 함정이다. 물러나고 있는 적병들이, 들려오는 전고 소리가 마치 구덩이를 파놓고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듯했다. 마침 좁은 길은 좁고 바로 옆에 몸을 숨기기 좋은 산이 자리하고 있으니, 어떤 함정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함정을 파놓은 척 허세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자랑은 아니지만, 요 며칠 동안 숨 가쁘게 추격한 만큼 적은 오늘 아군이 따라붙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터.
결국은 확률의 문제고,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이 기로에서 군터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설령 함정이라고 해도 괜찮다.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든, 힘으로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추격한다.”
명령을 내리고, 군터는 이번에도 가장 앞에서 말을 달렸다. 이제는 완전히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적들에게 따라붙어 거침없이 창을 찌르고 휘둘렀다.
손쉬웠다. 저항다운 저항도 없었다.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그 시원시원함에 조금 취했던 것일까. 군터는 그와 병사들, 그러니까 그를 따르는 기병들과 보병들 사이의 거리가 조금 벌어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속도를 조절해라! 잠시 뒤로 물러나…….”
군터가 흥분해 있는 병사들에게 목소리를 높이던 찰나.
콰르릉!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군터의 고개가 휙!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는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굴러 내려오는 큼직한 바위들을 발견하고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 * *
“여기서 꼼짝없이 몸이나 썩히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나설 때가 오기는 오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 고생을 하면서 왜 이런 쓸데없는 고생을 해야 하나 불만이었는데, 정말 이렇게 되는군요. 가르비아 장군의 혜안이 놀라울 뿐입니다.”
사내, 하킬이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혜안?”
“혜안이 아닙니까? 이렇게 될 줄 미리 내다보시고 이런 준비를 하게 하셨으니까요.”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예?”
하킬은 이제 막 ‘지점’에 닿고 있는 적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다본 게 아니야. 이렇게 되도록 만든 거지.”
“…그게 다릅니까? 같은 말 아닙니까?”
“다르지. 전혀 달라. 훨씬 더 대단한 일이고.”
의원이라는 것들에 대해 안 좋은 선입견을 갖고 있던 하킬이다. 장군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가르비아의 과거가 꽤 화려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의원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의심을 지우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는 제국의 원군이 올 것을 예측하고 매복을 성공시켰다. 그때부터 하킬은 가르비아에 대한 의심을 지웠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이해하기 힘든 명령을 내렸을 때도 부지런히 주어진 명령을 수행했다.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구나.’
부나방들은 알까? 그들을 매혹한 불길이 단번에 몸을 태워버릴 정도로 뜨겁다는 것을?
안다면 바뀔까? 아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불을 향해 뛰어드는 것은 부나방의 본능이니,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애먹인 적이 등을 보인 채 달아나고 있으면 누구라도 쫓아가고 싶겠지.’
안다고 해도 당할 수밖에 없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지금이다.”
준비해 둔 것들을 내보냈다.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병사들이 굵은 줄을 끊었고, 큼지막한 나무며 돌들이 준비해 둔 경로를 따라 굴러 내려갔다.
콰르릉!
이 순간을 위해 보름이 넘도록 고생했고, 그와 비슷한 시간 동안 벌레가 들끓는 산속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 모든 시간을 보상받는 이 한순간. 하킬은 산 전체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외침을 들었다.
“집결하라!”
준비해둔 것들이 넓은 범위로 쏟아지고 있음을 눈치챈 건가? 나쁘지 않다. 어차피 빠져나가기는 늦었으니, 병사들을 최대한 한곳에 집결시키는 편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 외침은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허리가 끊기는 것을 피할 수 없는데, 이제와서 그런 소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적장에게 목소리가 닿을 리는 없지만, 하킬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 * *
함정. 그것도 정말 제대로 준비한 함정. 단언컨대, 절대로 단 며칠 만에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했을지는 몰랐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했을까. 그리고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상황을 예견했을까.
‘말려든 건가.’
퍼뜩, 제대로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굴러떨어져 내려오는 바위며 나무들이 느릿하게 보이면서,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콰직!
굵은 통나무가 반으로 잘려나갔다. 전투가 벌어지던 내내 무표정하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