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1화
군터는 그의 친위병들과 함께 가장 먼저 강을 건넜다. 그가 뗏목에서 내렸을 때까지 적은 그들의 도강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강을 건너기 전, 적의 군영에서 대거 병력이 빠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으니까 말이다.
즉, 적은 이미 퇴각을 시작했다. 일부 병력이 남아 추격을 대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만약을 대비한 조치였을 뿐. 설마 이렇게 신속하게 따라붙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리라.
1차로 강을 건너는 병력은 5천. 아직 남아있는 적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하다.
잠시 후. 병력이 모두 강을 건너자 군터는 즉시 공격을 시작했다. 초병들의 위치는 진작 파악해두었기에 경사를 올라가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적이다!”
선두의 기병이 경사를 다 올랐을 즈음, 초병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호각을 불었으나 그때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아마도 이미 아군이 퇴각을 시작했음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 느슨해져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해이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그 방심이 그들의 죽음을 크게 앞당겼다.
군터는 강한 군대를 보유하기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야스메티가 만들어 둔 사업체들(광산이며 농장, 등등)에서 거두어들인 돈의 상당수가 그대로 군대에게 들어갔다. 특히 군터가 직접 살핀 부분은 병장기도 병장기지만, 기병의 군마였다. 베이고르에 있었을 때도 그랬지만, 판니른의 방위군단장이 되고 솔롬의 성주가 된 이후로는 정말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것 따위는 없었다. 말 그대로 최고만을 추구했다. 그에 따라 군터 휘하의 기병은, 특히 항시 그와 함께 움직이는 친위기병은 하나같이 명마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군마들로 무장했다.
너무 과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재무를 보는 관리들은 굳이 병사 한 명 한 명의 말을 최상급으로 맞춰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소 급이 낮은 말을 사면 남는 돈으로 더 많은 병사들의 무장을 보다 충실하게 맞춰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돈 들어가는 곳이야 차고 넘치니, 보다 효율적으로 돈을 쓸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군터는 그 모든 우려, 혹은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그때 그렇게 고집을 피운 보람이 나타났다.
히히힝!
힘 좋은 말들이 경사진 땅을 평지처럼 달려 올라갔다. 그들이 올라오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활시위를 당기려던 적군은, 채 세 번째 시위를 당기기도 전에 그들 앞에 나타난 군터와 병사들을 보며 몸이 굳었다.
“거창!”
그나마 장교들이 다급하게 창을 들 것을 외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군터와 그의 뒤를 바짝 따르던 몇몇 기병이 곧바로 들이닥쳤고, 진형을 갖추려던 아바시스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당황하지 마라! 몇 놈 되지 않아! 나를 따르라!”
어디에나 유독 뛰어난 자는 있기 마련이고, 그건 전장의 한복판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당황하여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도 홀로 상황을 파악하고, 결단을 내린 후에 움직인다. 그런 자는 인재라 할 수 있으며,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지 불운하지만 않다면 결국 두각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불운하지만 않다면 말이다.
푸욱!
거무튀튀한 창이 검을 빼 들고 달려들던 그 젊은 장교의 목을 찔렀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그저 눈을 부릅뜨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던 그가 덜컥 멈춰서 몸을 벌벌 떨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군터는 그런 얼굴을 보는 것이 익숙했다. 지겨울 정도로.
이 자는 이곳에서 죽지 않았다면 이름을 남겼을까? 같은 의문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가정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죽어 나가는 목숨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 중에는 어쩌면, 그곳에서 죽지 않았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인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게걸스러운 전장의 먹이가 되고 나면, 그들의 과거든 미래든 모두 의미 없어진다.
서걱!
창 세 개가 창끝부터 창대 중간까지, 거짓말처럼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병사 셋의 눈이 커지며, 그들이 한 발자국 물러섬과 동시에 그들의 목이 나란히 잘려 떠올랐다.
“으윽!”
네 명을 베었다. 적다면 적은 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적의 기세가 꺾였다. 이 또한 익숙한 일이었다. 군터는 어떻게 해야 적의 기세를 꺾어놓을 수 있는지를 머리로도, 몸으로도 잘 알았다.
와아아―!
적극적으로 맞서도 시원찮을 판에, 잠시나마 주춤거렸으니 그로 인해 생긴 잠깐의 시간은 제국군에게 더없이 유용했다. 그들은 전열이 흐트러진 적군을 가차 없이 휩쓸었다.
‘쉽군.’
빈틈을 찔렀다지만, 그걸 고려해도 너무 쉬웠다. 일전에 보았던 독특한 방패병들이라든지, 눈여겨 볼만한 전력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본군은 다 퇴각하고 후미만 남았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장군. 어쩌면 이 녀석들은 버리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라스의 ‘버리는 말’이라는 한 마디가 군터의 머릿속을 환하게 밝혔다. 버리는 말. 그래. 바로 그거다. 어쩌면 적장은 이런 상황을 예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렇게 꼬리도 남기지 않고 신속하게 내뺐겠지.
그것을 깨달은 순간, 상쾌해지려던 기분이 도로 가라앉았다.
“추격한다.”
“옛!”
휑하게 빈 진지에 불을 놓은 후, 5천의 선발대가 다시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장군. 이제 후미를 불러들이시지요.”
“그래. 그러도록.”
로츠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르비아는 그게 의미 없는 일이 될 확률이 크다고, 그리고 어쩌면 애꿎은 전령의 목숨을 잃게 하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때 그 눈은 마치…….’
가르비아는 제국군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첫날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적장과 눈을 마주쳤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착각이어야 말이 되지만 그 순간 그 기분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마치 몸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예기, 불길함.
‘봤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눈치챘을 수도 있다.
그래서였다. 본래라면 적의 추격을 저지하거나 늦추기 위해서 후미의 병력을 더 늘려야 했지만, 가르비아는 과감하게 병력 대다수를 한 번에 철수시켰다. 말로는 그럴듯한 이유를 댔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적이 눈치채는 것이 예상보다 빠르다면 방패막이로, 그러니까 버리는 패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병사들이고 장교들이고, 그런 그의 속내를 알았다면 비정하다고 욕을 했을 테지만 가르비아는 그런 결정을 내림에 있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전장에서 피가 흐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고,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면 거기에 어떤 희생이 따르든 그것을 택할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도 희생된 병사들을 떠올리기보다는 앞으로의 일을 고심했다.
적이 아군의 퇴각을 눈치채지 못하고 시간만 죽여주는 것이 최고지만, 그런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우려하는 상황에 대해서만 고민한다.
‘이미 따라붙기 시작했을 가능성도 있지.’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은 후미가 이미 전멸하고, 적이 다시 추격을 재개하는 경우. 사실 가능성이 있지, 정도가 아니라 그럴 것이라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따라붙을 테냐.’
늘 그랬듯, 이번에도 천천히 시간과 거리를 계산한다. 하지만 거의 결론을 내릴 즈음이 되었을 때 그 잊을 수 없는 사나운 눈빛이 떠오르면서, 계산을 헝클어뜨렸다. 얼마 되지 않는 기마를 이끌고 본진으로 들이쳤던 그 저돌적인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긴장되는군.’
사실 상황은 강을 끼고 대치하고 있을 때가 더 안 좋았다. 지금은 일단 어찌 됐든, 반쯤은 성공적으로 퇴각하긴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반의 성공 뒤에 따르는 나머지 반이 성공일지, 아니면 처절한 실패일지는 지금 이 순간부터 결정된다. 목이 바짝 말랐다.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너.”
“예!”
“가서 하킬에게 전해라.”
전령에게 몇 가지를 명령한 가르비아는 서서히 밝아지고 있는 하늘을 보았다. 아마 다시 어두워지기 전에는 결착이 나리라.
* * *
군터는 병사들이 간신히 뒤처지지 않는 선에서 빠르게 추격을 이어갔다. 흔적을 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적은 흔적을 지울 생각도 없었는지, 큼지막한 바퀴 자국까지 고스란히 남겨두고 이동했다.
중간에 적의 전령을 생포하기도 했다. 그들은 후미의 아군에게 퇴각명령을 전하기 위해 움직였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군터는 적장의 얄팍한 눈속임에 코웃음을 쳤다.
‘이용당한 줄도 모르고 죽었겠군.’
알아낼만한 정보는 다 알아낸 후에 사로잡은 전령의 목을 베면서, 군터는 후미에 남겨졌던 적병들이 가르비아라는 이름의 적장에게서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것이다.
하지만 뭐, 생각해보면 새삼스럽게 그런 부분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우습다. 어차피 전장에 나선 병사들은 지휘관의 뜻대로 움직이는 말에 불과하고, 전체적인 판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서 말 정도는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 대국(大局)을 이끌어가는 지휘관이다. 멀리 갈 것 없이 군터 자신만 해도,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사를 희생시켰던가.
이것이 전쟁이고, 이것이 전투다. 버림받는 자들은 분노할지도 모르지만, 전장에 들어선 이상 그런 것은 좋든 싫든 감수할 수밖에 없다.
“정보의 신빙성은 둘째 치고, 꽤 그럴듯한 경로입니다.”
사로잡은 전령으로부터 적군이 어느 경로로 퇴각할 것인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물론 일개 전령이 군 전체의 이동 경로를 알고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의문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살라스는 얻어낸 정보가 그럴듯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같은 생각입니다.”
거기에 토어릭이 말을 보탰다.
“최단 경로일뿐더러,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길목이 좁아져 추격이 따라붙는다고 해도 상대하기가 용이합니다.”
토어릭이 가리킨 것은 산 모양 그림에 반쯤 겹쳐져 있는 자그마한 길이었다. 행상들이 오가는 길이라는데, 몇만이나 되는 군대가 이동하기에는 조금 좁아 보였다. 하지만 토어릭이 말했듯, 그렇게 길목이 좁기에 추격군이 따라붙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우회해서 놈들을 앞에서 막아서는 것은 어떤가?”
“시간이 부족합니다. 또한, 이미 병사들이 지치고 있어 추격 속도를 늦춰야 할 판입니다.”
할렌의 말에 군터는 자신의 조급함, 내지는 무심함을 다시금 인지했다. 언젠가부터 그는 그의 병사들에게 너무 높은 기준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것을 그 자신도 알지만, 그럼에도 종종 이렇게 실수를 하곤 했다.
“그렇다면, 이대로 계속 쫓는 것뿐이군.”
“예. 허나 따라잡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것이다.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군대의 규모가 큰 만큼 이동속도 역시 느릴 수밖에 없을 테니.
살라스의 말처럼,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따라잡는다고 해도 제대로 한 판 붙으려면 뒤따라오고 있는 본대와 합류해야겠지만, 그 역시 시간문제일 뿐.
* * *
“장군! 후방에 적이!”
뒤쪽에서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 가르비아는 고개를 돌렸다. 아주 멀리, 먼지구름이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식하게 빠르군.”
최대한 양보해서 가정한 것이 내일 정오 즈음이었다. 그런데 저 무식한 놈들은 거기서 무려 거의 하루에 가까운 시간을 단축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속도가 가능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이미 본대가 진입하기 시작했으니 벽을 세우고 시간을 끌어. 2, 4, 6 궁병대를 보내라. 활통의 화살을 다 써도 좋아. 아낌없이 쏟아부으라고 해라.”
“옛!”
빠르게 명령을 내리는 와중에도 함성은 더 커져만 갔다. 가르비아는 점점 가까워지는 먼지구름을 보며 조용히 입매를 비틀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