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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99화 (699/1,064)

699화

며칠 동안의 소란으로 적이 바짝 긴장했을 테니, 술사들을 대거 동원하여 경계를 서게 하는 것도 최소 사나흘 정도는 유지될 듯했다.

군터는 적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동안 푹 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수하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부산을 떠는 적군의 모습은 강 건너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고, 살라스를 비롯한 무관들은 적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소란이 이는 것인지 몰라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장군. 허면…….”

군터가 휘하 무관들을 불러놓고 며칠 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처음에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당황하여 입을 벌렸다. 그나마 살라스가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표정을 관리했는데, 그럼에도 당황한 기색을 다 지우지는 못했다.

“그 시체들은 지금 강속에 있는 것입니까?”

“그래.”

“장군께서 사령술의 조예가 상당하신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 정도로 대단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홀로 백 구가 넘는 시체를 조종하는 사령술사?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사령술사가 일으키는 시체들은 전력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지는 편이었다. 기껏해야 화살받이 정도. 그것도 한 사람이 일으킬 수 있는 시체는 그 수가 많지 않으니, 사령술사가 전장에서 제대로 무언가를 해보려면 못해도 열 명 이상이 한데 모여야 한다.

그러나 군터는 열 명의 사령술사가 모여도 힘든 일을 홀로 해냈다. 사령술에 대해 잘 모르는 그들도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 순간, 이전까지 군터가 사령술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내심 찝찝하게 여기던 이들조차도 순수하게 감탄했다. 사령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 생사를 다퉈야 하는 적을 상대로 도움이 된다면 사령술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그들은 반길 터였다.

“술사들을 대거 투입해 경계를 강화했다. 저렇게 나오는 한 다시 시체들을 움직이기는 힘들어.”

“술사들이 병사들처럼 계속 버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지금 당장은 발등에 불똥이 떨어져서 저렇게 하고 있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술사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그들만으로 계속 강 전체를 감시할 수는 없을 터.

“놈들은 점점 지쳐갈 것이다. 물러나든가, 덫을 파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겠지.”

“덫이라 하심은?”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공격이 언제까지 먹힐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시체는 고작해야 이백 구 정도. 수가 얼마 되지 않아 이제껏 적의 눈길을 피해 조금씩 활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술사들을 동원한 것만 봐도 할 수 있듯이, 이제부터는 적도 눈에 불을 켤 터였다.

“그렇다면…….”

“괜찮다. 시체들을 잃어도 상관없으니.”

보통의 시체였다면 한 번 쓰러지면 그걸로 끝이다. 태워버리든, 사지를 잘라버리든, 일단 무력화시키면 사령술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군터는 달랐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썩어가는 몸뚱이가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영혼이다. 그 영혼만 잃지 않는다면 시체 따위야 얼마든지 다시 일으킬 수 있다. 방금 죽은 시체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적은 그것을 모른다. 그것이 바로 군터가 지금처럼 여유로울 수 있는 이유였다.

“그렇다면…적당히 위협을 해줘야겠군요.”

“어떻게 말이냐.”

“도강할 것처럼 병사들을 움직이는 겁니다. 놈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지요.”

“좋군.”

살라스의 제안에 군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 * *

둥! 둥! 둥!

전장에서 북소리가 울리는 것이야 대수로울 것 없는, 아주 흔한 일이다. 전고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함께 흐른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전투의 시작과 끝을 알릴 때 모두 북을 찢어져라 두드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웅장한 울림은 가슴에 불을 지핀다. 인간의 마음을 건드리는, 일종의 술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르비아도 전고의 울림을 좋아했다. 전고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지금 있는 곳이 전장의 한복판이라는 자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놈들이…….”

하지만 벌써 사흘째, 아무런 의미도 없이 울리는 북소리에서 그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아무런 의미가 없지는 않지.’

너무 노골적이라서 의도를 모를 수가 없다. 이쪽의 신경을 박박 긁어놓겠다는 것 아니겠나.

‘하! 우습구만.’

생각해보면 참 기묘한 싸움이다. 공격해온 쪽은 수세로 일관하고, 지켜야 하는 쪽은 공격하지 못해 안달이 났다. 물론 이런 싸움을 택한 것은 가르비아 자신이었지만, 꼴이 우습게 됐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의 새벽잠을 방해하려는 수작이기도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저것은 도발이다. 쳐들어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이쪽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가르비아 본인이야 저런 유치한 도발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병사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은 단순하며, 분위기라는 것에 쉽게 휩쓸린다. 그들이 한 번 동요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통솔력이 뛰어난 장수라도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다.

‘빠듯하지만, 계속 버틴다면 닷새 정도는 더 끌 수 있겠지.’

처음 목적은 시간을 버는 것이었으니, 닷새를 더 벌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아무런 부담 없이 닷새를 더 끌 수 있다면 가르비아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닷새를 벌기 위해 져야 하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데 있다.

억지로 버티는 닷새 동안 적의 도발은 계속될 것이다. 어쩌면 강으로 사라진 시체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후에 군을 물리려 했을 때, 과연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오늘도 여전한가?”

“예. 뭐.”

가르비아의 물음에 지금 막 막사로 들어온 로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 찝찝한 얼굴이었다. 화를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장군. 차라리…….”

“한번 붙자고?”

망설이던 로츠가 대뜸 언성을 높이자 가르비아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예? 아, 예.”

그러자 로츠는 살짝 당황하여 주춤했는데, 가르비아는 그런 그를 보며 혀를 찼다.

“단순하기는. 병사들이야 감정적이게 될 수 있지만, 그들을 지휘하는 자네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모르나? 지휘관이라는 자리는 목 아래에 붙은 것은 다 떼어놔야 하는 것이야. 가슴이든, 아랫도리든 말이네.”

로츠가 얼굴을 붉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어렵군요. 정말 어려워요.”

“무엇이든 경험해보지 않으면 익숙해질 수 없는 법. 가장 쉬운 것은 한 번 단단히 쓴맛을 보는 것인데, 그것은 도와주기 어렵겠군. 내 휘하가 아닐 때는 마음껏 경험해도 좋지만 말이야.”

“그 무슨 말씀을…….”

가볍게 두어 마디 주고받으니 로츠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는 명색이 장교라는 자가 감정에 휩싸였던 것이 부끄러운 듯, 장난스럽게 웃는 가르비아의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퇴각해야겠다.”

“예. 퇴각을…옛? 퇴각?”

“생각해보면 말이야. 우리가 이룰 것은 다 이루지 않았나? 적의 원병을 격퇴했고, 시간도 제법 끌었지. 이 정도면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고 봐도 되지 않겠는가?”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만…….”

가르비아가 입가의 웃음을 지웠다.

“착각해서는 안 돼. 내가 금방 말하지 않았나. 전장에 지휘관으로 나선 이상, 목 아래에 붙은 것들은 다 떼어야 한다고. 물론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뭐, 사실 그게 아예 틀린 것은 아니기도 하지만 말이야.”

로츠는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감정적인 부분은 최대한 배제하고 보니 가르비아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처음 세웠던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판니른의 병력을 묶어두었고, 폴츠의 원군은 크게 격퇴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전과였다. 물론 사령술로 추측되는, 적의 골치 아픈 술수 때문에 시달리기는 했으나 병력 손해는 천 명 안쪽. 그게 적다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게 크게 볼 필요도 없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며칠 동안 계속 시달린 것에 비해서는 그렇다는 뜻이다.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이군.”

“예.”

“어떤가? 자네의 생각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나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물러나야 한다면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는다면 자칫 발을 뺄 때 피를 봐야 할지도 모른다.

“좋아. 자네가 이해했으니 다른 이들도 이해할 수 있겠군. 모두 부르도록.”

“지금 바로 말입니까?”

“이미 결정을 내렸는데 질질 끌 이유가 없지 않나.”

가르비아의 단호한 말에 로츠는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도 않은 엉덩이를 다시 들고 일어났다.

* * *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으니, 하는 일이라고는 강을 따라 걸으며 적진을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강 건너를 쳐다보는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으나, 며칠 동안 잠잠하다 못해 지루한 시간이 이어지니 이제는 눈에 들어갔던 힘도 다 풀렸다.

“음?”

하지만 살라스는 무심하게 강 건너편을 지켜보던 중,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좁혔다. 잠시 후, 그는 군터의 막사로 찾아가 그가 눈여겨본 것을 이야기했다.

“적진이 부산스럽습니다.”

“어떤 점이?”

“초병의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헌데 깃발의 수는 그대로이고…….”

“퇴각준비?”

“소관의 생각에는…예. 그런 것 같습니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다. 정말 퇴각준비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이쪽도 대처해야 하지 않겠나.

“함정일 가능성은?”

“있습니다.”

“병사들을 준비시켜라.”

“예.”

잠시 후. 추리고 추린 5천 병력이 강 앞에 집결했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할 법도 한데, 그들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요란했던 요 며칠은 아바시스군만이 아니라 제국군에게도 답답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전투 첫날 군터가 소수의 기병을 거느리고 적진을 휘젓고 온 것을 기억했고, 연이은 도발에도 적이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일단 싸우기만 하면 무조건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싸우기만 하면 승리한다. 그런데 상대가 싸워주지를 않으니 일개 병사일지라도 몸이 달을 수밖에 없었다.

“뗏목은 준비되었습니다.”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 말한 군터는 영혼 감옥에 갇힌 영혼들을 풀어놓았다. 며칠 휴식을 취한 덕에 두통은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스으으―

형체 없는 영혼들이 강으로 스며 들어갔다. 강바닥에 가라앉은 시체들은 이제 뼈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영혼들이 깃드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살점은 뜯겨 나갔을지언정, 시체가 품은 사기는 조금 흐려졌어도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일어난 시체들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천천히, 강 건너편의 아바시스군 진지를 향해 나아갔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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