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8화
네라드 익세이온, 흔히 네라드라고 불리며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는 그는 심각해진 군영의 분위기를 느끼며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의회의 명으로 나온 감찰관이라고는 해도, 총대장인 가르비아에게서 인정을 받았다고는 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외인이었다. 군인도 아닌 그는 원래부터 은연중에 배척 아닌 배척을 받고 있었는데, 그나마 그의 신분과 가르비아가 그럭저럭 가깝게 대하는 모습 덕분에 아무도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간간이 그와 식사자리를 같이하고, 종종 농담도 던져주던 가르비아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종일 굳은 표정이었다. 장교들은 물론, 군졸들까지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들은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사고가 터졌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전장의 상황이라는 것은 이리도 시시각각 바뀌는 것인가.’
네라드는 고요한 그의 막사에서 깃펜을 들었다. 가르비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그의 주 업무였지만, 그는 매일 밤 책을 쓰는 것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감찰관 임무를 맡은 것도 이 역사적인… 아니, 역사적일 것으로 짐작되는 전쟁을 보다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였다.
어렸을 적에는 기록에 그렇게 목을 매는 부친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친에게 그런 이상한 열망을 심어준 조부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어렸을 적의 네라드는 글씨를 쓰는 것보다 더 근사한 일을 하고 싶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기록하는 자가 없으면 이름이 남을 자 역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전날 가르비아에게 반발하듯 했던 말은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그가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이요, 마음가짐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잇고, 현재와 미래를 잇는다. 이보다 더 근사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설령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후세의 누군가는 그가 남긴 기록을 읽게 될 것이고, 그를 통해 과거를, 이 시대를 보게 될 테니.
‘그나저나 궁금하군. 정말 전장의 악령들이 출몰한 것일까.’
병사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소문이었다. 장교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이렇게 저렇게 수군거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식의, 악령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 보통은 코웃음부터 칠 테지만 네라드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그는 세상의 이런저런 지식이나 이야기들을 듣는 것을 좋아했고, 그와 같은 취미가 있었던 부친과 조부가 남긴 기록들도 빠짐없이 몇 번이나 읽었었다. 그렇기에 그는 세상에서 흔히 헛소문 내지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치부되는 것 중에 상당수가 사실이며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장의 악령 같은 것들 말이다.
‘카라누르의 정복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군주 아간투스베록이 소국 말리샤의 군대를 물리쳤다. 그는 사로잡은 포로 7천 명을 그 자리에서 생매장했고, 그 후 수십 년간 그 땅에서 악령들이 출몰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사족도 있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느니, 시독(屍毒)이 땅을 오염시켜버린 탓에 인근 땅에 살던 백성들이 병에 시달렸느니 하는…….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전장의 참상을 과장하여 표현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라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기록은 그의 조부가 남긴 것이며, 네라드는 조부의 기록에 조금의 거짓도 없으리라 굳게 믿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글에 거짓과 사감은 조금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조부의 가르침이었고, 그로부터 배운 부친의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뭔가 석연찮은데.’
정확히 뭐가 석연찮냐고 묻는다면 답하기가 궁색해진다. 그러나 군사에 대해 잘 모르는 그가 보기에도, 이 상황은 적의 계책 내지는 암수가 작용한 것 같았다. 문제는 그게 뭐냐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사령술인 것 같다.”
다음날. 여느 때처럼 가르비아의 막사를 찾은 네라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가르비아가 로츠를 비롯한 몇몇 휘하 장교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령술… 말입니까?”
“그래. 군터 크렘보르가 사령술에 능하다더군. 정보가 늦었어.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든 대처를 했을 것인데.”
“하지만 사령술로 뭘 어떻게 했다는 말씀이신지. 설마 망령을 부려서 저주라도 건 것일까요?”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사령술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뭐라 말하기가 힘들군. 하지만 자네들도 병사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소문을 들었겠지.”
“악령이니 뭐니 하는 것 말입니까? 병사들이야 조금만 심란하다 싶으면 온갖 헛소리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니…….”
“직접 봤다는 병사들이 있어. 물론 주장일 뿐이지만, 한둘이 아니니 그냥 가벼이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야.”
여럿이 비슷한 말을 하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는 없지만, 그들이 말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영 신통찮은 것도 사실이었다. 사람 같아 보이는 거뭇한 형체가 떼를 지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느니(이 부분에서 가르비아는 왜 가까이 가 확인을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강기슭을 맴돌던 악령들이 강으로 들어가 사라졌다느니 하는… 쉽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런 말을 하는 병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길 수도 없었다.
‘사령술을 쓴단 말이지.’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어서 고민만 거듭하던 차에 적장 군터 크렘보르가 사령술을 사용한다는 정보를 접했다. 그리고 그제야 어찌 된 영문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이렇게 군영의 분위기가 가라앉기 전에 대처할 수 있었을 터. 상대에 대한 정보가 미흡했던 부분은 명백한 실수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미 한번 쓴맛을 봤으면서도… 너무 안일했다. 감이 무뎌진 건가.’
일전에 그에게 쓴맛을 보여줬던 적장이 지금의 적장, 군터 크렘보르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독하면서도 대담하게 움직였던 적장이 성주가 아니라 성주 휘하의 무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가르비아도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하를 보면 그 상관이 어떤 자일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만만치 않은 상대일 거라 생각했고, 가볍게 여기는 마음은 없었다. 그랬는데…….
‘사령술사라니. 카라누르에서 사령술은 금기로 지정되지 않았었나?’
분명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황제에게 크게 밉보였다던가? 뭐,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황제의 주도하에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고, 굵직한 학파들은 모조리 명맥이 끊겼다고 들었다. 그나마 어찌어찌 살아남은 자들도 죄다 음지로 숨어들어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졌다고.
‘전 세대의 일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건가? 뭐, 사령술이 실용적이긴 하지.’
사령술은 전투에서 활용되는 그 어떤 술법보다도 실용성이 높은 술법이었다. 위력 자체는 더 뛰어난 다른 분야의 술법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령술의 강점은 그 힘이 언제 어떻게 쓰일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는 사령술이 다른 술법들에 비해서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음에 기인했다.
사령술은 죽음을 다루는 분야인 만큼, 카라누르 만큼은 아니더라도 꺼려하는 풍토가 강했다. 그것은 술법의 힘을 다양한 분야에 적극 활용하는 아바시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카라누르처럼 아예 명맥이 끊기거나, 대놓고 금기로 지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양지에서 떳떳하게 활동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사령술사들이나 그들의 지식은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은 것이 더 많았는데, 이 때문에 가르비아도 사령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듣기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의원들이나 혹은 지위가 제법 되는 자들이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자 사령술사들을 가까이에 두고 연구비를 지원한다던데, 가르비아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는 수명이 긴 나가였기에 당장 장수(長壽)가 급하지 않았던 탓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몇 명 정도 곁에 둘 것을 그랬나.’
의문은 풀었지만 속은 더 답답해졌다. 그러다 보니 시답잖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르비아는 슬쩍 수하 무관들을 살폈지만, 그들의 표정만 봐도 별다른 뾰족한 수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강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그래. 시체들이라면 가능하지.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지 않은가.’
사령술에 대해 잘 모르는 가르비아였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강으로 들어간 시체들을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강에서 기어 나왔을 때 손을 써야 할 텐데, 강을 건너오는 적이야 초병을 둬서 감시하게 하면 되지만 강물 속에서 튀어나오는 시체들을 사전에 알아차리려면 대체 병력을 얼마나 쏟아부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진영을 물리면 가능은 하지. 하지만 그러면 적이 본격적으로 강을 건너려 할 때 빠르게 반응할 수 없어진다.’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 봤으나 결국 떠오르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하는 수 없지.’
결정을 내린 가르비아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수하 무관들을 향해 명했다.
* * *
“…….”
군터는 적의 동태를 살필 겸, 그리고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힐 겸 말을 타고 강기슭으로 나갔다.
강 가까이에 가자 희미해졌던 연결이 다시 뚜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강바닥에 가라앉아있는 시체들, 그 안에 깃든 영혼들. 그들을 구속한 사슬은 군터가 지닌 영혼 감옥과 감응했다.
‘무리였나.’
본래 시체를 조종하는 것은 제약이 많았다. 한 번에 조종할 수 있는 시체의 양도 한정적이고, 무엇보다 시야가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조종 가능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적을 공격하게 하려고 해도 그 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공격 명령을 내릴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사령술로 일으킨 시체들은 술자의 근처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터가 스스로 무리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는 것은 그런 일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맹금 수준, 혹은 그 이상이었으니 강 건너에서 적을 보고 공격 명령을 내리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술력의 소모였다. 거리가 늘어나는 만큼, 시체들을 조종하는 데 드는 기운의 양도 늘어났다. 더군다나, 그가 조종하는 시체의 수는 백 구를 넘어 이백 구에 가까웠다. 그나마 시체에 깃든 것이 영혼 감옥에 속한 영혼들이라 부담이 덜했기에 망정이지, 일반 원혼을 썼더라면 진작 한계에 다다랐을 것이다.
‘더는 안 되겠군.’
요 며칠, 계속 시체들을 부린 덕에 머리가 반으로 깨질 것만 같았다. 군터는 강바닥 속에서 잠자고 있는 영혼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물속에 가라앉은 시체들은 하루 이틀 정도 그냥 놔둬도 괜찮을 것이다. 다리에 돌을 묶어두었으니 떠오를 일도 없을 테고.
‘그래. 알아차렸는가.’
말머리를 돌리기 전. 군터는 일반 병사와는 조금 달라 보이는 자들이 강 가까이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차림새나 은연중 풍기는 기운으로 볼 때 술사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알아차린 것인지는 몰라도, 요 며칠 밤의 습격에 술법적인 힘이 작용했다는 것까지는 파악한 듯했다.
‘그래봐야 임시방편일 뿐.’
사령술로 부리는 시체들은 특유의 기운을 뿌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술사들을 강 가까이에 배치한다면 시체들이 움직이기 전에 알아차릴 수 있을 터. 하지만 언제까지 술사들을 초병처럼 부릴 수는 없을 테니, 결국 저것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