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7화
“장군의 혜안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부해봤자 줄 것은 없다.”
불퉁하게 대꾸했으나, 가르비아의 표정은 가벼웠다. 입꼬리가 연신 씰룩거리는 것이, 누가 봐도 웃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의 원군이 그쪽에서 오리라는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몰랐다. 가능성을 짐작했을 뿐이지.”
“하지만…….”
“가능성이었을 뿐이지만, 그 가능성이 제법 컸지. 우리가 노골적으로 시간을 끌려고 하면 당연히 적은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테고, 빠르게 결판을 내려 할 테니 가까운 곳의 원군을 청하지 않겠느냐?”
“아아. 그래서 남쪽에…….”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후방에서 원군을 끌어온다면 손을 쓸 도리가 없지. 아무튼, 준비한 것이 잘 맞아떨어졌다. 지금쯤 그 군터라는 녀석도 속이 끓고 있겠지.”
* * *
“송구합니다. 장군. 제가 괜한 말을 한 탓에…….”
“고개 들어라. 네 잘못이 아니다.”
군터의 말에도 살라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분기를 최대한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 고개 숙인 모습에서부터 드러났다. 자신의 건의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냥 위로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군터는 살라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잘못이 있다면 부주의하게 군을 통솔한 폴츠의 지휘관에게 잘못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신중했더라면 매복을 예상하지는 못했더라도, 지금처럼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길을 재촉하다가 크게 피를 보는 일은 없었을 터.
뭐, 원군을 요청한 입장에 그들의 부주의함을 타박하지는 못하겠지만 괜히 살라스처럼 내 탓입네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군터의 생각이었다.
“병력을 빼돌리는 낌새는 없었던 것 같은데.”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일부 병력을 매복시켜 놓은 것 같습니다.”
“교활한 놈이로군.”
참으려고 했는데, 결국 실소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수하들을 무시하고, 군터는 생각에 잠겼다.
‘어찌 할까.’
원군을 불러서 적의 시선을 끈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크게 피를 본 폴츠에서 다시 원군을 보내줄지도 의문이었고, 또 그들이 부랴부랴 어떻게든 다시 원군을 보내준다 해도…이제는 솔직히 별로 기대되지 않았다. 사실 기대는커녕, 또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후방에서 끌어오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그들에게도 별로 기대가 되지 않았다. 판니른의 방위군을 이끌고 있는 만큼, 판니른의 병력 상황에 대해서는 대략 파악하고 있는 군터였다. 후방에서 끌어오는 병력이 귀족 가문들이 숨겨둔 사병이 아닌 이상, 전장에 투입한다면 기껏해야 고기 방패 정도다.
저 강을 시체로 메워서 건너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지만, 그렇게 해서 적을 몰아낸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강. 강이라.’
군터는 답이 안 나오는 회의를 파하고 홀로 막사를 나섰다. 말을 몰고 강기슭까지 나가니 강 건너 적의 진영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훤히 보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건만, 사이에 낀 강이라는 놈 때문에 이렇게 답답해지다니. 마음 같아서는 저 강물을 다 말려버리고 싶었다. 또한, 적의 침공을 알아차리자마자 강을 건너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한들 어쩔 것인가.
‘바크렌이 그리워지는군.’
정확히는 그가 있었던 바크렌 북부가 그리웠다. 그곳의 혹독한 추위는 종종 잘 흐르던 강물까지 하루아침에 꽁꽁 얼려버리고는 했으니, 할 수만 있다면 그 추위를 잠시 빌려오고 싶었다. 물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만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답답하고 짜증도 났지만, 군터는 애써 차분하게 궁리를 거듭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문제는 강이었다. 강을 건널 방법만 있다면, 그것만 찾아낸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적과 일전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라는 것이…….
‘음?’
어둠에 물들어 점점 거뭇하게 변해가는 강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중.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얼토당토않은 망상일 수도 있겠으나, 군터는 그 ‘혹시’에 마음이 기울었다. 가능할 것인가는 둘째 치고, 호기심과 흥미를 느꼈다. 둘 다 전장에서 품을 만한 감정은 아니었으나, 군터는 눈을 빛내며 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그를 태운 말이 가볍게 투레질하며 머리를 돌렸다.
* * *
“잠잠하군.”
“뭐,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겠지요.”
로츠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가르비아는 혹시 그의 부관이 적을 가벼이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살짝 흘겨보았지만, 말과는 달리 적당히 굳어져 있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다시 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이 어찌 나올 것 같나?”
“글쎄요. 다시 원군을 부르지 않겠습니까?”
“또?”
“달리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무리하게 강을 건널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좋아. 그렇다고 치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음…….”
로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적이 다시 원군을 부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도 저 멀리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을, 일단은 동맹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조금 더 버텨주는 것이 좋겠으나…그것은 가르비아가 원하는 답이 아닐 터였다. 아바시스를 위한 답도 아닐 테고.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물러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물러난다?”
“본래 우리의 목표는 시간을 버는 것이었잖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전공도 세웠을뿐더러, 조금만 더 버틴다면 적당히 시간도 번 셈이니 할 만큼은 해준 셈입니다. 굳이 여기서 더 열심히 일해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가르비아가 활짝 웃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부관을 아주 오랜만에 칭찬했다.
“아주 좋아. 이제야 어디 가서 내 부관이라고 할 수 있겠구만.”
“과찬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진심이니까 너무 그렇게 불퉁하게 받지 않아도 되네.”
“불퉁하게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고.”
가르비아는 여전히 강 건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자네 말대로, 조금만 더 시간을 끌다가 적당히 물러날 생각이야. 너무 배를 채우려고 하면 몸이 무거워지는 법이거든. 그렇게 되기 전에 발을 빼야겠지.”
“그 시기는 언제로 보고 계십니까.”
“글쎄. 저놈들의 분위기를 살펴야겠지. 틈을 잘 보지 못하면 자칫 잔뜩 사나워진 적에게 물려버릴 수도 있으니까.”
언제 나서야 할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언제 물러나야 할지를 아는 것이다. 또한, 어떻게 나서야 할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떻게 물러나야 할지를 아는 것이다.
가르비아는 이미 물러날 마음을 굳혔다. 지금 그가 고민하는 것은 그 시기와 방법이었다.
‘시기야 알아서 찾아올 테고, 문제라면 방법이로군.’
바라눔 트라소프는 바보가 아니다. 기다리고 있던 기회가 왔다고 생각이 들면, 그는 즉시 전력을 발휘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이쪽이 물러나야 할 때.
‘그나저나…꽤 침착하구만.’
군터 크렘보르라고 했던가. 직접 얼마 되지 않는 병사들과 함께 강을 건널 정도로 과감한 자다. 아니, 좋게 말해 과감한 것이고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과격한 자.
그런 자가 이런 답답한 상황이 되어서도 지금까지 조용하게 있다는 것이 조금은 의외였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다시 강을 건너는 것은 미친 짓이지만, 아무래도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의 선봉에서 길을 열어대던 모습이 너무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그래. 좋게좋게 가는 게 좋지 않나. 부디 지금처럼 조용히 있어 달라고. ’
결판을 내지 못하고 심심하게 마무리 짓는 것은 아쉽지만, 무리를 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가르비아는 어제도 그랬고, 엊그제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경계를 단단히 할 것을 당부한 뒤 그의 막사로 들어갔다. 오늘은 왠지 잠이 잘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그저 기분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오랜만에 깔끔하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른 아침, 아니 새벽에 기분 좋게 눈을 뜨자마자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뭐라?”
잠이 덜 깬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눈을 뜨자마자 이런 헛소리가 들릴 이유가 없지 않나.
하지만 막 일어난 그의 정신은 어젯밤보다 더 말끔했고, 덜덜 떨면서 보고하는 병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무래도 헛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다시 한번 아룁니다. 강기슭의 초소 일곱 개가 무너졌습니다.”
“초병들은?”
“그, 그것이…보이지 않습니다.”
“전투의 흔적은 남아 있는데, 초병들은 보이지 않는데? 하다못해 시신도 없다는 말이냐?”
“예, 옛!”
이곳이 전장이 아니었다면, 하다못해 그 자신이 지휘하는 전장이 아니었다면 흥미로운 수수께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니, 이런 수수께끼는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당한 거라고 봐야겠지.’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이 도강을 했다고 봐야 할 터. 하지만 그렇게나 경계를 철저히 했는데 적이 강을 건너왔다는 것은 쉬이 믿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밤새 눈을 부릅뜨고 있었습니다. 간밤에 별 낌새는 없었습니다.”
눈 밑에 그늘이 진 장교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간밤에 강 건너편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이다. 푸석푸석한 얼굴들에 억울함이 가득한 것이, 책임을 피하고자 변명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넘어왔다고 해도 소수다.’
기껏 은밀하게 도강을 했다면 좀 더 큰 것을 노려도 됐을 거다. 그런데 적이 강을 건너 한 일이라고는 초소 일곱 개를 무너뜨린 것이 전부. 일곱 개 초소에 배치된 병력은 이백도 되지 않으니, 공들여 가한 공격 치고는 그 성과가 너무 초라하다.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신경 쓰이는 것은 또 있었다.
‘시체가 사라졌단 말이지.’
찝찝하기로는 이쪽이 더하다. 초소를 지키던 병사들은 다 죽었다고 봐야 할 텐데, 그들의 시체가 사라진 것은 무슨 이유일까.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
고민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건너온 놈들이 아직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모르지.’
가르비아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한편으로는 일곱 개 초소에 남은 전투의 흔적을 자세히 살피도록 했다.
* * *
“후우…….”
군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익숙하지 않은 두통이 좀처럼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탓은 아니었다. 하루 이틀 정도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해서 무리가 오지는 않는다. 지금도 머리가 아픈 것을 빼면 그의 몸에는 기운이 넘쳤다.
‘익숙하지 못한 탓이로군.’
알 수 있었다.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힘을 쓰는 것이 익숙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도, 일단 이 정도면 괜찮겠지.’
병사들을 모두 이동시켰다. 지금쯤 적진이 발칵 뒤집혔을 테지만 괜찮다. 발각될 일은 없을 테니까. 아, 혹시 또 모른다. 아바시스에는 다양하게 술법을 활용하는 재주가 있다고 하니, 혹시 그들이 강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숨겨둔 병사들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찾은들 어쩔 것인가. 강에 뛰어들어서 칼이라도 휘두를까?
불가능하다. 살아있는 자는 그럴 수 없다. 칼을 휘두르기는커녕, 숨이 막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