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6화
상황이 좋고, 전투가 잘 풀린다면 얼굴 정도는 한 번 봐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적장을 노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기병이라고는 해도 고작 천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건 망상이다.
게다가, 적의 저항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했다. 곳곳에 배치된 술사들이 연신 술법을 쏟아부으며 발목을 잡았고, 군졸들도 질주하는 기병에 맞서 좀처럼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적의 전력도 어느 정도는 파악했고, 휘저을 만큼 휘젓기도 했으니 이제는 물러나야 할 때였다.
“장군! 후미가 뒤처지고 있습니다!”
살라스의 다급한 외침은 군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점점 멀어지는 적장의 얼굴에 못 박힌 듯 머물러 있었다.
다시 봐도 참으로 특이한 생김새였다. 뱀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것이, 물론 그런 종족이 ’나가‘라는 것은 휘하 술사들을 통해 들었지만…….
‘다음번에는 이렇게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탐색전, 혹은 전초전은 한 번이면 족하다.
“이랴!”
지금도 숨을 거칠게 헐떡이고 있는 군마를 더욱 다그쳤다. 한계에 다다라간다고 착각하고 있던 짐승은 고삐를 당기는 거친 힘 덕에 진짜 한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정말…말도 안 되는군.”
맥이 풀린 가르비아가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기껏 허리를 잘라놓았더니, 잘린 허리 아래를 기어이 구출해가다니. 저 저돌적인 돌파를 그대로 당해주는 아군 병사들도 답답하지만, 그보다 더 답답한 것은 멀어져가는 적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이었다.
“장군. 그래도 적의 피해가 적지 않습니다. 살아 돌아간 것은 고작해야 반절…….”
로츠가 상관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가르비아는 그런 수하에게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반절? 삼분지 이는 되어 보이는데?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이거 큰일이구만.”
“그…….”
로츠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가르비아는 그제야 내심 후회했다. 이것이 유치한 화풀이에 지나지 않음을 어찌 모를까.
‘그래.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아군이 무력했다기보다는 적이 강했다. 이런저런 조치들로 대비한다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야습을 당하는 입장에서 초반의 혼란은 피할 수 없었고, 적은 그 혼란으로 생긴 틈을 기가 막히게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돌파력은…….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친 것이 정답이었다.’
적으 대장으로 추측되는 자가 직접 이끌고 온 병력이니만큼 최정예이기는 할 것이나, 강 건너에 있는 기병들의 힘이 저 반이라도 된다면 그건 아군에게 있어 재앙이다. 4만 대군의 한복판을 고작 천 기의 기병으로 휘젓고 다녔는데, 그보다 많은 기병을 야전에서 상대해야 한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초병을 더 늘린다.”
“예.”
그래도 위안거리가 있다면, 생각보다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다. 적이 아군 진영을 휘젓는 데 집중하였기 때문으로, 적이 잘 훈련된 기병이었음을 고려하면 야습으로 인한 피해는 크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적이 이번 야습을 아마도 탐색전으로 여겼을 것을 고려하면, 적도 나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봐도 되리라.
‘이거 참…열 받는군.’
허탈함이 가시자 슬슬 가슴부터 시작해 정수리까지 열이 번졌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허를 찔린 것도 아니고, 반쯤은 안 상태에서 당해버리니 뒷덜미가 다 뻐근해졌다.
‘자,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어떻게고 자시고,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처음 계획대로 적당히 대치만 하면서 시간을 끌면 된다. 거래 상대로 그 정도의 성의만 표하면 납득할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얼얼하게 한 방을 맞고 나니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의회에 들어가 정치꾼으로 지낸 세월이 길었지만, 그전에는 전장을 누볐던 가르비아였다. 그때의 그는 지금 그가 머리가 불타고 있다며 비아냥거리는 군부의 인사들 못지않게 과격했었다. 그때 쌓은 악명이 아직까지도 어느 정도 남아있을 정도였다. 군부의 일부 장군들이 가르비아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영향이었다.
‘안 되지. 안 돼. 나쁜 버릇을 아직도 못 버리고……. 정신 차려라. 정신.’
나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아직도 애송이 시절의 버릇을 다 버리지 못한 걸까.
하지만 자각해야 한다. 이제는 전장의 열기에 매몰되어 날뛰던 일개 무부가 아니다. 더 큰 그림을 봐야 하는 위치에 있지 않은가.
‘나중에…나중에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피하지 않겠다.’
가르비아는 심호흡을 하며 열기를 식혔다. 그럭저럭 시원한 새벽바람이 차분해지려는 그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 * *
“저놈들, 싸울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강 건너에 포진한 채 벌써 닷새째 꼼짝 않고 있는 적진을 살핀 할렌의 감상이었다. 그런 그의 감상은 곧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감상이었다. 물론 이 모두에는 군터도 포함이었다.
“불알 달린 사내놈답지 않군요. 아, 아랫도리가 뱀이었지.”
아드리안이 생각 없이 툭 한 마디를 뱉었다가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았으면 할렌이나 다른 이들이 핀잔을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상황이 너무 꼬여서, 그들도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닷새만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다소 섣부를 수도 있겠습니다만…이건 대놓고 발을 묶겠다는 것 같지 않습니까?”
토어릭의 말이었다. 살라스도 동의한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마따나, 적이 처음 강 건너에 포진한 후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인 것이 전혀 없었다. 첫날 밤에 가한 야습 때문인지 경계를 더 강화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적이 저렇게 버티고 있으면 아군도 움직일 수가 없지요. 토어릭이 말한 것처럼…우리의 발을 묶어 둘 속셈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라눔 트라소프가 아바시스와 손을 잡은 것일까요?”
할렌이 의심을 내비치자 살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속단하기는 이르네. 아말로페 트라소프가 아바시스와 결탁한 것은 기정사실이니, 아바시스가 아닌 그와 연수한 것일지도 몰라.”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아니. 다르네. 둘 다 심각한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살라스의 무거운 중얼거림을 끝으로 막사 안이 조용해졌다. 저마다 생각에 잠긴 수하들을 일견한 후, 군터는 닷새 전에 보았던 적장을 떠올렸다.
‘만만해 보이는 놈은 아니었지.’
제대로 본 것은 한 번뿐. 그나마도 전투 와중에 멀찍이서 잠깐 본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 한순간, 군터는 상대가 호락호락한 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군을 운용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특히 마지막에 보았던 그 활활 불타던 눈빛까지.
그런 눈을 한 자가 졸장일 리는 없다. 겁쟁이일 리도 없고.
적장을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가정하고, 그런 자가 저렇게 시간을 끌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이쪽은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서부 전선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는 더더욱 모르는 상황인데 이렇게 발목을 잡힌다면…….
“장군. 원군을 청하시지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살라스가 입을 여니, 할렌과 아드리안을 비롯한 여럿이 의아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몇몇은 살짝이지만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원군?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물러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적은 원정군이다. 필시 대협곡에서 출발했을 터인데, 그렇다면 적이 보급을 충당할 방법이 마땅찮다. 대협곡에서부터 보급을 받는다면 보급선이 말도 안 되게 길어지고, 부근을 약탈하여 충당한다고 해도 수백이나 수천 규모의 군대가 아니니 그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 시간을 끌면 알아서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면 강을 건너와 본격적으로 공격에 나서야 할 텐데, 그것이야말로 이쪽이 바라는 바가 아닌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원군을 입에 담는 살라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승리가 보장되는데, 굳이 원군을 요청해서 체면을 구길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적장이 얼간이가 아닌 이상,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먼 길을 온 원정군. 그런데도 서둘러 공세에 나설 생각은 하지 않고 저렇게 드러내놓고서 시간을 끌고 있지요. 그렇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살라스의 의견은 군터의 흥미를 끌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추측입다만, 아마도 서쪽의 전선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겠지요. 그러나 무슨 이유가 됐든,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원군을 말한 것이냐? 서둘러서 끝내기 위해?”
“피해를 감수한다면 아군만으로도 어떻게든 적을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쟁은 아직 한창…아니,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피해를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원군을 요청하라는 말을 했을 때는 불쾌하게 여겼으나,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살라스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었다. 적을 물리치는 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나, 문제는 살라스의 말처럼 그 과정에서 얼마나 피해를 입는가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무리해서라도 강 너머에 진을 칠 것을.’
적이 다가온다는 보고를 처음 접했을 때 강을 건너지 않고 그 앞에 진을 친 것은 침입해 온 적을 보다 효율적으로 막기 위해서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병법을 전혀 모르는 이라고 해도 강을 건너서 진을 치기보다는, 강을 건너서 공격해 올 적을 맞아 싸우기를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먼 길을 달려온 적이 공세를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침입을 당한 입장이기라도 한 것처럼 저렇게 얌전히 시간만 죽이고 있을 줄이야.
이렇게 되니 오히려 이쪽이 더 다급해졌다. 적이 원하는 바가 얌전히 시간만 끄는 것임을 알게 된 이상, 원하는 대로 어울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강을 건너 공격하자니 피해가 막심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러니 다른 수를 찾아야 하는데,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술사 전력이 충분했다면 잠시 강 일부를 얼리거나 하는 식으로 길을 낼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여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해도 상대가 가만히 당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바시스의 군대는 술법을 잘 활용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니, 도강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해놓았을 터.
‘다시 한번 야습을 가해 시간을 벌고, 그 틈에 본군이 도강을 한다면…….’
이상적이지만,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한번 당한 것을 또 당해줄 리는 없었으니까.
‘원군을 부르는 것뿐인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을 물리치려면, 아무래도 살라스의 말처럼 원군을 부르는 방법뿐일 듯했다.
“전령은 지금쯤 하잘에 거의 당도했겠군.”
“예. 늦어도 하루 이틀 정도면 소식이 전해질 겁니다.”
아바시스군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군터는 바로 전령을 급파했다. 전령은 하잘에 소식을 전할 것이고, 그것을 들은 로드니 캄브라이는 다시 테리브란으로 파발을 띄울 것이다.
“원군을 청한다면 하잘인가?”
“폴츠가 더 가깝습니다. 주 경계에 주둔 중인 방위군은 바로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폴츠는 판니른의 서남쪽에 바로 붙어있었다. 전령을 보낸다면 늦어도 사흘 안에는 닿을 수 있을 것이고, 폴츠의 방위군이 바로 움직여준다면 늦어도 열흘 안에는 원군이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전령을 보내라.”
내키지는 않지만, 군터는 살라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자존심을 조금 굽히더라도 실리를 취하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폴츠의 군대가 크게 활약하지는 못할 터였다. 군터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적의 시선을 잠시만 붙잡아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아주 약간의 시간만 벌어준다면, 즉시 도강하여 전력으로 적을 들이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군터의 계획, 혹은 기대는 딱 열흘 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장군! 포, 폴츠에서 오던 원군이 적의 매복에 당해 크게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고 합니다!”
할렌의 다급한 목소리에, 군터의 입가가 조용히 비틀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