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5화
“그런가.”
군터는 모페이브에게 전날 있었던 일을 보고받았다. 할렌이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였다.
“군데군데 손을 본 곳이 많다 보니, 일반적인 각인들에 비해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끝났으니 하루나 이틀 정도면 괜찮아질 겁니다.”
“미련한 놈 같으니.”
군터는 혀를 찼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모페이브에게 사정을 전해 들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할렌이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무모함을 막지 않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몸이 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거늘.’
만약 그 자신이 부자연스러움의 화신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면 할렌을 타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지 않은가.
‘노화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돌이라도 있었다면 단번에 으스러졌으리라.
온몸에 힘이 넘쳐흘렀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가득했다. 나이를 먹은 몸뚱이는 이십 대 때의 그 혈기왕성했던 시절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앞으로 십 년, 이십 년이 흐르면 이 기운이 쇠할까? 아니,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그의 육신은 세월의 흐름에서 몇 발자국 정도 벗어나 있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너희와 다르다.’
주먹에 힘을 풀고 모페이브를 보았다. 그 뒤의 살라스와 토어릭도 번갈아 보았다. 그들 모두, 얼굴에 주름은 졌을지언정 아직 강건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갈까? 십 년? 이십 년?
군터는 문득 묘한 감정을 느꼈다. 뭐라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나마 가장 비슷한 단어를 찾자면 아마 소외감일 것이다. 홀로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 그건 외로움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에게 있어 무척이나 생소한 감정이었다.
“장군!”
그가 잠시 감상에 젖어가려던 찰나, 바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습입니다! 아바시스 놈들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던 군터의 두 눈에 일순 한기가 떠올랐다.
* * *
“준비를 단단히 해놨군.”
가르비아가 가마 위에서 나직이 감탄했다. 나가의 눈은 인간의 눈보다 월등하다. 세로로 찢어진 눈은 인간은 볼 수 없는 작은 것을 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볼 수 없는 먼 곳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강이 가까워지기도 전에 강 건너에 자리한 요새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먼젓번에 왔을 때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새 저만한 요새를 축조하다니. 돈깨나 들였겠군.”
자연스러운 추측이었으나 오판이었다. 가르비아는 종일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기물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7황자와 테리브란의 대신들이 최대한 기밀을 유지한 덕에, 고렘의 존재는 대협곡이 위치한 남쪽 끝자락에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만만찮겠는데.”
“애초에 제대로 할 생각도 없으셨잖습니까.”
가마 옆에서 말을 타고 따르던 로츠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가르비아가 클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내가 남의 전쟁에서 피를 봐야 하느냐. 시선만 끌어주면 되는 것인데, 시늉만으로도 충분하지.”
‘장군의 피가 아니라 군졸들의 피겠지요.’
또 하나의 핀잔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로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상관이 오늘 기분이 좋아서 한 번은 넘어갔지만, 아무래도 두 번은 위험했다. 로츠는 볼멘소리를 뱉는 대신 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은 건너실 겁니까? 적이 벌써부터 마중을 나온 것 같습니다만.”
“흐음.”
가르비아는 로츠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강 건너에 위치한 요새와, 강기슭에 포진한 일단의 적병에 번갈아 눈길을 주었다.
“적극적이군. 보아하니 꽤 열이 받은 모양인데.”
“한 번 당한 적이 있으니 약이 올랐겠지요. 어쩌면 장군의 깃발을 알아보았을 수도 있고요.”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먼젓번의 일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저쪽이지만, 이쪽도 결과적으로는 헛걸음을 했으니 말이다.
‘그때 그놈…….’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하지만 아군과 백성들이 있는 성에 망설임 없이 불을 지를 정도로 독한 놈이라는 것은 안다. 어쩌면 그놈이 지금 저기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문득 군사를 몰고 강을 건너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때 그놈과 일전을 벌여…….
‘안 되지. 안 돼.’
간만의 전투라고 열이 오르다니. 애송이처럼 흥분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가르비아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머리에 찬 열을 털어냈다.
“건너지 않는다. 기슭에서 조금 떨어져 포진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진지를 꾸리는 동안, 가르비아는 강 건너에 포진한 적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조금 큰 점 정도로 보일 거리였지만, 나가의 눈은 큰 점을 넘어 흐릿하긴 해도 형체를 잡아냈다.
‘음?’
적의 동태를 살피던 중.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착각인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감각이 착각일 리는 없었다. 비록 전장에서 떠난 지 근 20년이 다 되어간다고는 해도, 무장으로서의 감각은 현역 시절 못지않게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이런 기분 나쁜 감각은 한때 질리게 느껴보았다. 이런 더러운 느낌이 들었을 때는 단 한 번도 착각이었던 때가 없었…….
‘찾았다.’
연신 두리번거리던 그의 고개가 한 곳을 향한 채 멈췄다.
‘넌 누구냐.’
야트막한 언덕 위. 십여 기의 기마. 그중 가장 앞에 나와 있는 큼지막한 말과 거한.
노르스름한 뱀의 눈이 가늘게 수축했다.
* * *
‘뱀?’
온갖 것들을 보아왔다. 괴물이나 요정 등,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보기 힘든 것들을 여럿 보았으며 그것들과 싸우기도 했다. 그러니 반은 뱀이요, 반은 인간인 괴물을 봤다고 해도 놀라울 것은 없었다. 다만 신기할 뿐.
“뭐가 보이십니까?”
각인시술의 후유증을 털어버리고 기운을 차린 할렌이 눈을 가늘게 좁혀 뜬 채 물었다. 초원 출신인 그조차 눈에 잔뜩 힘을 주었음에도 특별히 보이는 게 없었다. 기껏해야 바쁘게 진지를 꾸리고 있는 모습을 어렴풋이 보는 것이 전부였다.
“특이한 괴물이 보이는구나.”
“괴물…말씀입니까?”
“반은 뱀이고 반은 사람이다. 허리 아래는 뱀 꼬리가 달렸는데, 허리 위쪽은 사람이구나.”
“그게 뭡니까? 어디에 그런 놈이…….”
반인반사의 괴물이 있다는 소리에 할렌이 눈에 더 힘을 주었으나 그래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인간의 상반신에 뱀의 하반신…….”
“음?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살라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할렌이 고개를 돌렸으나, 살라스는 할렌을 보지 않았다.
“일전에 기습해온 아바시스 병력. 그때의 적장이 분명…….”
“저놈인가?”
뱀 인간을 바라보는 군터의 눈빛이 서늘해졌고.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살라스의 눈에도 어느새 섬뜩한 살기가 감돌았다.
* * *
“초병을 더 늘린다.”
“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혹 신경 쓰이시는 부분이라도?”
로츠가 물었지만 가르비아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는 감이라는 어정쩡한 것에 기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본인부터가 마땅찮은 이야기를 까탈스러운 부관에게 꺼내기가 껄끄러웠다.
‘그놈.’
착각이 아니다. 분명 놈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아무리 눈이 좋아도 그럴 수는 없다. 분명 술법적인 힘을 사용했거나, 아니면 신비로운 피가 섞인 놈일 터.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 거한과 눈을(아마도) 마주쳤을 때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런 갑작스레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감각은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 음험하기 짝이 없는 의회에서조차도.
‘아무래도 영 꺼림칙하다는 말이지.’
간이 초소를 빠짐없이 설치했고, 초병들도 넉넉하다 못해 조금 과할 정도로 배치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뭘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여봐라!”
가르비아는 막사 입구를 지키던 병사를 불러 몇 가지를 명했다. 명을 받은 명사가 황급히 달려나간 후, 그는 똬리를 틀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날, 구름이 달을 반쯤 가린 캄캄한 밤.
와아아아-!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
두툼한 가죽 침상 위에 누워있던 가르비아가 눈을 번쩍 떴다.
‘역시.’
미끄러지듯 침상을 내려온 그가 머리맡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던 창을 집었다.
* * *
날이 저물기 무섭게 미리 잘라놓은 나무들을 은밀히 강기슭쪽으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뗏목을 건조하여 강에 길을 만들었다. 몇 번이나 훈련을 거듭했던 일이기에 병사들의 움직임은 신속 정확했다.
기병 천. 야습이라고 해도 인원이 너무 적지만 은밀하게 강을 넘기 위해서는 이 정도가 적정선이었다. 수가 더 늘었다가는 아무리 조심해서 움직인다고 해도 적의 시선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천이라고는 해도 그들 모두가 고르고 고른 정예였다. 부장으로도 살라스와 할렌, 아드리안까지 모두 대동했다. 병사의 수만 적을 뿐, 치고 빠지는 야습에는 차고 넘치는 전력이었다.
“초병이 많다. 감이 좋은 녀석이군.”
“어찌할까요?”
군터는 강을 건너기 전부터 넓게 퍼져 있는 초병의 위치를 확인했다. 어디로 가든 눈을 피하지 못하게끔 하는 절묘한 배치. 비록 적이지만 감탄이 나왔다. 초병의 배치만 보아도 적장(아마도 그 뱀 인간)이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우회는 불가능하다. 최단거리로 돌파한다.”
간만의 전투다. 군터는 벌써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한 몸을 애써 식히며 고삐를 쥐었다.
“이랴!”
그와 병사들은 강을 건너기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강을 건넌 순간부터는 어찌 움직여도 적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어쩌면 건너는 도중에 발각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숨죽여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적이다!”
말을 달리기 무섭게 좌우에서 호각소리가 울려 퍼졌다. 간간이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무시하고 움직였다. 자잘하게 발목을 잡히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다.
“장군! 좌우에서 좁혀옵니다!”
군터의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살라스가 다급히 외쳤다. 그의 말처럼, 좌우에서 무시할 수 없는 수의 병력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넓게 배치되었던 초병들이 뭉쳐서 압박을 가해오고 있는 것이었다.
“무시한다! 놈들이 붙기 전에 돌파할 것이다!”
그런 움직임은 군터도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이 정도 어둠은 그의 눈을 가릴 수 없었고, 그의 시선은 말을 달리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 좌우로 퍼져라!”
계속해서 말을 달리던 중, 군터가 다급히 외치며 고삐를 당겼다. 그 어떤 예고도 없는 다급한 명령이었으나 병사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콰콰!
그들이 두 갈래로 나뉘기 무섭게 땅이 흔들리더니 거대한 가시 같은 것이 수십 개가 넘게 솟구쳤다. 만약 그대로 앞만 보고 달렸다면 한순간에 전열이 무너졌으리라.
“아바시스의 군대는 술법의 사용에 능숙하다고 했다! 내 호령에만 집중해라! 언제든 방향을 꺾을 수 있도록!”
그렇게 외치며, 군터는 기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적 술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방향을 틀어야 했다. 이제 적 본진이 머지않은 마당에 그럴 수는 노릇 아닌가.
“왼쪽이다!”
말머리를 왼쪽으로 틀기 무섭게 불길이 치솟았다. 그제야 미약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뭔지는 몰라도, 분명 평범한 기름은 아니었다.
‘미리 준비해놓은 건가.’
비약인 것 같지만,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과할 정도로 꼼꼼했던 초병의 배치도 그렇고, 이런 함정도 그렇고, 아무래도 적장은 야습을 짐작한 듯했다.
‘아니, 이 정도면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다.’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군! 적이 벽을 세우려 합니다!”
할렌의 다급한 외침.
전방에 커다란 방패를 든 병사들이 촘촘하게 뭉쳐서 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뒤에는 창을 든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듯했다.
“돌파한다!”
군터가 사납게 외치며 더욱 세차게 말을 달렸다.
* * *
“그대로 부딪치겠다고?”
속으로 떠올린 생각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당황한 나머지, 아니 어처구니가 없었던 나머지 한 실수였다.
‘아국의 방패병단에 대해 모르는 모양이군.’
단순히 큰 방패를 든 방패병들이 아니다. 저들이 든 방패 하나하나에는 술식이 새겨져 있었다. 법구라고 하기에는 조악한 수준이지만, 한 가지 효용만큼은 여느 법구에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다.
‘한 번 자리를 잡은 방패병단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민함은 인정하겠다만, 결국 실수했군.’
방패병들이 든 방패의 술식은 연동되는 성질이 있다. 방패 하나하나에 깃든 힘은 별 것 아닌 수준이지만, 그것들이 뭉치면 뭉칠수록 그 힘은 크게 불어난다. 열 개의 방패가 붙어 있다면 열 개에 깃든 힘이 하나로 뭉쳐지는 것이다.
이 말만 들으면 한 백 개 정도의 방패가 모이면 무적의 힘을 발휘할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열 개가 뭉치면 열 개 분의 힘이 하나로 뭉쳐지는 것뿐이다. 열 개의 방패에 동시에 공격이 들어온다면 그 뭉친 힘은 아무런 효용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일점돌파는 불가하다.’
넓게 들어오는 공격에는 약하나, 한 점에 집중하여 들어오는 공격에는 더없이 강력하다. 그래. 정확히 지금과 같은 상황.
“적이 멈춰 서면 바로 뒤를 끊는다!”
가르비아는 가장 앞에 툭 튀어나와 있던 적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분명 낮에 강 건너에서 보았던 바로 그 거한이었다.
‘역시 직접 왔군.’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야습을 가한다면 분명 직접 올 것이라고.
콰앙!
방패의 벽과 적이 부딪쳤다. 하나로 뭉친, 백 개가 넘는 방패의 벽이 깨질 듯 흔들렸다. 그것만으로도 가르비아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진짜 놀랄 일은 아직 벌어지지도 않았다.
“꺼져라!”
한데 뭉친 인파가 출렁인다 싶더니, 가시가 옷을 찢고 나오듯 몇 기의 기마가 방패의 벽을 뚫고 나왔다.
“하하.”
당황스러움이 정도를 넘어서니 웃음이 나왔다. 가르비아가 창을 고쳐 쥐는 사이, 수십 기의 기마가 더 벽을 뚫고 나왔다. 그 이후로 벽은 의미가 없어졌다.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든든했던 방패병단이 허망하게 돌파를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반은 벽을 돌파했지만, 반은 발이 묶였다. 본래 대략 천 명 정도 되어 보이던 적이 오백이 된 것이다.
‘오백 정도다. 저 정도라면 끌어들여서 해치우면 그만이야.’
지금 달려오고 있는 적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잘 안다. 방패병단의 벽이 깨진 것만 봐도, 적어도 돌파력 하나만큼은 상상 이상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래봐야 천이고 오백이 아닌가.
“길을 내라. 안쪽으로 끌어들인다.”
노리는 것은 분명하다. 아까부터 계속 목덜미가 서늘한 것이, 분명 이 목을 노리고 오는 것일 터.
긴장이 몸을 적셨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각인가. 자칫 위태로워질 수 있는 상황임을 인지했으나 한편으로는 들뜨는 기분이었다. 의회에 들어간 후, 녹이 슬었던 몸에 기름이 뿌려진 것만 같았다.
‘본래 힘을 쓸 생각은 없었다면, 이렇게 급하게 군다면 어쩔 수 없지.’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방패병단을 돌파한 후, 적의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이제 두어 번 정도 화살이 날아가고 나면 맞닥뜨리게 되리라.
“쏴라!”
목청 좋은 장교의 호령에 궁병들이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천 발이 넘는 화살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똑바로 달려오던 적이 갑작스레 방향을 틀었다.
“응?”
이제 곧 당도할 적을 기다리며 숨을 고르던 가르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당연히 똑바로 달려올 것이라 생각한 적이, 아예 방향을 틀어서 왼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