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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94화 (694/1,064)

694화

“꽁무니를 빼는군요.”

“…….”

바라눔 트라소프는 답하지 않고 검을 뽑았다. 뼈를 가르고 들어간 검은 별다른 저항 없이 깔끔하게 뽑혀 나왔다. 묻어있던 핏물은 예리한 검신을 타고 쭉 내려가더니 칼끝에 방울이 되어 고였다.

“여전히 제대로 싸울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칼끝에 고인 마지막 핏방울이 땅에 떨어짐과 동시였다.

“놈들의 전략은 확고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된 교전이라고 할 만한 것은 루람에서 있었던 초전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전투가 일어나도 산발적인 교전뿐. 하브람 카리아는 정면대결을 철저히 피하면서 소규모 기습만을 고집했다. 성과 요새에서 버티는 것도 길어야 닷새 정도에 불과했다. 야음을 틈타 성문을 열고 병력을 빼돌리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임야에 불을 놓아 진군 속도를 늦추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강물에 독을 풀어서 식수 수급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그야말로 시간을 끌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었다. 전략대로, 라는 측면에서 하브람 카리아는 정말 독할 정도로 철저했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삼분지 일이 손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바꿔 말하면 아직도 삼분지 이가 남은 셈이지.”

“아록에서 카리아의 영향력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갈 곳 잃은 백성들이야 양측 모두를 원망하겠지만, 그들도 산과 들에 불을 놓고 강에 독을 푼 것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을 겁니다.”

“하브람 카리아가 이렇게 될 것을 모르고 일을 저질렀겠나. 그는 이 전쟁에 깊이 몰두하고 있어. 뒷감당보다는 당장 눈앞의 전투를 우선시하고 있지.”

“그가 거느리고 있는 병사들도 이 땅의 백성들입니다.”

“전쟁의 열기는 그 자체로 광기다. 그들의 마음이 약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줄 수 없는 처지지.”

사실 하브람 카리아를 무너뜨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약은 수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점진적으로 정복해가는 것이다. 하브람 카리아가 잔혹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으니, 그와는 반대로 자애로운 정복군 행세를 하며 아록의 민심을 얻으면 된다. 그러면 하브람 카리아는 아록 백성들의, 그리고 병사들의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니 저절로 궁지에 빠지게 될 터.

하지만 이런 왕도가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그대로 할 수 없는 까닭은, 그렇게 시간을 들일 여유가 없기 때문이며 상대가 하브람 카리아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브람 카리아는 상대는커녕, 밟고 넘어가야 하는 장애물 중 하나에 불과했다. 진짜 상대는 그 너머, 지금쯤 리바스트라 왕궁에 있을 배다른 형제다.

“정말 움직일 줄이야.”

사실 이렇게 길게 끌릴 싸움이 아니었다. 하브람 카리아가 나름 독기를 품기는 했지만, 그가 아무리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한들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물론 그 어렵지 않은 상대에게 벌써 몇 달째 발이 묶인 주제에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쯤일 것 같으냐.”

“전번의 전령이 다시 북상하기 시작했다고 전했으니, 늦어도 한 달 안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늦어도 한 달이라고 하지만, 그마저도 너무 길다. 제대로 성의를 보일지도 의문이고.

“믿을 수 없는 자들이다.”

“소장 역시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시선 정도는 끌어주겠지요.”

“그렇겠지.”

기대하고 있는 것은 딱 그 정도다. 그 정도만 해줘도 충분하다.

“바크렌의 병력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끌어들여서 한꺼번에 섬멸한다. 시간이 맞았으면 좋겠군.”

바라눔 트라소프는 일각수에 올랐다. 살점을 뜯어먹고 있던 괴물의 입가는 잔뜩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포트락 장군 쪽은 어떤가.”

“그쪽도 여전히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성미에…어지간히 답답해하고 있겠군.”

“하하.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쥬드 포트락이 비록 이런저런 이유로 소싯적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기는 했지만, 그 성미만큼은 그대로였다. 아마 지금쯤 하루건너 하루꼴로 전령이 당도했느냐고 닦달하고 있지 않을까? 바라눔 트라소프는 피식 웃고는 고삐를 당겼다. 일반적인 고삐보다 족히 수 배는 굵은 고삐가 팽팽하게 당겨지자 그때까지도 시신에 코를 박고 있던 일각수가 못마땅한 울음을 토하며 고개를 들었다.

* * *

바크렌에서 티브리악의 3만 대군이 차출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 군터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었다. 그는 어쩌면 올해 안으로는 출병 명령이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다수가 어중이떠중이일 확률이 크기는 하지만, 어쨌든 3만이나 되는 대병력이 충원되었으니 전선이 안정화 되리라 짐작한 것이다. 그건 비단 그만의 생각이 아니라, 살라스를 포함하여 솔롬에 있는 무관들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지금쯤 총독은 안달이 났겠습니다.”

토어릭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십중팔구 그럴 것이다. 테리브란과 전선의 소식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테고, 어쩌면 티브리악의 3만이 크게 당하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 이번 전쟁은 다시 없을 기회다. 이번이 아니라도 전쟁과 전투는 계속 있을 테지만, 가문으로 돌아갈 적기는 바로 지금이었다.

“그의 배다른 동생이 나날이 크고 있다더군요. 총명하답니다.”

토어릭이 여전히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런 소식을 어디서 그렇게 주워듣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들으니 먼젓번에 로드니 캄브라이의 얼굴이 어둑어둑했던 것이 이해가 됐다.

“몸이 달았겠군.”

“달다 뿐이겠습니까? 초조해서 미칠 지경일 겁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라고는 아마…기껏해야 2년 정도일 겁니다.”

“고작?”

“어차피 명분 싸움입니다. 꼬마가 어느 정도 커서 가주 자리를 잇는다고 해도 어차피 몇 년 동안은 그 어미가 대리하겠지요. 대충 꼬마 티만 벗으면 됩니다. 그러면 가주는 망설임 없이 후계자를 정할 겁니다.”

캄브라이는 본가에는 로드니 캄브라이의 추종자들이 적잖이 있었다. 가주가 로드니 캄브라이를 판니른으로 보내며 그들을 찢어놓았지만, 아직도 그 세는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었다. 가주가 섣불리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들 때문이었다. 적당히 몰아붙이는 것과 막다른 곳에 몰아넣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뒤를 끊어 물러설 곳조차 없게 만들어버리면 그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는 것이다.

“즐거워 보이는군.”

군터가 실실 웃고 있는 토어릭을 보며 말했다.

“사실 꽤 재미있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오만하게 굴던 자들이, 막상 다급해지니 온갖 추잡하고 유치한 짓거리를 밥 먹듯이 해대지 않습니까. 악취미라고 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 그 꼴을 지켜보는 것이…….”

“보리스는?”

“자원하지는 않으셨습니다만, 은근히 기대하고 계시는 듯하답니다. 아무래도 공을 세울 기회인 데다, 한동안 내직으로만 계셨으니 몸이 근질거리기도 하셨겠지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가정을 꾸리고 진중해졌어도, 아직 혈기왕성한 젊은 무장이었다. 게다가 그의 피를 이었으니, 호전적인 성미가 어디 가지는 않았을 터. 그나마 안사람과 동생을 생각했는지 자원은 하지 않았다니, 그것만으로도 그 나이 때 자신보다는 낫지 않은가.

“어찌하시겠습니까? 역시 손을 써두시는 것이…….”

“놔둬라.”

“장군. 공자께서는 크렘보르의 독자이십니다.”

어떤 가문도 독자를 전쟁터로 보내는 경우는 없다. 아니,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토어릭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 그런 것에 연연했느냐. 크렘보르라는 이름도 이제 겨우 몇 년 되었을 뿐.”

“장군. 하오나.”

“내 품에서 떠나간 지 오래인 녀석이다. 제 한 목숨 정도는 알아서 챙겨야지.”

토어릭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제 한 목숨은 알아서 챙기라고? 이게 아비가 하나뿐인 아들을 두고 할 말인가? 어떤 면으로는 참 그답지만, 한편으로는 과할 정도로 비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뭐, 장군께서 이러시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다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따금 지금처럼 놀라곤 한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이럴지도 모른다.

“할렌은?”

“글쎄요. 오늘은 저도 보지 못했습니다. 요즘 모페이브님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던데, 어쩌면 그쪽에 갔을지도 모르겠군요.”

“…….”

토어릭의 추측에 군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모페이브의 연구실. 할렌은 네 갈래로 뻗은 나무 틀에 양팔과 다리를 묶여 있었다. 물론 모페이브가 그를 겁박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받으실 각인은 제국의 금기 중 하나인 광전사의 각인에서 착안했습니다. 생명을 태워 힘을 얻는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 부족한 몸의 억지를 들어주시느라 노고가 크셨겠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모페이브가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이 각인의 술식을 짜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금기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강체술의 아류라고 봐도 무방하다. 술식의 힘을 극단적으로 끌어내기 위해 그 대가를 무지막지하게 잡아놓았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술식 자체가 특별히 대단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진짜 광전사들의 몸에 새겨지는 술식은 뭔가 특별한 점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 효능을 비슷하게나마 따라하려고 한다면 어려울 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할렌의 몸에 새길 수는 없었다. 전투 몇 번을 치르고 바로 피를 토하며 죽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최대한 위험부담을 줄이면서 효능도 어느 정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각인은 기본적으로 육신의 생기에 뿌리를 내리지만, 그 힘을 끌어낼 때는 기를 흡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뜻을 모르겠습니다만.”

모페이브는 자그마한 돌멩이를 꺼내 들었다. 희미한 빛을 머금은 돌. 그게 무엇인지는 술법에 문외한인 할렌도 알고 있었다.

“기석이라는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찌…….”

“생기가 빨리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중 일부나마 외부의 기로 치환하는 데는 성공했지요. 이 기석을 항시 소지하고 다니십시오. 허면 각인의 힘을 발휘할 때마다 기석의 기운을 소모하여 몸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겁니다.”

할렌이 피식 웃었다.

“비싼 힘이로군요.”

“목숨보다는 싸지요.”

말이라고 할까. 당연히 목숨보다는 싸다. 게다가 기석이라는 것이 분명 비싼 물건이기는 하지만, 할렌에게는 그리 부담이 가는 물건도 아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예.”

할렌이 모페이브가 건넨 재갈을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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