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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93화 (693/1,064)

693화

“해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소식은 접했소만, 이렇게 급하게 돌아온 것을 보니 장군도 어지간히 속이 탔던 모양이오.”

“말장난은 집어치우는 게 어떻겠소. 날 도발해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군. 혹시 연합국의 군대가 말머리를 돌리기를 원하는 것이라면…기꺼이 그렇게 해주겠소만.”

가벼운 도발은 양측 모두가 인상을 찌푸리는 결과만 낳았다.

‘자존심만 센 얼간이 자식 같으니.’

가르비아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 상대를 속으로 한껏 비웃었다. 잘난 형제들에게 밀려서 외세를, 그것도 오랜 세월 앙숙으로 지내온 적국에게 손을 벌리고 있는 주제에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는 꼴이 우습기만 했다. 뭐, 어차피 이용해먹는 입장에서 몇 마디 정도 굽혀주는 것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가르비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에게 굽히는 것을 체질적으로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기준 이하의 얼간이에게는 더더욱 그러고 그럴 마음이 없었다.

“놈들이 움직이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을 믿고 짠 계획이었소. 그런데 초장부터 이렇게 틀어져서야 쓰나.”

“과민반응을 하는군.”

“과민반응이라고?”

헛소리가 정도를 넘어 개소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가르비아는 눈앞의 얼간이와 이 이상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소 2만이 움직였소. 최소 2만. 그것도 일반적인 군대가 아니지. 줄카가 직접 나섰으니 놈이 자랑하는 용아병들도 따라왔을 테고. 그런데 그에 대해 과민반응을 하지 않을 수가 있나? 자칫하면 판을 완전히 새로 짜야 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줄카가 움직인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창을 겨누는 일은 없을 거요.”

“어째서?”

“그러지 못할 테니까.”

“말장난은 이쯤 하지.”

“난 장군을 상대로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럴 이유가 없지 않소? 두고 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요.”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얼간이 황자는 끝내 속을 다 털어놓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가르비아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저 황자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 게 아닌 이상, 여기서 괜한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좋아. 그렇다면 그 뜻을 알게 될 때까지 출병은 보류하겠소. 이의는 없으시겠지?”

“…그러시오.”

황자는 역시나 불쾌하다는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하지만 가르비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가 이 전쟁에 발을 담근 것은 남의 싸움에서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었지, 직접 싸움판에 뛰어 들어가 대신 피를 흘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게다가.

‘꼭두각시 놈에게 화풀이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잘 알았다. 애써 강한 척하는 저 얼간이가, 조종자의 손가락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 * *

“…….”

용아병을 이끄는 대장, 아라얀은 익숙하지 않은 경험에 슬쩍 고개를 갸웃했다.

진군이 멈췄다. 아예 없었던 일은 아니나, 거의 없었던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경험을 한 것이 몇십 년 전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저놈들도 오랜만이군요.”

부대장, 카니악이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구릉 위에 포진한 군대에 멈춰 있었다.

“그렇군.”

아라얀이 긍정했다. 확실히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언제였는지는 역시 기억나지 않지만, 어깨를 맞대고 함께 싸웠던 것은 기억났다. 물론, 깃발은 같다고 해도 그때 그 녀석들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싸울까요?”

“글쎄.”

성질 급한 카니악을 골려주려고 일부러 답을 미룬 적이 많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도 정말 어찌 될지 몰랐다.

“전하께서 싸우고자 하시면 싸우는 거고, 아니면 아니겠지.”

“간단하군요.”

“어려울 것 있나.”

단 한 번도 싸우는 것을 두렵다고 느낀 적이 없다. 그러니까, 용아가 된 뒤로는 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그 거인의 후예라고 한들, 강철의 군대라 한들 조금도 두렵지 않다. 싸우면 싸우는 것이다.

“싸우든 말든, 빨리 결정 났으면 좋겠습니다. 말이 지치지 않습니까.”

카니악의 푸념에 아라얀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에, 온몸을 가리는 두꺼운 전신 갑옷까지 입은 카니악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내려 있으면 돼.”

“그러긴 싫군요. 이러라고 공들여 키운 놈인데, 써먹을 때는 써먹어야지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런저런 잡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치하는 양 군대의 가운데서 두 사내가 마주하고 있었다.

[귀찮게 하는구나.]

줄카는 거대한 괴물 위에 올라 그를 내려다보는 아간투스베록을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용은 아니다. 용보다는 차라리 도마뱀을 닮았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침이 줄줄 흐르는 것이,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물어뜯고 싶은 듯했다.

[네놈은 항상 그랬지. 생각 없이 사고를 치고, 그 뒷수습은 항상 엄한 자들이 도맡아야 했어. 그래도 세월이 꽤 흘렀건만, 네놈은 여전히 변함이 없군.]

[떠벌이 덩치. 네놈도 여전한데 나라고 다를까.]

[시건방진 것도 여전하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언제였던가. 못해도 50년은 더 됐을 것이다. 반가운 얼굴이 아닌 만큼, 서로가 마주치는 일을 되도록 피해온 탓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났어도 여전히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을 보면, 그간 그렇게 피해온 것이 참 잘한 일이다 싶었다.

[네놈은 여전하면서도 조금 변했구나. 그렇게 자존심을 세우더니, 아직도 개 노릇을 하나?]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들끓는 분노가 전해져 왔다. 그의 조롱이 상대의 아픈 부분을 정확히 찌른 것이리라.

[개 노릇? 아니. 거래일 뿐이다.]

[음. 핑계치고는 너무 비루하군. 네놈이 그토록 자랑하던 그 위대한 혈통이라는 것이 울겠어.]

아마 양측 수만의 병사들은 그들의 위대한 군주들이 이런 유치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줄카와 아간투스베록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서로를 조롱하고 분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감정에 솔직했다. 조금의 거짓이나 꾸밈도 없이, 노골적인 감정을 주고받으며 으르렁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물러서라. 나와 대적한다면 곱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야.]

[그런 같잖은 위협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대꾸는 그렇게 했지만, 줄카는 아간투스베록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자신감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데, 못 느낄 수가 없다.

‘여전히 오만하기 짝이 없군.’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물론 유쾌해서는 아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다.

아간투스베록은 분명 만만찮은 상대다. 그의 힘은, 그가 입버릇처럼 떠들어대는 위대한 혈통 때문이든 아니든 분명 막강하다. 그가 거느린 강철 군대 역시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강군이고.

하지만 그렇다 한들 한판 붙기 꺼려지는 상대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부터 바라왔다. 언젠가 저 시건방진 덩치 놈을 찢어발길 기회가 오기를.

그런데 지금, 그렇게 바라던 기회가 오지 않았나.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황도에 틀어박혀 있는 늙은 괴물이 감시자를 수두룩하게 붙여놨음을 알았고, 군대를 이끌고 영지를 나선다면 본격적으로 훼방을 놓을 것도 알았다. 다만 그 훼방이 이 정도 수준일 줄 몰랐을 뿐.

그러나 아간투스베록의 오만함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하늘 아래 자신이 가장 위대하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황제마저 아니꼽게 여겼던 자이니, 황도의 늙은 괴물에게 순순히 복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럼에도 이렇게 군대까지 몰고 나왔다면, 추측되는 것은 하나뿐.

[목줄이라도 잡혔나?]

[그게 아니라면 내가 그놈의 부탁을 들어줬을 성싶으냐.]

역시. 못마땅한 상대의 좋지 못한 처지에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약간의 씁쓸함도 느꼈다.

[간수를 잘했어야지.]

[네놈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반대로 나는 운이 나빴을 뿐이고.]

[그렇군.]

아간투스베록이 내비치는 분노가 이해됐다. 하지만 그뿐.

[물러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일전을 벌이는 수밖에.]

줄카가 슬며시 이빨을 드러냈다.

[오래전부터 이런 순간이 오기를 고대해왔지.]

[나 역시. 원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자리에서 천박한 네놈의 머리통을 부숴주마.]

아간투스베록이 그의 철퇴를 들어 줄카를 가리켰다. 길이가 어지간한 창보다 더 길고, 뾰족한 가시가 뭉툭한 쇳덩이 부분을 온통 뒤덮은 흉측한 외형이었다. 줄카는 저 철퇴에 으스러져 사라진 강자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별다른 힘이 깃들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철퇴에서는 섬뜩한 귀기가 흘렀다.

[용은 베어봤지. 그런데 이번에는 피가 옅다고는 하지만 거인을 베게 되는군. 운이 좋아.]

그들 모두, 자신이 패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았다. 그들의 팽배한 자신감이 손에 든 무기보다 더 빨리 부딪쳤다.

* * *

로드니 캄브라이는 잔뜩 몸이 달아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명령을 내리면 닷새 안에 출병이 가능하다. 그런데 가장 테리브란에서 명령이 내려오지를 않으니, 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바크렌에서 병력을 조달했다고 해도 여전히 여력이 없을 터. 그럼에도 준비된 군대를 불러들이지 않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 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아바시스의 병력이 다시금 북상할 수도 있다. 뭐, 그런 우려는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가주께서 손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운바소르 아실이 물었다. 그에 로드니 캄브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 노인네가 원하는 것이야 둘 중 하나가 아니겠느냐? 내가 전장에 나가서 죽거나, 아니면 아예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시간만 죽이는 것. 고르라면 전자를 고르겠지만, 그건 불확실하니 일단 내가 나서지 못하도록 길을 막고자 하겠지.”

운바소르 아실은 과한 추측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미 이들 부자의 사이는 원수에 가깝게 변했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서로의 숨통을 끊어놓으려 할 것이다. 실제로 로드니 캄브라이는 판니른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 줄곧 암살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꼬리를 잡은 적은 없었지만, 그 음습한 칼들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나저나…조정이 꽤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잠잠한 적은 있었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요즘은 더한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고집을 부리시는 모양이더군요.”

“고집?”

“친정을 나가시겠답니다.”

그 말에 로드니 캄브라이가 실소를 머금었다.

“바라눔 트라소프에게 자극이라도 받으신 모양이군.”

“그럴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만류하는 대신들과 고집부리시는 전하 때문에 조정이 소란스럽다더군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애초에 지구전으로 끌고 가기로 한 것 아니었나. 그런 싸움에 굳이 전하께서 나설 이유가 없다. 괜한 위험만 커질 뿐.”

“예. 그렇겠지요.”

어차피 유야무야 없던 일로 될 터. 로드니 캄브라이는 그런 시답잖은 소식보다는 어서 빨리 출병 명령이 떨어지기를 고대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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