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2화
군터는 솔롬에 있으면서도 전쟁이 돌아가는 소식을 계속해서 전해 듣고 있었다. 따로 뿌려 놓은 수하들로부터 보고를 받기도 했고, 테리브란과 하잘에서 온 자들이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물론 그 소식이라는 것이 족히 한 달은 늦은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는 데는 충분했다.
“적이 리바스트라에도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쥬드 포트락의 깃발이 보였다고 하는데…….”
보고하던 살라스가 말끝을 흐렸다. 그가 왜 보고를 하다 마는지는 군터도 짐작이 갔다.
“이번엔 리바스트라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다른 모양입니다.”
“다르다?”
“예. 시온 포트락이 직접 군을 이끌고 있다는군요. 아, 시온 포트락은 쥬드 포트락의 장남입니다.”
“장남이 아비를 대신해 군을 이끈다고?”
“대신하는 것인지, 선봉으로 나선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일단은 그렇습니다.”
별 감흥은 없었다. 쥬드 포트락은 알지만 시온 포트락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기에, 그가 선봉으로 나섰다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그래서 전황은?”
“대치 중이라고 합니다. 적의 군세가 규모도 그렇고, 여러모로 심상치 않아 방어선을 굳히고 버티기에 들어갔다는군요.”
“쥬드 포트락의 깃발에 겁을 먹은 것은 아니고?”
“하하. 그렇다 한들 그들이 인정하겠습니까?”
쥬드 포트락의 깃발에, 그의 장남까지 모습을 드러냈으니 심약한 자들이 위축될 법도 하다. 군터는 리바스트라의 전투가 지루하게 흘러갈 것이라 짐작했다. 물론, 희망적으로 전망했을 때 말이다.
“리바스트라의 상황과는 반대로, 아록에서는 연일 치열하게 다투는 모양입니다.”
바라눔 트라소프와 하브람 카리아. 이름값만 놓고 보면 상대가 되지 않을 듯싶고, 실제로도 전쟁 초반에는 일방적인 양상으로 흘러갔으나 이제는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하브람 카리아가 독하게 나서기 시작하면서였다.
그는 아록 전역이 불타도 상관없다는 듯, 꽤나 파격적인 전략을 남발해댔다. 강에 독을 풀고, 농지를 태워버리는 것은 예사였고, 수천에 이르는 병사를 잘게 나누어 별동대로 부리면서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 수천이 전멸하기도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다시 똑같이 반복했다. 얼마만큼의 희생이 발생하든,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악에 받쳤군.”
아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간략하게나마 들은 군터는 짤막하게 소감을 말했다. 그에 살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총독씩이나 되는 자라면 전쟁의 와중에도 민심을 걱정할 만도 한데, 그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이건 둘 중 하나다. 감당할 자신이 있던가, 아니면 뒤가 없는 것이거나.
몸이 아록에 있지 않은 이상 그곳의 정확한 실정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추측해보자면 전자보다는 후자이지 않을까 싶었다.
‘바라눔 트라소프.’
쥬드 포트락과 마찬가지로 이름만 들어 알고 있다. 제국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쥬드 포트락에 비하면 바라눔 트라소프라는 이름은 황좌를 노리는 황자로서 더 알려졌지만, 신혈(神血)을 이은 이들 중 가장 용맹스럽다는 평판은 일찍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 쥬드 포트락의 이름에 벌벌 떨고 있지만, 군터는 쥬드 포트락보다 오히려 바라눔 트라소프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무인으로서의 호승심? 비슷하지만 아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호승심이라기보다는 호기심에 더 가깝다.
“곧 호출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리바스트라는 몰라도, 아록의 상황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브람 카리아가 독하게 수를 쓰고는 있지만, 그런 식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는 있을 테니까요.”
군터도 살라스와 같은 생각이었다. 하브람 카리아의 방식은 한계가 있었다. 제 살을 깎으면서 적의 발을 묶어두는 식이니, 더 깎을 살이 없어진다면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진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이미 그의 살은 상당 부분 깎여나갔을 터.
“안 그래도 총독으로부터 서신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 역시 짐작하고 기다리는 모양입니다.”
하잘에서 로드니 캄브라이의 서신이 왔다. 전장의 상황을 전하는 것과는 별도로, 개인적인 말을 담은 서신이었는데, 내용은 간단했다.
시기가 무르익어가는 듯하니 아직 준비할 것이 더 있다면 슬슬 마치자는 이야기였다.
점잖고 침착하게 쓰기는 했지만, 번듯한 글귀에서도 잔뜩 달아오른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침내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적잖이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준비는?”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습니다. 언제든 명령만 내리신다면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한 달 전에도 똑같이 물었었고, 살라스는 똑같이 대답했었다. 더 할 수 있는 준비는 없으니, 이제는 정말 명령만 떨어지면 바로 출병이었다.
군터는 이제 곧이라고 생각했다. 아록의 상황이 급하고, 점점 더 급해지고 있으니 후방의 병력을 끌어 쓸 것이 분명하다고.
그러나 그런 그의 짐작은, 반만 맞아떨어졌다.
테리브란의 황자는 후방의 병력을 소집했다. 그런데 그 후방이라는 것이 동부가 아니라 북부였다.
“티브리악?”
보고를 접한 군터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예. 바크렌의 3만 병력이 남하하고 있다고…….”
“여유가 있나?”
유게르 티브리악이 바크렌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음은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베이고르의 잔당도 잔당이지만, 전쟁 당시 피폐해진 땅을 복구하는 것은 몇 년 정도 부지런히 일한다 해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병력을? 그것도 3만씩이나?
“무리했군.”
“혹은, 무리를 시킨 것일 수도 있지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티브리악이 혼란스러운 바크렌으로 옮겨 가 여러모로 고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힘은 그럼에도 분명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실제로 그들은 바크렌으로 옮겨가기 전까지만 해도 중앙 조정에서 다른 고위 귀족들에 밀리지 않고 목소리를 냈었다. 그런 그들이니만큼, 비록 험지로 가서 고생하는 중이라 하나 그 저력만은 여전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사실은 테리브란의 황자도, 조정의 권력자들도 앍 있을 터.
“누구의 생각일까요?”
“글쎄. 그것이 중요할까.”
누구의 생각이건, 처음 그 생각을 입 밖에 낸 자가 누구건, 결국 다 같이 합의하고 내린 결정 아니겠나. 거기에 대고 티브리악에 대한 견제가 가혹하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총력전을 벌이는 와중에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을 테니까.
“저희는 언제까지 대기하게 될지 모르겠군요. 전하가 장군을 깊이 총애하시는 듯하여 마음은 가볍습니다만…….”
깊이 총애? 과연 그럴까. 군터는 내심 조소했다.
황자가 그를 불러들이지 않은 까닭은 총애하기 때문이 아니라, 함부로 불러들일 수가 없어서일 것이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이번에 바크렌에서 티브리악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것을 보고 확신하게 됐다.
‘뭔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해.’
일전에, 솔롬의 코앞까지 밀고 들어왔던 아바시스의 병력을 기억한다. 그들이 뭘 노리고 달랑 수천으로 공격해 들어왔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이 한 번 솔롬의 바로 앞까지 왔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떻게 수천이나 되는 병사를 그토록 은밀하게 운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그랬으면 두 번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후방의 위협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당장 맞붙고 있는 상대는 바라눔 트라소프지만, 사실 황좌를 놓고 경쟁하는 상대는 하나가 더 있다. 저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배신자 말이다.
그가 적국인 아바시스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이제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런 마당에, 아바시스의 병력이 북상했던 것이 과연 우연일까?
세력도 세력이고, 무엇보다 명분이 부족한 아말로페 트라소프의 입장에서 보면 경쟁자인 두 황자가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지금이 다시없을 기회일 터.
“탐마를 너 아래까지 풀어라.”
“더 아래라 하시면?”
“국경을 넘어도 좋다는 뜻이다.”
“…적이 다시 올라올 것이라 생각하시는군요.”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겠느냐.”
살라스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아주 희미하지만, 태연함을 가장한 얼굴에서 옅은 분노가 비치는 듯했다.
“방비를 더욱 철저히 하겠습니다.”
* * *
“뭐라고?”
가르비아의 동공이 가늘게 수축했다. 그는 자신의 외모가 인간 수하들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평소 표정 관리를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만큼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보고를 한 병사를 눈빛으로 닦달했다. 다시 한번 더 지껄여 보라고, 잘못 말한 것이 아니냐고.
“트, 트라카에서 군대가 움직였습니다. 그 수가 족히 2만은 되어 보였으며…….”
“…깃발은?”
“틀림없이 확인했습니다. 분명…줄카의 문장기였습니다.”
“하!”
아니기를 바랐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배신당했다. 가르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부득 갈았다. 그의 앞에 무릎 꿇은 병사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래. 그 병력이 남쪽으로 향했단 말이지?”
“예, 옛!”
“그래. 알겠다. 이만 물러가라.”
도망치듯 물러간 전령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가르비아는 생각에 잠겼다. 이 막사에 그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누구도 눈치 없이 그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는 조용히, 홀로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장군. 어찌할까요?”
충분히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이 되자, 그의 부관 로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평소 가르비아의 거침없는 행실에 대해 간간이 용감하게 지적을 가하던 그였지만, 이번만은 조심스럽게 가르비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남쪽으로 움직였다면…목표는 명확하지 않습니까.”
“나도 알아!”
짜증스럽게 외친 가르비아가 풀썩 주저앉았다. 물론 주저앉았다고 해도 똬리를 튼 자신의 꼬리 위에 몸을 기댄 것뿐이었다.
“제기랄. 그놈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군.”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린 듯하자, 네라드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줄카는 본래부터 다른 군주들과는 조금 다른 자입니다.”
“뭐라?”
“그는 유독 호전적이었지요. 황제의 명령 없이도 군대를 이끌고 나서는 유일한 자였습니다. 그가 군주가 된 것이 다른 자들에 비해 꽤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명이 더 크게 알려졌던 것은…….”
“어이, 샌님. 자네가 아는 것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나?”
가늘게 좁혀 뜬 뱀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네라드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잠깐 분위기에 휩쓸려버렸던 것일까? 눈앞의 나가가 그의 조부와 같은 세대의 인물이라는 것을 또 다시 잊고 말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