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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91화 (691/1,064)

691화

자이드라 멕시스도, 울타마란 소레딜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단지 그 둘만이었다면 조금 더 의견 충돌이 있었겠지만, 자이드라 멕시스에게는 사사건건 그의 말에 토를 달 마음이 가득한 적이 여럿 있었다.

“전하. 예정보다 이르기는 하지만, 바크렌의 군대를 부르심이 어떠할지.”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그 한 마디를 툭 던졌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같은 생각입니다’를 연발하니 대세는 삽시간에 기울었다. 자이드라 멕시스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울타마란 소레딜이 문제였다. 그의 주장은 곧 군부의 주장이나 다름없었고, 적을 얕보지 않고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그의 말은 군부 인사들의 귀에는 매우 타당하게 들렸다.

“전령을 보내라.”

대신들이 벌이는 논쟁, 혹은 회의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황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 반려되었음에도 태연한 기색인 자이드라 멕시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노련하군.’

울타마란 소레딜이라는 암초를 만나 뜻이 꺾였으니 속이 쓰릴 법도 한데, 표정만 봐서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상관없다는 건가.’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저 시커먼 속을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다.

자이드라 멕시스의 입장에서의 최선은, 아록과 리바스트라가 타격을 입고 적의 기세가 꺾이는 것이다. 정적의 세는 줄고, 그의 본거지인 타라냐드까지는 전화가 미치지 않는 선에서 전선이 구축되는 것이 그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상황.

‘지원이 더해져서 리바스트라가 받는 피해가 줄어든다고 해도, 그 역시 나쁘지 않겠지.’

적은 이미 아록과 리바스트라를 동시에 치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대단한 수준이다. 아무리 전력이 강하다고 해도, 3주를 한 번에 공략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한다고 해도 시늉 정도일 터.

‘이번엔 숙여주는 모습을 보였으니, 다음에는 조금 더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을 테고.’

분명 이런저런 여러 가지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저렇게 깔끔하게 물러나는 것이겠지. 황자는 그와 별로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타라냐드의 총독의 심계를 헤아리기가 어려움에 내심 조소했다.

‘예전부터 유명했지.’

그가 떠올린 예전은 고작해야 10년, 20년 전이 아니었다. 그보다 배는 더 되는 옛날. 아직 치기가 가시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자질이 있어도 재주를 보이기는 어려운 어린 나이. 그때부터 멕시스 가문의 후계자는 유명했다. 총독 가문이라고 해도 제국의 벽지인 북부 귀족 가문. 그곳의 자제가 재기가 있다고 해도 얼마나 소문이 나겠는가. 하지만 자이드라 멕시스는 예외적으로 유명했다. 단순히 재기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신동이라고 소문이 아주 자자하게 났던 것이다.

물론 제국 중앙의 유력 귀족 가문들은 그 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촌구석의 귀족 가문이 어떻게든 이름을 알려보려고 얄팍한 수를 쓴다고 생각했던 거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이들에게 돈까지 쥐어가며 후계자에 대한 좋은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유력 가문들이 심심찮게 하는 일이었으니, 멕시스 가문도 그런 것이라 여겼다. 도리어 그들은 촌구석이기는 해도 총독 가문이라는 곳이 그런 저급한 수를 쓴다며 비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감탄은커녕 비웃음만 샀던 소문의 주인공이 어린 나이에 가주 자리를 이어 총독이 되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수완을 발휘하여 가문을 부흥시키는 것을 보며 세인들의 조소는 언젠가부터 쏙 들어갔다. 그때에서야 그들은 예전에 들었던 소문이 마냥 지어낸 것은 아님을 깨달았고, 혼인적령기의 여식을 둔 귀족 가문들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다.

어린 나이에 총독의 자리에 올랐던 신동은 이제 노회한 정객이, 아니 괴물이 되었다. 속에 교활한 뱀을 몇 마리나 기르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흐음.’

그의 배경, 그가 지닌 힘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자이드라 멕시스라는 인간 자체가 품고 있는 불길함이 있다. 백 명의 적에게 둘러싸여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건만, 저 허약해 보이는 자 한 명에게 꺼림칙함을 느꼈다. 그것이 새삼 놀라우면서도 동시에 만족스러웠다.

‘고삐로서는 최상이지.’

그가 꺼림칙함을 느낄 정도다. 그렇다면 저 탐욕스러운 자들은 어떨까. 황자의 시선이 외숙 다이시리 제레이스와 다른 고위 귀족들을 향했다.

저마다의 비슷한 욕망에 들끓는 자들. 욕망에 충실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저들이 서로 다투는 대신 하나로 뭉쳐버렸다는 점이다. 모두가 자랑스러운 외가의 수완이었다. 그의 외조부는 말할 것도 없고, 외숙도 정치가로서의 역량이 탁월했다. 다행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유감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쳐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황도에서 빠져 나왔을 때, 그가 비빌 곳은 외가뿐이었다. 피를 나눈 가족 외에 망나니로 소문이 난 그를 지지해 줄 세력은 없었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대로, 외조부는 그를 지지해주었다. 그의 진면목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북부의 힘을 모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제레이스 가문이 지닌 힘이 일찍부터 북부 전역에 미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실수였을지도 모르지.’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해도 얻는 것 없이 손을 내밀어줄 리가 없다. 그는 외가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양보의 결과가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반 정도는 의도한 것이었지만, 반 정도는 손을 떠나서 어쩔 수 없이 흘러온 셈이다. 어쩌면 실수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실수가 없었다면 지금에까지 이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분발하도록. 그대의 역할이 크다.’

외가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귀족 세력이 못마땅하면 못마땅할수록, 그들에 맞서는 자이드라 멕시스와 그의 세력이 기특해 보였다.

‘정리를 끝내는 것이 최우선이지만, 아무래도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불합리한 괴물들의 시대를 끝낸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 생각, 그 각오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제 한 계단, 아니 두 계단만이 남은 상황이 되고 나니 자연스럽게 그 이후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됐다.

‘내 시대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겠지. 하지만…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저주받은 피가 몸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선황은 영생을, 아니 영생에 가까운 삶을 누렸으나 그에게 물려받은 것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니 그 힘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알 수 없다. 그보다 앞서간 숱한 형제들의 경우를 살펴보아도 그 수명이 제각각이라,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될지 가늠할 수가 없다. 다만 아직까지는 죽음을 느낄 수가 없기에, 남은 시간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되리라고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형제여. 너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겠지.’

어쩌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남은 시간이 다하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는 초조함.

‘우리는 황제가 되지 못할지언정, 왕으로 남을 수는 있다.’

불과 100년, 혹은 200년 전만 해도 하나의 주에서 왕을 칭하고 왕국을 칭하던 곳들이 수두룩했다. 지금도 그런 소국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 비하면 몇 개의 주를 다스리는 그들은 왕, 아니 대왕이라고 스스로 칭해도 부끄럽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제국의 황자로서, 제국을 분열시켰다는 오명을 짊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아니. 아니다.

‘증명하고 싶으니까.’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식에게 있어 그늘이다. 그 아래서 처음에는 안락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벗어나려 한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뛰어넘고 싶어 하는 것은 이처럼 당연한 이치.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지.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알아.’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제국 황실의 부정함. 그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는 오직 황제의 자식들만이 알고, 공감할 수 있다.

피할 수 없는 공포로만 여겼던 황제가 사라졌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고, 그저 다행스러웠지만, 시간이 가고 이성이 돌아올수록 다른 생각과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지워버리겠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흔적까지도.’

물론 후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전자만이라도 이루고 싶었다. 만인의 위에 서고 싶은 야심은 부차적인 것이다. 황제가 이룩한 모든 것 위에 새로운 것을 덮어씌움으로써, 지워지지 않는 두려움의 잔재를 걷어낸다.

‘내가 만들어낼 시대에, 당신들 같은 구시대의 괴물들이 설 자리는 없다.’

그는 지금도 황도에 머물고 있을 괴물을 떠올렸다. 지금 흘러가는 이 전쟁은 물론, 제국 내의 이런저런 굵직한 흐름에도 그 괴물의 손이 닿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가, 그 괴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유롭게 관망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대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요.’

다른 주제로 또다시 시작된 대신들의 언쟁을 눈에 담으면서도, 그는 다른 곳을 보았다.

* * *

둥! 둥! 둥!

전고의 울음소리에 맞춰 군대가 발을 움직였다.

시온 포트락은 그 선두에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중에도 그의 말은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좋구나.’

하늘은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함은 아니었으나, 점점이 흘러가는 구름이 오히려 더 보기 좋았다. 이런 날은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서 말을 달리면 딱일 텐데.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념이다. 그래서 길게 이어가지 못했던 걸까.

“장군.”

“음.”

그를 부르는 부관의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한적한 하늘과 대비되는, 부산스럽기 그지없는 지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적은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렇겠지. 준비하라고 그렇게 시간까지 줬는데,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시온 포트락은 멋쩍어하는 부관을 뒤로하고 전면의 성을 보았다.

제대로 준비를 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빼곡하게 튀어나와 있는 깃발이나, 어쩐지 바깥쪽 땅이 울퉁불퉁해 보이는 해자는 귀엽기까지 했다.

“못해도 2만은 되어 보이는군.”

“예. 들이쳐서 함락시키려고 하면 피해가 상당할 겁니다. 반면, 시일을 두고 고립시킨다면 낙승이겠군요.”

“물론 그럴 테지만, 저쪽도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가만히 놔두지는 않겠지.”

급한 대로 어떻게든 발을 묶어보겠다는 생각이 너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방어를 할 리가 없다.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를 앞에 두고서도 이기면 안 된다는 것이 참으로 고역이로군.’

못마땅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그렇다고 해도 어쩌랴. 전략은 정해졌으니, 일선의 장수로서 따를 수밖에.

“적당히 위협만 해라. 해가 지기 전에 군영을 꾸릴 것이다.”

“예.”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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