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화
“호들갑 떨지 마라. 기침이 조금 잦아진 것뿐이다.”
“침상에 누워계셔야 할 분이 찬바람을 맞고 계시니 몸이 상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그게 아비에게 할 말이더냐.”
“글쎄요. 자식 속을 썩이는 아버지에게는,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건방진 놈.”
보통의 귀족 부자에게서는 흔치 않은, 아니 거의 있을 수 없는 대화다. 하지만 포트락 가문의 부자에게 이런 대화는 익숙했다. 부친인 쥬드 포트락이 원체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들인 시온 포트락의 넉살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
개구쟁이처럼 웃던 시온 포트락이 슬며시 낯빛을 굳혔다.
“빈말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몸을 추스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하께서 부르시는데, 신하 된 자로서 어찌 따르지 않겠느냐.”
“핑계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그저 아버지의 바람을 마지못해 들어주셨을 뿐입니다.”
“…….”
“이번만큼은 전하가 원망스럽군요. 아버지께서 고집을 부리시는 만큼, 그분께서도 고집을 부려주셨다면…….”
“못하는 말이 없군. 그쯤 하거라.”
“죄송합니다.”
말로는 죄송하다 하지만, 기색이나 말투는 전혀 죄송한 것 같지 않았다. 쥬드 포트락은 젊었을 적의 그와 닮은 아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침상에 누워 얼마간 더 앓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느냐.”
“하지만.”
“평생 명예와 영광을 좇았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전쟁에서, 나는 모든 것을 얻었지. 처음에는 가문을 부흥시키겠다는 사명감으로 뛰어든 곳이었으나, 나는 점점 그곳에 내 운명이 있음을 확신했다.”
무언가를 이룩한 자들이 그 찬란한 과거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쥬드 포트락은, 적어도 그 아들인 시온 포트락에게는 단 한 번도 영광스러웠던 과거에 대해 직접 집에 담은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과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현세대 제국의 그 누구보다도 눈부신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
그런데 이제 와 그 찬란했던 과거를 이야기하는 부친이, 시온 포트락의 눈에는 더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것을 느낀 순간,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그 옛날 제국의 영웅이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새삼스럽게도 말이다.
“그때. 내 몸에 저주가 파고드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나의 운명도 끝이 났음을 직감했다. 억지로 버틴다고 해도 결코 전과 같을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지.”
그의 운명이 비틀린 그 순간을 이야기하면서도 쥬드 포트락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그는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마지막 기회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늙은 병자로서 죽어가는 대신, 젊었을 적 그랬던 것처럼 전장의 장수로서 죽을 수 있는 기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죽을 곳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발버둥 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쥬드 포트락은 그 반대였다. 그는 오히려 죽을 곳을 찾아왔다. 누군가는 그를 보며 전쟁영웅답다며 찬사를 보낼지 모른다. 만약 그들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면, 시온 포트락은 분명 그들의 입을 찢어놓았을 것이다.
“종종, 아버지께서 쥬드 포트락이 아니시기를 바랐습니다.”
“…….”
“세상에서는 아버지를 일컬어 영웅이라 부르지요. 저 또한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버지의 업적에 더 크게 감탄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그 생각이 바뀐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차라리 영웅이 아닌 범부이기를 바랐다. 적당히 잇속을 챙기고, 보신에 힘쓰면서 대의니 뭐니 하는 것보다는 일신의 안위와 이득에 눈 돌리기를 바랐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쇠약해진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세상은 높게 선 자의 머리끝만 보고 감탄한다. 그 누구도, 그가 무엇을 밟고 올라 서 있는지는 보지 않는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네게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비로서 부족한 점이 많았으니.”
“부족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제 그릇이 아버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담기엔 너무 부족했을 뿐이지요.”
쥬드 포트락은 눈을 감았다.
차라리 원망했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담담하게 부정하는 아들의 목소리는, 지금의 그를 닮아 있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어쩌면 나는 그저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늙은이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럴지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쥬드 포트락은 바람에 흔들리는 막사의 입구 너머로 저물어가는 하늘을 눈에 담았다.
* * *
전쟁이 발발한 이후, 하루도 조용할 때가 없었던 테리브란의 조정은 오늘도 마찬가지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침내 적이 리바스트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적의 규모는 최소 5만 이상.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 중에는… 청기가 있다고 합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오늘 새벽 당도한 전령의 보고를 읊었다. 리바스트라에 적이 나타났다는 대목까지는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였으나, 청기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몇몇 이들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주 쏠쏠하게 써먹는군. 이번에도 기만인가?”
“확실치 않습니다. 보인 것은 청기일 뿐, 쥬드 포트락이 아닙니다.”
7황자, 자콥 트라소프가 턱을 쓸었다. 그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이렇게 효과가 좋은데, 굳이 먼저 포기할 이유가 없지.”
쥬드 포트락이라는 이름 하나에 이렇게 소란이 인다. 그가 어디에 있건 중요하지 않다. 그가 그곳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군의 운용에 차질이 생긴다. 못마땅하지만, 제국 최고의 무장이 갖는 존재감은 어쩔 수 없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 바라눔에게 단단히 감명이라도 받은 모양이군.’
귀족들에게 있어 그들 가문의 깃발이 자부심이라면, 장수에게 그의 깃발은 그마저도 넘어 또 다른 자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깃발을 함부로 돌린다는 것도 파격적인데, 그것이 청기라는 것은 파격을 넘어 충격이었다.
물론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전장에 나선 장수가 추구해야 할 제일의 목표라지만, 변수가 가득한 전장에서 활약하는 장수들은 생각보다 고지식한 경우가 많았다. 더 정확하게는, 특정 부분에서 말이다.
자신의 깃발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들은 깃발을 자신의 얼굴이라고 여기며, 깃발이 상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는 것처럼 여겼다. 여기서 상한다는 것은 전투 중에 화살에 찢긴다거나, 기수가 죽어 깃발이 땅에 처박히는 것 등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전장을 떠나있더니, 융통성이라도 생긴 건가.’
그는 쥬드 포트락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쥬드 포트락은 청포장군이면서도 황도에 있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그가 있는 곳은 항상 전장이거나, 전장에 가깝거나, 전장이 될 가능성이 큰 곳이었다. 그는 마치 짐승이 고기를 쫓듯, 전쟁을 쫓아다녔다.
그나마 기억나는 모습은, 그가 두 번째로 황궁에 들었을 때의 모습이었다. 황제가 직접 치하하기 위해 그를 소환했을 때, 아주 잠깐 그를 볼 기회가 있었다.
‘전형적인 무장이었지.’
눈부신 전공을 숱하게 세운 무장답지 않게 체구는 평범했다. 얼굴에 제법 큼직한 흉터가 두어 개 정도 있었지만, 그 정도야 일선의 장수들이라면 제법 흔히 가지고 있는 것이었고.
다만 인상적이었던 것은 분위기였다. 흡사 잔뜩 흥분한 말을 억지로 묶어둔 듯한 느낌. 흥분한 말이 언제든지 줄을 끊고 뛰쳐나갈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는 막 군문에 들어선 야심 큰 장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런 분위기가 신참 장교가 아니라 위장으로서 제국의 손꼽히는 장군이 된 자에게서 풍긴다는 것이었다. 그건 마치 백발의 노인에게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이는 것과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이질적이었다.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지.’
공이나 권세를 탐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 아주 잠깐, 스치듯 보았을 뿐이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살핀 것만으로도 그가 흔히 볼 수 있는, 권력욕에 가득 찬 귀족들과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때도 이미 그 젊은 나이에 제국 최고의 무장으로 손꼽혔었다. 그로부터 꽤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의 무명에도 다소 먼지가 앉았지만… 그럼에도 그 존재감만은 여전했다. 만약 그가 직접 군을 이끌고 움직인다면 어중간한 전력으로는 대응하기 힘들 터.
“리바스트라에는 이미 7만 군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설령 정말 쥬드 포트락이 움직였다고 해도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자이드라 멕시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낙관론을 내놓았다. 설득력이 없는 말은 아니었다. 적의 정확한 수를 알아내지 못해 5만 이상이라고 뭉뚱그려 보고가 올라왔지만, 오차를 고려한다고 해도 최대 6만가량일 터. 그렇다면 대기중인 7만으로 막지 못할 것은 없다. 만약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면 추가로 징집을 할 수도 있을 테고.
“위험한 낙관입니다.”
자이드라 멕시스의 꽤 설득력 있는 의견에 반기를 든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자이드라 멕시스도 자신의 말을 대놓고 반박한 인사를 보고는 조용히 눈을 빛냈다.
그는 내심 그의 정적인 제레이스나, 다른 고위 귀족들이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카랑카랑하게 목소리를 높인 것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장군이었다.
‘울타마란 소레딜.’
흑포를 지닌 위장이기는 하나, 이미 일선에서 물러나 사실상 은퇴한 자였다. 그러나 군부 내에서의 명망은 아직 건재해서, 현 조정에서도 군사에 관해 그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전쟁에서 머릿수는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일례로, 지금 이야기가 나온 쥬드 포트락 장군은 소싯적에 단 2만 군사로 적의 10만 대군을 격파한 적이 있지요. 단순히 회전에서 승리한 것뿐만이 아니라, 기세를 몰아 그대로 왕성까지 진격하여 왕의 무릎을 꿇리기까지 했습니다.”
울타마란 소레딜이 나선 것은 분명 의외였지만, 자이드라 멕시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상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입을 열었다.
“장군의 말이 옳소. 쥬드 포트락이 역전의 용장인 것도 알고 있지. 하지만 방금 장군의 이야기는 현 상황과 맞지 않는 것 같소.”
“어째서 맞지 않습니까?”
“장군이 말한 10만 대군은 메어피트의 군대였소. 산지에 틀어박혀 외부와 단절된 채 자신들만의 작은 세상에 안주하던 소국이지. 그들의 10만 군대라고 해봐야 제대로 된 실전경험을 겪은 적도 없고, 말 그대로 머릿수만 억지로 채워놓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지 않았겠소? 내 적장의 역량을 낮춰보고 싶지는 않지만, 당시 그가 거둔 승리는 어찌 보면 크게 이상할 것 없는 것이었소. 반면 지금 리바스트라에 있는 7만 군대는 메어피트의 잡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 물론 정면으로 맞선다면 위험이 있겠으나, 내어줄 것은 내어주면서 지키고 버티는 데 집중한다면 제아무리 쥬드 포트락이라고 해도 쉽게 공략하지는 못할 거요.”
“옳은 말씀입니다. 마지막에 하신 말씀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음?”
사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이 정도에서 울타마란 소레딜이 발을 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를 바라보는 상대의 눈은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저는 그를, 쥬드 포트락을 압니다. 그가 이끄는 군대가 얼마나 강한지, 직접 옆에서 보았지요. 총독께서 말씀하신 대로 리바스트라의 병력은 메어피트의 군대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쥬드 포트락이 이끄는 5만이라면 리바스트라에 있는 병력만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