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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89화 (689/1,064)

689화

“엔테로스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1차 방어선이 무너졌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음.”

하브람 카리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탁자 위에 놓인 지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한동안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지도가 전부인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그가 입을 연 것은 밖에서 불어온 바람에 등불이 위태롭게 흔들릴 즈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겠나. 병력을 더 투입해야 할까, 아니면 방어선을 뒤로 물리고 전력을 집중해야 할까.”

“적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 있습니다. 이럴 때는 맞부딪치는 것보다는 시간을 끌면서 기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무장, 모렐 자바예는 이런 말이 상관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임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말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상관은, 단순히 심기에 거슬리는 말을 한다는 이유로 수하에게 불이익을 주는 속 좁은 이가 아니었다. 또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정말이지, 비참한 심정이군.”

“각하. 면목 없습니다. 소장들이 부족한 탓에…….”

모렐 자바예를 비롯한 무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에 하브람 카리아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자네들의 능력이야 내가 잘 알지. 자네들은 어딜 가더라도 인재라고 불릴 수 있는 자들이네. 다만 이번엔 상대가 나빴을 뿐이야. 또한, 우리의 준비도 생각했던 것만큼 충분하지는 못했고.”

“송구하오나, 아직 낙담하시기에는 이릅니다. 기세를 타는 것은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한 무장이 상관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하브람 카리아의 입가에 마른 웃음이 떠올랐다.

“스스로의 취한 적이 실수하기를 기다리자는 말인가? 좋은 말이지만, 너무 낙관적인 것이 아닌가? 바라눔 트라소프는 그리 만만한 자가 아니야. 더군다나, 저쪽에는 그 쥬드 포트락이 있지.”

“…….”

안 그래도 조용하던 장내가 아예 정적에 휩싸였다.

쥬드 포트락. 사실상 명예직을 제외하고, 제국에서 무장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다. 그의 명성은 제국 전역에 널리 퍼져 있어, 이 자리에 있는 이들도 모두 그의 무용담을 하나 이상은 들어 알고 있을 정도였다.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자의 이름 하나가 주는 무게감이 이토록 무거울 수 있을 줄이야. 하브람 카리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 정도는 되니까 그의 깃발 하나로 그런 속임수를 쓸 수 있었던 것이겠지.’

참 간단하고 단순한 수였다. 하지만 거기에 홀랑 넘어가 버린 것이 이쪽이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간단하든 복잡하든, 적을 속일 수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책략일 터.

‘아직도 덜어내지 못했는가.’

쥬드 포트락이라는 이름값에 짓눌려버린 것이 문제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을 나무랄 수도 없는 것이, 당장 하브람 카리아 자신조차도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다. 이래서야 당장 내일 아침에 쥬드 포트락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라도 전해지면, 지금도 잘 안 굴러가는 머리들이 새하얗게 변해버릴지도 모르지 않나.

“쥬드 포트락이라. 그 이름을 들으니, 한 가지 이야기가 떠오르는군.”

“예? 이야기라시면…….”

심각한 주제가 오가는 중에 뜬금없이 화제를 돌리자 무장들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듣자 하니, 그자의 몸 상태가 썩 좋지 못한 모양이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꽤 오래됐네. 10년도 더 된 이야기지. 쥬드 포트락이 치펠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에 부상을 입었는데,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치유가 되지 않아 그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는 이야기였어.”

“음.”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원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들을 주제로는 온갖 낭설이 돌기 마련이다. 하물며 치펠의 반란이라면 정말 십 년도 훌쩍 넘어, 거의 이십 년 전에 가까웠다. 설령 그가 정말 그때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그 부상이라는 것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자체보다는, 하브람 카리아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냈는지가 궁금해졌다. 설마 쥬드 포트락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만약 그런 것이라면, 수단이 너무 저급하지 않은가.

그들이 그런 생각을 슬슬 하기 시작할 즈음, 하브람 칼라일이 피식 웃었다.

“자네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나 싶겠지.”

“아닙니다. 어찌 저희가…….”

“나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네.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을 즈음에는 그때 내게 그 소리를 한 자를 그 자리에서 따끔하게 벌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 허나…….”

하브람 카리아의 화법은 듣는 이들의 속을 자유자재로 들었다 놓았다. 그는 능숙하게, 단번에 장내 모든 이들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이상하게도 말이네. 그 이후로 그의 활동이 점점 줄어들더군.”

“예?”

“생각해보게. 청포를 하사받은 이들이 어떤 자들인가? 명실상부한, 실질적인 아국의 최고 전력이 아닌가. 물론 보검을 아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쥬드 포트락은 그런 경우가 될 수 없는 자야. 쥬드 포트락이 어떤 자인지,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제국인이라면, 백번 양보해서 군부에 몸담은 자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쥬드 포트락은,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영웅이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이들이라면, 특히 군인이라면 아무리 가문의 후광에 기대어 올라온 이들이라도 저마다 그럴듯한 무용담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무용담을 한두 개가 아니라 십수 개를 지녔더라도, 영웅이라는 칭호는 쉽게 붙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쥬드 포트락은, 그의 이름을 아는 자들에 의해 기꺼이 영웅이라 불린다.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그가 쌓은 공적이, 그의 무용담이 그만큼 찬란히 빛나기 때문이다.

그의 가문, 포트락 가문은 장군가였다. 그의 부친은 황제의 전포를 하사받지 못하였으나, 그의 조부는 자그마치 녹포를 두르고 전장을 누볐다. 때문에 그가 젊은 나이로 전장에 나가 적장의 수급을 취했을 때, 세인들은 그가 조부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큰 착각이었다.

그는 조부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을 넘어, 그보다 한참을 앞서갔다.

처음 전장에 나섰을 때 그의 나이가 스물하나. 제국 전역을 누비며 열 번의 전쟁을 치르고, 제1공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을 때 그의 나이가 서른둘이었다.

그는 패배를 몰랐고, 물러섬을 몰랐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하는 상황에도 홀로 앞으로 나섰고, 끝내 승리했다.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웠고, 누구보다 지혜롭게 대처했다. 정복전쟁을 멈춘 뒤로 황궁에 칩거하다시피 하던 황제가 직접 그를 불러 치하한 것이 세 번이었다. 그전까지는 누구도, 심지어 당시 그보다 윗줄이었던 다른 위장들조차도 누리지 못한 영광이요 명예였다.

누군가는 그의 위용을 보며 군주를 보는 듯하다고 했다. 모든 이들이 그를 영웅이라 불렀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불린 것이 그의 나이 서른둘 때였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그때의 그는 마치 전쟁에 중독된 자 같았어. 그런데 그런 자가 어느 순간부터 전투에 흥미를 잃은 것처럼 시들시들해졌지. 혹자는 더 올라갈 수 없게 되자 야망을 잃었다고 하지만, 글쎄. 난 그가 단순히 출세욕 때문에 그리 열성적으로 전장을 찾아다녔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으음. 허면 각하께서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는 거로군요. 그리고 그 이유는…….”

“의심은 하고 있었으나, 확신하지는 못했지. 하지만 이번 일을 보니, 그 의심이 더 커지는군. 자신의 깃발을 속임수에 쓴 것이야 뭐,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까지 그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 영 이상하단 말이지.”

하브람 카리아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분위기는 묘하게 달라졌다.

누구보다 빠르게 그것을 알아차린 하브람 카리아는 내심 미소지으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무튼, 쥬드 포트락이 전과 달라진 것은 분명해 보이는군. 왕녀의 그였다면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바로 군대를 이끌고 모습을 보였을 텐데, 그러지 않고 꼭꼭 숨어있으니 말이야.”

이 정도로 쥬드 포트락의 그늘을 다 지워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의심을 심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의심이라는 놈은 그것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는 한, 구르는 눈처럼 점점 크기를 키우는 법이다. 그리고 그 의심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커졌을 때는, 이미 진위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설령 그때 가서 쥬드 포트락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도 마찬가지다. 그때가 되면 생각하는 대로, 의심하는 대로 보게 될 것이니, 이름 하나에 벌벌 떠는 일은 없게 될 터.

‘그거면 충분하지.’

하브람 카리아는 조그맣게 웅성거리는 수하들을 은밀히 둘러보며, 다 식어버린 차로 목을 축였다.

* * *

“쿨럭!”

“아버지.”

“됐다.”

사내, 쥬드 포트락은 가까이 다가오려는 아들을 멈춰 세웠다. 입을 가린 손수건에 거뭇한 피가 묻은 것을 확인한 그는 재빨리 손수건을 접어 품에 넣었다.

“그래. 그새를 못 참고 또 일을 저질렀더냐.”

“일을 저지르다니요. 전공을 세우고 온 아들에게 너무 박하신 것 아닙니까?”

“그깟 자그마한 성 하나쯤, 언제 떨어뜨려도 문제가 아니었다. 몸도 성치 않은 녀석이 굳이 그런 곳에서 난리를 치다니.”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합니다만, 그게 아버지께서 하실 소리입니까?”

“못된 놈. 한 마디도 안 지려 드는구나.”

“그렇게 가르치신 분이 계셨기 때문이지요.”

쥬드 포트락이 기가 차 허허 웃었다. 그의 시선이 막사 입구 쪽에 놓인 방패와 창 쪽으로, 정확히는 크게 흠집이 난 원형 방패 쪽으로 향했다.

“쉽게 상할 물건이 아닐 터인데. 방심이라도 했느냐?”

“방심……. 예. 방심이라면 방심이지요.”

사내, 시온 포트락이 쓴웃음을 지었다.

“실력에 상관없이, 죽음을 각오한 적은 강하다는 것을 잠깐 잊고 말았습니다.”

“쯧. 긁힌 것이 방패라서 다행이구나.”

“예. 이번에 다시 배웠으니, 적어도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잊지 말아야지요.”

“말은 잘하는구나.”

말로는 못마땅하다는 듯 툴툴댔지만, 아들을 바라보는 쥬드 포트락의 눈은 부드러웠다.

항상 부족한 점이 보이지만, 그래도 늘 정진하는 아들은 그의 자랑거리였다. 본래 이번 전쟁에서도 크게 활약하리라 믿었지만, 불운하게도 전쟁 직전에 크게 병을 앓고 말았다.

“몸은 좀 어떠냐.”

“이제는 견딜만합니다. 처음 앓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다 나은 것이나 다름없지요.”

“무리는 하지 말거라. 이 아비처럼 되고 싶지 않거든.”

거기까지 말했을 때 또 기침이 올라와, 황급히 품에 넣은 손수건을 다시 꺼냈다. 하지만 이번엔 거뭇한 피가 손수건 밖으로까지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버지!”

손수건을 적신 피를 보자 시온 포트락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다. 그가 황급히 부친에게 달려갔다. 이번엔 쥬드 포트락이 멈춰 세울 틈도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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