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8화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연구를 마쳤다. 모페이브는 긴 한숨에 그간의 고생을 털어냈다.
“수고했네. 당분간은 푹 쉬시게.”
“제가 한 것이 뭐가 있다고……. 모페이브님께서 다 하신 일을 조금 거들었을 뿐입니다.”
나짐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자, 모페이브가 헛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보주의 연구는 모페이브가 거의 다 진행했고, 나짐은 옆에서 거드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의 보조가 없었다면 연구를 끝마치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1년, 어쩌면 그 이상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내 앞에서까지 그렇게 스스로를 낮출 필요는 없네.”
연구를 하는 동안 둘은 거의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 누구의 참견이나 간섭도 없이, 둘은 순수하게 연구자가 되어 서로의 의견을 구하고 미지를 탐구했다.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술사로서, 학자로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느 정도 거리감이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무너지기에도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하.”
그 증거로, 항상 조금 굳어있던 나짐은 이제 옅게나마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모페이브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파악이 끝난 것이다.
‘경계하지 않아도 될 자다.’
사령술사라는 이유로, 혹은 재주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그를 경계하지 않을 사람이다.
욕심이 적고, 술사로서의 순수한 탐구욕만이 있는 성실한 사내. 그것이 나짐이 본 모페이브였다. 그의 앞에서라면 과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겠으나…이 정도는 괜찮다.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장군께서 사령술에 조예가 있으시다는 것은 알았습니다만, 그렇게 간단히 제어하실 줄이야.”
“장군은 우리 같은 범인의 기준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분이네. 자네도 그분을 오래 뵙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야.”
이미 알고 있다. 그가 범인을 뛰어넘은, 초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았다. 처음부터 엄렴풋이 짐작하기도 했고.
‘그는 신인이다. 아마도 군주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보통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여기서 말하는 보통 사람이란, 세간에서 말하는 호걸이니 현인이니 하는 자들을 다 포함한 것이다. 나름 재주로, 혹은 다른 무언가로 명성을 얻은 자들까지 다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군터 크렘보르와 비교하면, 그들은 모두 평범하게만 느껴졌다. 그만큼 그는 달랐다. 단순히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무언가가.
저주를 품은 보주를 가볍게 제어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만으로 확신한 것은 아니다. 모페이브와 함께 연구를 진행하면서, 솔롬에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본 결과였다.
‘내 예상이 맞았어.’
지레짐작이 아니다. 처음부터 예상했기에, 가능성을 보았기에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런 벽지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사령술사라고는 해도, 실력이 출중한 그는 하다못해 주도 귀족가의 의뢰를 받으면서라도 밥벌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으니까.
‘신인. 신인이라…….’
가슴이 뛰었다. 그는 흥분한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표정 관리에 힘써야 했다. 모페이브가 딱히 눈썰미가 좋은 자는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이제는 지켜보면 될 일이다.’
차분해져야 한다. 이제야 조금씩 신뢰를 얻고 있는데, 괜히 의심을 살 필요는 없다.
시간이 답이다. 다만 걸리는 것은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아니 서쪽의 먼 곳에서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 전쟁 정도.
‘크렘보르 장군 정도 되는 인재를 황자가 가만히 놀려 둘 리는 없지. 때가 되면 필시 호출할 것인데…….’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후회가 됐다.
더 일찍, 더 먼저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어쩌면 지금쯤은…….
‘쯧. 쓸데없이.’
아무 소용없는 후회는 접어두고, 당분간은 즐기기로 했다.
사령술사이기 전에, 그 역시 술사였다. 그간의 연구는 그에게도 꽤 흥미로운 것이었고, 연구를 마친 뒤의 성취감 역시 상당했다. 이는 술사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니, 앞으로의 일이야 어떻든 당장은 이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 * *
와아아아―!
그리 크지 않은 요새에 광풍이 몰아쳤다. 우렁찬 함성과 찢어지는 비명이 얽히고설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버텨라! 적의 기세는 오래가지 못해! 곧 제풀에 지쳐 물러날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조금만 더!”
젊은 장교는 목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내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방금 화살 한 대가 그의 투구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처음 화살이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을 때 기겁했던 것과는 전혀 달라진 반응이었는데,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탓이었다. 그는 이제 이곳에서 죽고 사는 것은 어떻게 몸을 사리느냐가 아니라 온전히 운에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포기를 하고 나니 남는 것은 악밖에 없었다.
“사다리를 밀어라! 사다리를 밀어!”
말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는 몇 번 고함을 지르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직접 방패를 들고 뛰쳐나갔다. 뒤에서 부관이 소리치는 것도 같았지만 뭐라고 하는지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끄응!”
한 손으로 방패를 들어 머리 쪽을 가리고 손과 어깨를 붙이다시피 하여 사다리를 밀었다. 주변의 병사들이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가 그의 화려한 갑옷을 보고서야 다급히 따라서 사다리를 밀었다.
슈슈슝!
본인의 숨소리와 사다리의 삐걱대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와중, 날카로운 파공음에 귀가 열린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숙여!”
그 소리가 들린 순간, 그는 있는 힘껏 외치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머리를 가린 방패를 가리지 않은 것은 지난 5년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의 증명이었다. 머리가 아닌 몸이 저절로 그렇게 반응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살렸다.
투투퉁!
방패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그는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직감적으로, 그는 방패가 깨지거나 팔이 내려가는 순간 자신의 명줄이 끊기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감각이 마비된 팔에 애원하며 끝까지 버텼다.
“허억…허억…….”
화살 비가 그쳤다. 흉측한 몰골이 된 방패가 너무나 무거워 저절로 팔이 떨어졌다. 그의 몸도 덩달아 균형을 잃고 널브러졌다.
쿵! 쿵!
그러나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었을까. 갑작스레 몸이 흔들렸다. 정확히는 몸을 누인 성벽이 흔들린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 묵직한 소리. 흔들리는 성벽. 답은 하나뿐이었으니.
“뭘 하는 거냐 이 머저리 자식들! 당장 쏴!”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벌떡 일어난 그가 성문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공성추를 보며 목에 핏대를 올렸다.
* * *
“영 지지부진하군.”
“저쪽도 필사적입니다.”
“흐음.”
그거야 굳이 듣지 않아도 눈만 제대로 달려 있으면 알 수 있다.
조금 전에 방패 하나만 덜렁 들고 사다리를 밀어내던 적 장교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적이라고 해도 그 용맹을 칭찬해줄 법했는데, 문제는 저런 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저런 하급 장교들까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분전하고 있으니, 저 자그마한 요새 하나를 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나.
“병력을 더 밀어 넣어.”
“괜찮겠습니까?”
지금도 팽팽하다. 여기서 병력을 더 밀어 넣는다면 성벽이야 넘을 수 있겠지만, 피해가 더 커질 터. 그러면 오늘은 넘기더라도, 앞으로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들이 치러야 할 싸움은 끝도 없이 남아있었으니.
“내가 이끌지.”
“장군. 허나 보름 전의 전투에서 입으신 부상이…….”
“괜찮다. 아직 몸이 편치는 않아도, 저 자그마한 성벽 하나 넘는 것은 문제없으니.”
그는 부관의 우려에 가벼운 웃음으로 답하고 고삐를 쥐었다.
* * *
“허억! 허억!”
공성추가 멈췄다. 있는 대로 쏟아부은 불화살과 기름, 돌덩이 덕분이었다. 그는 활활 타고 있는 공성추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머리를 흔들었다.
“으으.”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몸뚱이가 삐걱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실 전에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는 게 아니었다. 안다고 착각했을 뿐.
‘대체 언제까지 밀어붙일 셈이냐.’
성벽 아래,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적군을 노려보았다.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요새 안에 있는 아군 병력과 비교해서 말이다. 물론 적의 수가 더 많지만, 성벽을 끼고 싸운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었다,`
‘보통 놈들이 아니다.’
직접 싸우고 나서야 알았다. 능숙하고 빠르게 성벽에 달라붙는 움직임 하며, 쏟아붓는 공격에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는 것이 실전을 여러 번 경험해본 정예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으윽!”
허벅지에, 언제 박혔는지도 모를 화살을 뽑아냈다. 다행히 깊게 박힌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순간적으로 몸이 후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알레드! 알레드!”
다 쉰 목소리를 최대한 짜내서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짜증스러운 표정을 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곧 익숙한 모습의 사내가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평소 그에게 지겹도록 잔소리를 해대던 부관이 맞았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는데, 한쪽 눈에 화살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한숨을 쉰 그가 식어가는 부관의 몸뚱이를 조심스럽게 누였다.
‘자네 벌 받은 거야.’
그렇게 잔소리를 해댔었다. 그 잔소리 때문에 짜증이 치밀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심지어 면전에서 욕지거리를 대차게 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맹세컨대, 이렇게 되기를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와아아아―!
성벽 아래서 달갑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좀 잠잠해지는가 싶었는데, 처음 몰려들 때보다 더 우렁찬 함성이라니.
무슨 일인지는 짐작도 안 되지만, 이쪽에 안 좋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먼저 가 있게. 곧 따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부관의 굳어버린 손을 억지로 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빼앗아 들었다. 본인의 검은 조금 전에 방패를 들고 달려갈 때 잃어버린 것이다.
“막아! 막……!”
잠깐 몸을 돌리고 있던 사이, 대차게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동료 장교들의 거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다급하게 들려왔다.
“그래. 이번엔 또 뭐냐.”
우연이었을까. 지독한 불운이었을까.
그가 몸을 돌린 바로 그 순간, 언제 걸쳐졌는지도 모를 사다리를 타고 한 사내가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의 모습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떤 적과도 달랐다. 무장부터 시작해서, 어딘가 여유로워 보이는 분위기까지.
“오. 너로군.”
희한한 일이다. 분명 모르는 자일 텐데, 그자는 마치 자신을 아는 듯 굴었다.
“용맹하더군. 약간이지만 감명받았어.”
칭찬일 것인데 전혀 달갑지 않았다.
왜일까. 몸이 떨렸다. 성벽 위에서 쓰기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창이, 어떻게 들고 왔는지 모를 큼지막한 원형 방패가, 모두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빌어먹을. 진짜 따라갈 생각은 없었는데.’
적이 한 걸음 움직인다 싶은 순간, 한 줄기 빛이 번뜩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