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7화
전쟁은 아록의 외각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 소식은 멀리 떨어진 솔롬에도 전해지고 있었다. 물론 족히 한 달은 된 소식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살라스가 의외라는 듯 살짝 눈을 좁혀 뜨며 말했다.
“당초 예상과는 다르군.”
“예. 그간 들어온 카리아의 행적을 보면…적당히 몸을 사리면서 상대할 줄 알았습니다만. 그렇게 안일하게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의 공세가 맹렬했던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
두 황자 진영의 운명을 건 결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군터는 솔직히 전쟁이 어찌 돌아가는지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일까? 아니면.
“바라눔 트라소프가 직접 군을 이끌고 나왔다고 합니다. 루람이 하루도 되지 않아 무너졌다고 하니…….”
“루람?”
“아록 서부에 있는 군사 요새입니다. 성벽이 높고 튼튼한 데다, 입지까지 훌륭하여 아록의 서쪽 장벽이라는 별칭까지 붙었다는군요.”
장벽이 하루 만에 무너졌으면 아록의 전력도 볼만한 수준인 것 같았다. 물론, 상대가 안 좋았을 수도 있고.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하브람 카리아로가 전력으로 맞설 것을 선언하며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고 합니다. 수비적으로만 일관하지는 않겠다는 걸까요.”
“웅크리고 있으면 손도 뻗지 못하고 공격당할 뿐이다. 싸움다운 싸움을 하려면 어느 정도는 이빨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
하지만 군터가 알기로, 하브람 카리아로는 군문의 경험이 없었다. 아무리 상징성이 있다지만,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는 것은…….
“내부 단속…이 아니겠습니까?”
군터는 살라스의 추측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크다. 외부의 강대한 세력이 들이닥쳤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외적에 맞서 싸우는 것이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내부 단속이다. 밖에서 흔들고 안에서 흔들리면 제아무리 튼튼한 집도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니.
“조정에서는 본래 보내기로 했던 원군을 예정보다 빠르게 급파하고, 추가로 병력을 모으고 있다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전에 들었던 대로입니다. 조정에서는 어떻게든 아록과 리바스트라에서 적을 멈춰 세울 계획인 것 같군요.”
“리바스트라는 아직 잠잠한가?”
“예. 아직까지는.”
바라눔 트라소프가 아록에 모습을 드러냈다. 듣자 하니 병력도 10만 이상이라는데, 그 정도면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할 터.
“리바스트라까지 번질 것 같으냐?”
“장군의 말씀은…….”
“아록에 동원한 전력만 놓고 봐도 상당한 수준이다. 동시에 리바스트라까지 친다면…글쎄. 아무리 놈들이 준비를 잘했더라도 무리가 아닐까 싶은데.”
“양쪽 모두, 운명을 건 총력전이 아닙니까. 게다가 일찍이 보고 되었던 청기의 오만 병력도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아직까지 확인이 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 우회하여 리바스트라로 향할 수도 있겠지요. 어찌 되었든 저들의 입장에서는 전장을 넓히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어중간한 전력이라면 힘을 집중해서 치고 들어가는 것이 좋겠지만, 전력이 충분하고 단기전으로 승부를 낼 수 없다면 넓게 압박해 들어가는 것이 좋다. 당연히 저쪽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테니, 아록에만 전력을 쏟아붓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고…….
‘하지만 이상하군.’
굳이 말하자면 감이지만, 그래도 나름의 판단이 섞여 있다. 우선 첫째는 바라눔 트라소프가 자그마치 10만 이상의 대병력을 이끌고 한 번에 들이닥쳤다는 점.
‘그만한 병력이 움직이는 것을 사전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부터가 문제긴 하지만, 뭐…그만큼 공을 들였다고 봐야겠지.’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무척이나 은밀하게 군을 이동시켰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무엇보다 보란 듯이 청기를 휘날리며 움직인 오만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보란 듯이.’
제국의 위장 서열 중 가장 꼭대기에 자리한 푸른 깃발. 5만이라는 숫자도 숫자지만, 바로 그 깃발 때문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다른 쪽의 경계를 다소 허술하게 한 것이고.
‘그것이 시선을 돌리기 위한 미끼였다면, 그 5만 군대는 어떨까. 정병일까?’
문득 드는 생각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5만이나 되는 정병이라면 그만한 전력을 허비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머릿수와 푸른 깃발뿐이니, 굳이 그 머릿수를 정병으로 채워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막말로 농부들을 잠시 징집하여 대충 무장만 시킨 채 깃발을 들게 하면 그만인 것을.
‘뭐, 모를 일이지.’
군터는 자신을 잘 알았다. 나가서 싸우는 것은 자신 있어도, 직접 머리를 쓰면서 상대의 수를 헤아리는 데는 별로 재주가 없었다. 전장에서의 즉각적인 판단이라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머리만 굴리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이었다. 즉.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다른 녀석들도 생각할 수 있다는 거지.’
속임수일까? 아니면 그런 의심을 예측하고 한 번 더 꼬아놓은 속임수의 속임수일까. 답은 하나지만 답까지 향하는 과정은 너무나 복잡해서, 그런 것을 하나하나 의심하고 판단하는 것은 무척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알아서 하겠지.’
상술했듯, 군터는 아록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물론 늦든 빠르든, 결국 그도 그곳으로 가게 되겠지만…그건 그때의 일.
지금 그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얼마 전에 손에 넣은 재미있는 보물이었다.
“장군. 말씀하셨던 죄수들이 준비되었습니다.”
“음.”
“오늘 바로 집행할까요?”
“그래. 오늘도 직접 보겠다.”
“예.”
군터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살라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분명 꺼림칙할 법도 한데, 살라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는 것 같더니, 그새 적응을 한 것일까.
“소문이 돌지는 않느냐?”
“소문이라시면…….”
“일반적인 일은 아니지 않으냐.”
“아아.”
모르지 않았다. 모르는 척을 했을 뿐.
“소문이…돌기는 합니다만.”
군터가 알아차렸을 정도면 살라스가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요즘은 일선의 군무에서 조금 멀어졌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휘하 장교들은 물론 병사들서까지 눈을 떼지 않고 있었으니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장군께 특이한 취미가 생겼다는 정도니까요.”
“그런가.”
직접 볼 필요 없는 사형수의 사형 집행을 참관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다. 성정이 조금 잔혹한 관리나 귀족은 다양한 방식으로 직접 사형을 주도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경우는 정말 성정이 비뚤어진 자도 있고, 정치적인 이유로 그런 모습을 연출하는 자도 있다. 아랫것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살라스는, 아니 살라스 뿐만 아니라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내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은 그가 상술한 두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의아한 것이다. 그런 자가 아닌데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다만, 집행은 공개적으로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지 않으냐.”
“물론 그렇습니다만, 형을 조용히 집행하시는 것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계속해서 돌고 있습니다.”
“소문이면 소문이지, 이상한 것은 또 뭐냐.”
“그…장군께서 사령술을 익히신 것을 다들 알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알만한 이야기라, 군터는 난처한 기색인 살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틀린 소문은 아니군.”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직접 보여주셔서 쓸데없는 소리를 잠재우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군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라스도 알고 있었다. 살라스만이 아니라 그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은 비록 전부 다 이해한 것은 아니더라도 대충 다 알고 있었다.
“괜찮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아. 그렇습니까?”
살라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의식이라는 것이 개인적으로 찝찝한 것은 둘째치고, 슬슬 돌기 시작하는 소문들을 잠재우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곧이다. 앞으로 두어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군.”
군터는 이제 거의 다 찬 것 같은 영혼 감옥을 느끼며 답했다. 살라스는 뭔가 대단한 의식인 것처럼 받아들였지만, 사실 그가 한 일은 간단했다. 막 죽은 사형수들의 영혼을 보주 속에 가둔 것뿐이었으니까.
영혼 감옥. 그것은 군터가 임의로 붙인 이름이었다. 언제까지 그냥 보주라고 부르는 것이 영 어색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어울리는 이름도 아니었고.
‘얼추 백 오십 정도인가?’
꾸준히 채운다고 채웠건만, 헤아려보니 얼마 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 고대인들이 갇혀있을 때보다 수가 크게 줄어들었는데, 군터는 이를 영혼 감옥에 영혼을 채운 방식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고대인들은 의식을 치러 자발적으로 감옥에 들어갔다. 그렇기에 수백이 넘는 영혼이 한꺼번에 들어가는데도 크게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군터는 사형수들의 영혼을 닥치는 대로 집어넣었다. 아무리 그가 사령술을 사용할 줄 안다지만, 영혼을 억지로 밀어 넣으려 하니 반발이 심했다. 게다가 육신을 잃은 직후의 영혼들이었기에 그 힘이 평범하지 않았다. 그러니 수고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수를 더 늘리려면…….’
둘 중 하나다. 그의 역량이 더 커지거나, 감옥에 갇힌 영혼들이 감옥에 녹아들거나.
어느 쪽이 더 빠를 것인가를 점쳐보면 아무래도 후자일 듯싶었다. 그의 영혼을 다루는 능력은, 모르긴 몰라도 지금 수준으로도 평범한 사령술사들의 수준을 크게 웃도는 것일 터. 여기서 더 발전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모았으니, 한번 써보긴 해야 할 터인데.’
강한 영혼들이다. 죽은 직후의 힘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런 영혼들로 사령술을 사용한다면 그 효과는 분명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수준일 것이다.
‘아무래도 어렵겠지.’
단순히 시체를 일으키는 것이라면 간단하다. 지하실에서 하거나, 정 걸린다면 은밀히 성을 빠져나가서 하면 될 일이니까. 하지만 그가 실험해보고 싶은 것은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라, 실전 활용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필요한데, 그런 상대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너무 열심히 일해놓은 건가.’
그가 사령술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졌으니 실전에서 사용하는 데 거리낄 것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근래 들어 그 흔한 도적들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너무 열심히 일한 덕분인지, 아니면 도적놈들도 흉흉한 분위기를 읽고 몸을 사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판니른은 전에 없이 잠잠했다. 특히 솔롬을 비롯한 동부는 더더욱 조용했다.
‘하는 수 없지.’
답이 없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전혀 관심 없었던 아록 쪽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