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화
보주와 연결된 순간, 군터는 모페이브가 어째서 그렇게 조심하라고 당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정신이, 아니 그보다 더 깊은 내면이 통째로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고,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웠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런 흔들림을 버텨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살면서 겪는 그 어떤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도 전혀 다른…….
[너, 너는 누구냐.]
보주 속의 영혼들은 이제 그들을 지독히도 괴롭히던 고통과 미혹에서 벗어났다. 보주 안의 작은 세계가 군터의 통제하에 잠시나마 질서를 찾으며, 그들의 목에 걸린 형틀도 느슨해진 것이다.
[일전에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었나.]
그들이 느끼고 있는 거대한 기쁨, 환희를 군터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섞여 있는 두려움도.
[어떻게 이런 일이…….]
[어리석게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물건에 손을 댔더군.]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번엔 분노다. 일전에 들었던 그, 어쩔 수 없었던 사정에 대해 토로하려는 것 같아 군터는 그들의 입을 막았다. 엄밀히 말하면 입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가볍게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 보주 속에 갇힌 모든 영혼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쯤은 간단하다 못해 시시한 정도다.
모든 소리를 막으니 작은 세계가 고요로 가득 찼다. 군터는 그 속에서 홀로 자유로이 의지를 퍼뜨렸다.
‘신기하군.’
손을 활짝 펴고, 손바닥에 놓인 자그마한 무언가를 살피는 느낌이었다. 가까이 보려면 가까이 볼 수 있고, 굴리려면 전후좌우로 얼마든지 굴릴 수 있다. 이 자그마한 것이 나름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 작은 세계 안에 수백이나 되는 영혼이 갇혀있는 것도 신기했다.
‘하지만…그래. 위험한 물건임은 틀림없다.’
물건이라고 볼 수도 없다. 보주가 그와 이어진 순간, 그것은 그의 한 부분이 되었다. 뼈와 살이 이어지고 피가 흐르는 팔다리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 한 몸 같은…….
‘날 물들이려고 하는군.’
한 몸처럼 되었지만, 끊임없이 그를 탐하고 있다. 마치 손끝에 머물던 문둥병이 팔을 타고 몸까지 번지려는 것처럼. 계속해서 기어올라 퍼지려고 하고 있다.
뭘 하려는 것인지 안다. 보주 속의 영혼들처럼 만들려는 거다. 영혼을 속박하고, 보주 속의 세계에 가둬두려는 것이다. 특별히 어떤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이 보주가 본래 지닌 성질이었다. 마치 물을 뜨는 자의 몸이 자연스레 물에 젖는 것처럼, 이 보주 또한 그러하다. 보주를 소유하고, 그것의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마물이라 할만하다.’
분명 심각한 문제일진대, 이상하게도 군터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걱정도 되지 않았다. 손끝이 아니라 손톱 끝도 되지 않는 곳에서 기를 쓰고 있는 꼴이 우습기까지 했다.
‘나를 네 색으로 물들이려면 백 년도 부족할 거다.’
오만이 아니다. 자신감이다. 이런 하찮은, 저주인지 뭔지 모를 것에 잡아먹히기에는 그동안 지나온 세월이 너무도 거대하다.
‘얌전히 굴복해라.’
꿈틀거리는 보주의 기운, 아니 성질을 거침없이 짓눌렀다.
퍽! 하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강하게 마음먹은 순간 그를 타고 오르려던 저주는 부서졌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불이 타오르지 않을 수 없듯, 제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 보주의 본래 성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이 덩치를 키우면 물을 붓거나 짓밟아 다스리듯, 이 보주 역시 같은 이치로 대하면 될 것이다.
“훌륭하군.”
군터가 손에 힘을 주자 보주가 단번에 박살이 났다. 그에 모페이브와 나짐이 크게 놀랐지만, 이내 그것이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놀란 표정을 지웠다.
“장군. 성공하신 겁니까.”
거침없이 보주를 박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모페이브는 직접 물었다. 그의 물음에 군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장군께서 능히 하실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만…그럼에도 우려하는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더군요.”
“너의 우려를 이해한다. 분명 사특한 물건이다. 안에 든 자들은 물론이고, 주인까지도 삼키려 드는 마물이야.”
“그렇다면.”
“하지만, 그럼에도 쓸모가 있어. 내가 찾던, 아니 그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는 물건이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만족스러웠다. 가벼운 위험부담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준비를 해야겠군.”
구슬은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흩어졌지만, 군터는 여전히 손안에 구슬을 쥔 것처럼 몇 번이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어색한 감각을 털어냈다.
* * *
“강하게 나오리라 짐작은 했지만, 설마 루람이 하루도 버티지 못할 줄이야.”
긴 탄식. 지금 같은 상황에 이런 말과 한숨은 사기를 떨어뜨릴 뿐이라 지양하는 것이 맞지만, 누구도 그의 독백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각하. 대응책을…….”
모두가 말을 아끼는 가운데, 눈매가 사나운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중년인은 또 한 번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허나 어차피 둘 중 하나 아니던가.”
“…….”
입을 열었던 사내나, 입을 다물고 있던 자들이나 조심스럽게 중년인의 기색을 살폈다.
둘 중 하나. 그래. 둘 중 하나다. 루람이 저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분명히 상정 외였으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어차피 처음부터 대응은 정해져 있었다. 상술했듯, 둘 중 하나다.
강하게 부딪치느냐, 아니면 웅크리느냐.
“어떻게 해야 할까.”
항복은 선택지에 없다. 어떤 것을 고르든 맞선다는 것은 같다. 카리아의 후계자가, 아록의 다음 대 주인이 테리브란에 볼모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할 만큼은 했습니다. 루람의 1만 병력을 잃었으니, 조정에서도 우리에게 가혹하게 굴지는 못할 겁니다.”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즉각 반박당했다.
“1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지요. 루람을 잃고 1만을 잃었지만, 결과적으로 채 하루도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런 주제에 몸을 사린다면, 조정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은 둘째치고 우리는 삽시간에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뿐만아니라, 온 아록이 카리아를…….”
말을 이어가며 혼자 흥분한 무장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상석에 앉은 중년인의 눈치를 살폈다.
“뭘 눈치를 보고 있나. 틀린 말 하나 없는데, 설마 내가 자네의 입방정을 두고 질책이라도 하겠는가.”
“소, 송구합니다. 하오나 소장은 아군이 움츠러들었을 때 벌어질 것이 자명한…….”
“변명할 필요 없대도.”
중년인, 하브람 카리아로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얼굴이 붉어진 무장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하브람 카리아로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무장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수하들에게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황제의 승천 이후, 그는 다른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향후 제국의 정세가 어찌 흘러갈지를 점쳐보았다. 황자들의 피 튀기는 싸움이 일어날 것은 너무도 자명했으니, 남은 것은 누구를 택하느냐였다.
‘잘못된 선택이었다고는 생각지 않아.’
제레이스를 등에 업은 7황자는 세간에 알려진 것 같은 탕아가 아니었다. 그가 본 모습을 숨긴 채 숨죽이고 있던 맹수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그는 7황자에게 걸었다. 오랜 세월 스스로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냉정함과 때가 왔다고 느낀 순간 바로 들고 일어서는 과감함까지 갖췄으니, 황좌를 노릴 만한 재목이라고 여겼다. 물론 제레이스와의 오랜 연도 한몫했고.
‘어차피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7황자가 인물이라면 27황자도 인물이다. 그가 세를 키운 이상, 서부와 북부의 가운데에 낀 아록은 늦든 빠르든 전화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브람 카리아로는 바라눔 트라소프가 궐기하여 세를 키우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확신했다.
미래를 점친 만큼, 나름대로 준비는 해뒀다. 오랜 세월 다스려온 아록에서 조금 힘을 빼고 테리브란에 어느 정도 기반을 갖췄다. 물론 그렇다고 아록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도 가문의 맥이 이어지도록 조치한 것이다.
‘피할 수 없다. 피한다고 해도 지나쳐주지 않을 것이니.’
적은 아록을 그냥 두지 않는다. 손에 넣거나, 그것이 녹록하지 않다 싶으면 완전히 파괴하려 들 것이다. 물론 테리브란에서도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고.
간단한 계산이다. 제대로 힘을 써서 피를 흘리느냐,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실리를 챙기느냐의 기로다.
‘실리. 실리라.’
얄팍하게 헤아려본다면, 적당히 몸을 사리면서 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이득이다. 아록을 지키는 것은 카리아에게만 중요한 일이 아니므로, 황자는 카리아가 흘려야 할 피를 일정 부분 대신 흘려줄 것이다.
‘그러나…영 모양새가 좋지 않지.’
루람과 정병 1만을 잃었다. 기세를 뺏겼지만, 적도 그만큼 힘을 썼을 것이다. 무리를 했다고 봐도 좋겠지.
‘무리라고 해도 계산된 무리다.’
시간을 벌기 위함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나왔을 때, 이쪽이 어찌 반응하리라는 것을 예상했을 터.
선택지를 강요한다. 두 개의 선택지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그것도 짐작했을 터.
‘그렇게도 자신이 있나?’
강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과하게 몰아붙이고 있다. 아록에 발을 들였으면서, 주인의 눈치를 살피기는커녕 수염을 뽑아버리다니.
‘어차피 7황자가 제국을 손에 넣는다면, 카리아도 북부에만 박혀 있을 이유가 없다.’
바야흐로 난세다. 오래된 질서가, 힘의 구도가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인 것이다.
북부의 대귀족. 한 주의 총독 가문.
허울은 좋지만, 가진 것에 만족하는 권력가는 없는 법. 이왕 대귀족이라고 불린다면 변방이 아니라 중앙의 대귀족으로 불리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생리.
‘희생의 피가 아니다. 딛고 올라서기 위한 발판을 만드는 것이야.’
그렇게나 광활하게 보이던 아록의 산과 들이, 언젠가부터 작고 초라하게 보였다. 지겨워졌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카리아가 언젠가는 이 땅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동원령을 내려라. 보름을 주면 얼마나 모이겠나?”
“지금 당장 파발을 띄운다면 5만, 아니 6만 정도는 모을 수 있을 겁니다. 하오나 각하. 그리되면 각지의 방어선이…….”
“적의 움직임을 보게. 루람을 하루 만에 떨어뜨렸지. 어차피 힘 싸움이야. 기세를 뺏겼으니, 되찾아와야 하지 않겠나.”
수하의 우려를 일축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리브란에 계신 전하께 전령을 보내라. 전하께, 나와 카리아는 전력으로 적과 맞서겠노라고 아뢰어라.”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