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5화
둥! 둥! 둥!
전고를 두드리는 소리가 너른 들판에 가득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그저 소리만 들렸다. 그다음에는 가느다란 검은 선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검은 선이 점점 길고, 굵어질수록 성벽 위 병사들의 얼굴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곳은 최전선이며, 여기에 있는 이들 모두 선별된 병사들이다. 신병은 하나도 없다. 경험과 능력, 모두 인정을 받은 정예.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들판을 가득 메울 것 같은 대군을 눈앞에 두었을 때 몸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동요하지 마라!”
병사들 사이에 두려움이 퍼질 것 같으니, 장교들이 재빨리 목소리를 높였다.
“루람의 성벽은 굳건하다! 우리는 일만이지만, 이 성벽과 함께라면 오만의 적이 상대라도 능히 버텨낼 수 있다! 그러니 동요하지 말고…….”
호쾌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말을 이어가던 장교는 자신의 목소리가 더이상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목구멍에 막혀 더 올라오지 못한 것은 전방 저 멀리. 들판을 가득 메울 것 같은, 이 아니라…정말 가득 메워버린 적의 모습을 본 직후였다.
5만이 아니다. 족히 그 배는 되어 보였다.
게다가 가장 앞에서 휘날리는 화려한 깃발. 어딘가 눈에 익은 듯한, 하지만 그러면서도 조금 이질적인 그 깃발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화, 황족의 깃발…….”
오직 제국 황실의 일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가의 깃발. 자신만의 깃발을 사용하는 황족들은 그 황가의 깃발을 토대로 조금씩 그 형태를 변형하여 사용하곤 했다. 그러니 몰라볼 수가 없다. 그가 섬기는 7황자도 그랬으니까.
“바라눔…트라소프.”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이름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그가 이곳에 왔는가.”
충격. 다음은 두려움. 마지막으로 절망.
점점 늘어나는 적군의 모습을 보며, 장교는 이를 악물었다.
* * *
“듣기로, 7황자가 2황자와 일전을 벌이던 당시에 직접 군을 이끌고 선봉으로 나섰다더군. 쏟아지는 화살비를 뚫고, 성벽을 올라 적병의 수급을 취했다던가.”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로군요.”
“그래. 많이 듣던 이야기지.”
푸르스름한 전포가 바람에 조금씩 흔들렸다. 말끔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한창 시끌벅적해지고 있는 성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재미있지 않나.”
“뭐가 말씀입니까?”
“처음 폐하께서 승천하시고 난 직후를 떠올려보게. 야심 있는 자들은 그때부터 이미 잘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지. 세를 규합하고, 온갖 음험한 수로 적을 처리하면서 힘을 쌓아갔어.”
“그랬지요.”
중년 사내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혀를 찼다.
정말이지, 그때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매일같이 황도에 피바람이 몰아쳤고, 통곡과 비명이 사그라질 날이 없었다. 그 어떤 참혹한 전장도 그때의 황도에 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그자들이 기억나. 자신만만한 얼굴로, 이미 세상이 손에 들어온 것처럼 행세했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때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굴려대던 자들이 어찌 되었는가 말이야.”
“어찌 되긴 뭘 어찌 됩니까. 모두 목이 잘렸지요.”
조금 부연 설명을 하자면, 목이 잘린 몸뚱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다. 목을 자른 자들이 원하는 것은 머리지, 머리가 잘린 몸뚱이가 아니었으니까.
“그자들은 간단한 이치를 잊고 있었던 게야. 예로부터 권세를 쥐는 자들은 칼로써 쟁취해왔다. 땅, 가문, 나라, 단 하나도 예외는 없었지.”
푸른 전포의 사내는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러모로 어렵고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피하기만 한다고, 쉽게만 가려 한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야.”
황좌까지 이어지는 길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잔재주나 부리는 자들이 오르기에는 너무도 고된 길이라는 거다.
그렇기에 그는 그자들이 온갖 달콤한 말로 유혹하거나, 되지도 않는 협박을 가해올 때도 심드렁하게 무시했다. 그자들 모두, 결국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보려면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해질 것이고, 간단하게 보면 이보다 더 간단할 수 없을 만큼 간단해진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의미 없는 혼잣말이네. 흘려듣게나.”
루람의 성벽은 높고 튼튼하다. 1만이 넘는 병사가 석달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만큼 물자의 비축도 충분히 되었다던가. 전쟁을 대비한 일선의 요새로는 이보다 훌륭할 수 없을 정도.
하지만 적들은 안일했다. 아니, 사실 저들이 안일한 것이 아니라 이쪽이 말도 안 되게 과격한 것일지도 모른다.
‘초장부터 총공세라니. 뒤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움직일 수 없지.’
초전에 동원된 군대가 십만이다. 게다가 그냥 십만이 아니라 황자가 직접 이끄는 병력. 이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공세가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황자의 무지막지한 추진력 덕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어찌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분이지.’
누군가는 무모함이라 부르는 그 용맹이 그는 기꺼웠다. 그래서 단 한 번도 허투루 든 적 없는 자신의 깃발까지 내어줬다. 그 깃발은 지금쯤 이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이름 모를 잡병의 손에 들려 휘날리고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의 이름에 크게 흠이 날 테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니, 상관없다.
“계속 북을 쳐라. 소리가 끊겨서는 안 된다.”
오직 웅장한 전고의 함성만이 지금도 성벽을 오르고 있거나, 이미 올라 성벽 위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 그들의 가슴을 울리고 이성을 흔들 수 있다.
전장에서는 끊임없이 침착하면서 머리를 굴려야 한다고 하지만, 그거야 군을 움직이는 장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 병사들은 정반대다. 그들의 머리는 깔끔하게 비어있을수록 좋다. 이상적인 병사는 꼭두각시와 같아야 한다. 실을 당기고 늘어뜨리는 대로 충실히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성문이 열리는군요.”
“그렇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달을 기대하며 닫아걸었을 성문은 하루도 되지 않아 초라하게 열리고 말았다.
“피해가 큰 것 같습니다.”
다만 허무하게 열린 것은 아니다. 저 성문을 하루 안에 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피를 흘렸을까. 못해도 수천,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저들도 나름 철저하게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쩔 수 없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것 아니겠나.”
피해 없이 승리하는 것이 최고라고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지금 중요한 것은 병사 수천이 아니라 시간이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수천이 아니라 만이라고 해도 포기할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짠 계획이다.
“카리아가 어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뻔하지. 잔뜩 겁에 질려서 틀어박힐 거다.”
카리아는 아록의 지배자다. 그들이 아록에서 뿌리를 내린 지 벌써 100년이 훌쩍 넘어가니, 아록을 나라라고 친다면 그들이 이 소국의 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럴까요? 그래도 체면이 있지 않습니까.”
많은 것을 가진 자는 생각도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아록의 지배자를 자처하고, 밖에서도 인정받는 카리아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휘하의 유력자들이 다른 마음을 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즉각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지배자는 결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지배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그 아래에 있는 자들도 덩달아, 더 크게 흔들리는 법이다. 그러니 카리아는 움직일 것이다. 그들이 흔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할 것이다.
“그건 잃어도 적당히 잃는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지.”
“예?”
“가진 것을 다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전부를 걸고 부딪칠 각오는, 어지간히 용맹한 자들도 가지기 힘든 것이야. 그런데 카리아? 보잘것없는 땅에서 왕 노릇이나 즐기던 놈들이? 그럴 리가 없지.”
거느린 사병이 수천수만이라고 해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정작 그들을 이끌고 싸워본 적이 없을 텐데. 그들이 직접 칼에 피를 묻혀본 것이 언제일까? 족히 수십 년은 되었을 것이다. 최소 한 세대 전의 이야기일 거라는 뜻이다.
물론 오랜 세월 한 주를 지배해온 가문인 만큼, 나름의 저력은 있을 것이다. 억지로 싸움판에 끌려 들어왔다고 해도, 제대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발악을 하기 시작할 터.
‘그렇게 되기 전에 끝내야 한다.’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인다. 무리를 해서라도 시간을 벌려는 것은 바로 그 이유다. 카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제힘을 쓰기 전에 끝내기 위해서.
“가시지요. 전하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모양새가 영 이상해. 모시는 분이 피칠갑을 하시는데, 섬기는 자는 멀끔한 몰골로 편히 뒤를 따르다니.”
푸른 전포의 중년인이 혀를 차자, 그 말을 들은 사내가 피식 웃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장군을 아끼십니다.”
“알고 있네. 그러니 이런 몸뚱이로도 전장에 나온 것이지.”
담담히 중얼거리는 것 같지만,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회한이 섞여 있었다. 그것을 눈치챘을까, 웃고 있던 사내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 *
“조심하십시오. 장군.”
“주의사항은 충분히 들었다.”
군터는 모페이브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뒤로하고 보주를 움켜쥐었다. 음산한 한기가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마치 가느다란 뱀 한 마리가 그의 몸을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빈말로라도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모페이브와 나짐의 우려와는 달리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아아아아-!]
보주 속의, 갇혀 있는 고대의 영혼들이 울부짖었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이 어렴풋하게 전해져 왔다.
우우웅!
은은한 빛이 피어올랐다. 준비된 술식이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팔을 타고 기어 올라온 뱀이 그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지만, 이제 군터는 그가 느끼고 있는 불쾌한 감각을 ‘뱀’이라고 확정지었다.
뱀은 그의 가슴속, 더 깊숙한 곳까지 기어들어 갔다. 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순간, 불쾌한 뱀은 그의 본질과 이어졌다.
[…….]
이제 영혼들은 울부짖지 않았다. 군터는 그가 그들의 입을 닫게 할 수도, 울부짖게 할 수도, 아예 없애버릴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군터는 그가 보주의 안을 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작은 세계는 이제, 온전히 그의 손안에 놓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