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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84화 (684/1,064)

684화

“드디어!”

가르비아가 예의 쉭!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땅에 닿은 굵직한 꼬리가 빳빳하게 서자 그의 상반신이 높이 올라갔다.

그는 그의 격정적인 반응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부관, 로츠를 본체만체하며 몸을 돌렸다. 그가 바라본 곳에는 누가 봐도 싸움과는 연이 없어 보이는 빼빼 마른 사내가 앉아 있었다.

“어때? 펜대를 놀리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나?”

“예. 상당히 인상적인 순간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군요.”

“흥!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그런 쓸모없는 취미라니.”

“쓸모없지 않습니다. 취미도 아니고요.”

“뭐라고 했나?”

꼬리가 살짝 꿈틀거린다 싶은 순간, 가르비아가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순식간에 사내의 앞까지 다가온 가르비아가 세로로 갈라진 눈을 깜빡거리며 재차 물었다. 위협할 생각은 아닌 듯했지만, 뱀의 눈이 바로 앞에서 번들거리고 있으면 어지간히 담이 큰 사람이라도 움츠러들기 마련. 하지만 그 서늘한 시선을 받는 사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담담했다.

“쓸모없지 않으며, 취미도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취미가 아니면, 그럼 뭐지?”

“일종의 가업이지요. 의무이기도 하고요.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현세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어째서? 역사가 밥을 먹여주기를 하나, 적을 대신 죽여주기를 하나?”

“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하지요. 이 시대의 기억을 후대에 전해주지 않습니까.”

사내의 진지한 말에 가르비아는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도 역시 가느다랗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글쎄. 그게 왜 의미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해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역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고, 현재와 미래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길을 닦는 것을 가치 있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착각 속에 빠져 사는군. 하긴, 비단 자네만의 문제일까. 자네 조부 때부터겠지.”

“조부님을 함부로 말씀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왜? 난 우슬라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였던 사람인데?”

“…….”

가르비아의 빈정거림에 사내, 네라드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가벼운 말투로 시비를 걸고 있는 사내가 10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을. 나가라는 종족이 아바시스에서도 흔치 않다 보니 실수를 하고 말았다.

“어른 대접을 해달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나를 너무 띄엄띄엄 보는 건 곤란해.”

“죄송합니다. 의원님이 인간과는 다른 세월을 사신다는 것을 잠시…….”

“장군이라 불러라. 여기는 전장이지, 의회가 아니니까.”

“아, 예.”

네라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두 번이나 트집을 잡혔다. 평소에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는데, 오늘은 많이 꼬이는 느낌이었다. 이 사내와 붙어 있으면 이상하게도 종종 이런 일이 일어난다.

“아무튼, 장군께 폐를 끼치지는 않을 테니 저의 개별 활동에 대해서는 너무 타박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래. 그러지. 자네가 자네 일을 제대로 한다면 말이야.”

여전히 빈정거리는 투다. 하긴, 비단 가르비아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가 자신을 감시하러 온 감시자를 편히 대하겠는가. 오히려 지금처럼 말로만 시비를 거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판이다.

“아무튼, 자네의 표현을 빌자면 진정 역사적인 순간이다. 우슬라가 살아있었다면 기뻐했을까?”

“글쎄요.”

우슬라. 우슬라 익세이온.

나이를 조금 먹었거나, 글줄깨나 읽었다 하는 이 중에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생전에는 온갖 다양한 평이 있었던 자였고, 죽어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를 긍정적으로 평하는 이나 부정적으로 평하는 이나 한 가지만은 공통적으로 인정하곤 했다.

분명히 그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존경받을 만한 학식을 지닌 학자였다. 인간 우슬라 익세이온이 아니라 학자 우슬라 익세이온으로서 놓고 보면, 그는 흠잡을 곳이 없는 위대한 학자였다.

그런 그를 가리킬 때 부르는 칭호로 위대한 학자라는 것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제국의 추방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연구해서는 안 될 것을 연구했으며, 써서는 안 될 것을 썼다. 그 대가로 제국에서 추방, 아니 정확히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아바시스로 망명했다.

“우습지 않나? 우슬라가 남쪽으로 도망쳐올 때만 해도, 카라누르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도 아국은 카라누르의 유일한 위협이었지 않습니까.”

“상대가 없는 와중에 그나마 조금 굵직했을 뿐이지. 우리가 아무리 용을 쓴다고 해도 카라누르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놈들의 정복 전쟁이 멈춘 것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황제의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이었어. 단지 그뿐이다.”

“흠흠!”

가르비아의 부관 로츠가 헛기침을 했다. 아바시스 군부에서 들으면, 아니 밖으로 새어나가면 무척이나 곤란할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상관에게 나름의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가르비아는 그런 로츠의 노력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조금 바뀌었지. 카라누르 놈들이 과거에 멈춰서 세월만 보내는 동안 우리는 끝없이 발전했으니까.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계속해서 발전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두려웠고 다급했기 때문이다. 놈들이 언제 다시 전쟁을 재개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야.”

“…확실히,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가르비아와 네라드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로츠의 속만 타들어갔다. 하지만 밖에 듣는 귀가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는 가르비아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점점 설득되어갔다.

“한 가지 알려줄까? 엉덩이 무겁고, 머리는 더 무거운 자들이 왜 이번 일에 찬성표를 던졌는지 아나?”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카라누르의 내전을 심화시키고, 그 틈을 타 남방의 여러 이권을…….”

“일부일 뿐이지. 정확히는 곁가지일 뿐이야. 진실은 간단해. 이번 기회에 카라누르 놈들의 힘을 최대한 갉아먹기 위함이다.”

“의회는 어느 정도를 바라고 있습니까?”

“최소한 대협곡을 비롯해서, 남부의 곡창지대를 일부라도 수중에 넣을 수 있기를 바라지. 그러면 앞으로 카라누르의 침공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일은 사라질 테니까.”

확실히 그럴 것이다. 남부의 곡창지대는 모르겠지만, 대협곡만이라도 손에 쥘 수 있다면 카라누르의 침공을 대비해 상주시켜놓은 북부군의 규모를 크게 줄일 수 있을 터.

“군부도 같은 생각일까요?”

가르비아가 피식 웃었다.

“순진하군. 그럴 리가 있나? 리비암을 불태워버리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놈들이 넘쳐나는데,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하려고?”

호전적인 자들은 군부에, 온건적인 자들은 의회에 모였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군부와 의회가 사사건건 부딪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만약 군부와 의회 모두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이 다수 있지 않았다면 아바시스는 진작에 둘로 쪼개졌을 것이다.

“군부의 생각은 당연히 의회에서도 잘 알고 있다. 과격한 놈들이 바라는 것처럼 리비암을 태워버리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의 목표에 만족할 생각은 없을 것이야. 아마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결정을 내리겠지.”

황좌를 놓고 벌이는 황자들의 다툼은 아바시스에게 있어 기회임과 동시에 기로였다. 이 기회를 어떻게, 얼마만큼 살리느냐에 따라 아바시스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그런 만큼 평소에도, 가르비아의 표현을 빌자면 엉덩이만큼이나 머리가 무거운 의원들의 머리가 더욱 무거워질 터였다.

“바라눔과 자콥이 부딪친다. 둘의 세를 놓고 보면, 당장은 바라눔이 우세하지만…시간이 흐르면 자콥이 유리해져. 둘 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전략 역시 그에 맞춰서 구사하겠지.”

“말씀대로라면, 바라눔 황자는 빠르게 결판을 내려 하겠고…자콥 황자는 버티면서 시간을 끌려 하겠군요.”

네라드의 말에 가르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자, 그놈들은 그렇게 나올 것이라 치고.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관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말씀하신 것은 대략적인 예측일 뿐, 전쟁이 어찌 흘러갈지는 모르니까요.”

“정석이군. 틀리지는 않지만, 무척 심심해.”

“장군께서는 혹 다른 생각이라도?”

반쯤은 욱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다. 그래서 반쯤은 쏘아붙이는 것처럼 말이 나가버렸다. 뒤늦게 실수했음을 깨달았지만, 다행히 가르비아는 전혀 불쾌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다가올 때처럼 부드럽게 물러나며 부드러운 가죽이 깔린 바닥에 똬리를 틀었다.

“내 생각은 말이지. 전쟁이라는 것은 뭐가 어쩌네 저쩌네 말로 떠들어 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거야. 대략적인 판세를 읽고, 그에 맞춰 예측을 한다고 해도 막상 전장에서 어떤 변수가 터질지 모르는 일이거든. 열에 아홉 정도, 반드시 이길 거라고 생각한 전장에서 뜬금없이 전쟁영웅이라는 놈이 떡하니 나타나 판을 깰지도 모른다고. 역사 좋아하는 자네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겠지?”

“예.”

흔한 일은 아니다. 흔했다면 그런 자들을 영웅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을 테니까.

가르비아의 말은, 비약이라면 비약이지만 아예 설득력이 없지는 않았다. 분명히, 전쟁이라는 것은 예측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그리고 예측이 빗나갔을 때의 위험이 너무도 크다. 특히 지금처럼,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가깝게 엮여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도 이 판에 끼어있다. 황자 놈들처럼 목을 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쪽 팔 정도는 건 셈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당연히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예상 밖의 변수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아주 간단해. 가까이에 있으면 되는 거야. 그럼 예상 못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바로 수습을 할 수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위험부담이 커지지 않겠습니까.”

“크게 따려면 크게 걸어야지. 당연한 것 아닌가?”

쏘아붙이고 싶었다. 전쟁이 도박이냐고. 전장이 도박판이냐고.

하지만 네라드는 조금 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르비아에게 강하게 대꾸할 생각이 없었다. 굳이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지.’

그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참견이 아니라 감시다. 지켜본 후에 보고하면 그뿐인 것이다.

“…….”

네라드가 입을 다물자 이번엔 로츠가 끼어들었다.

“아말로페 황자는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겁니다.”

“녀석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 생각이고, 결정이지. 어차피 우리의 배에 탄 이상, 놈은 따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놈에게도 나쁜 이야기가 아니야.”

가르비아가 씩 웃었다. 네라드의 눈에는 그의 음험해 보이는 미소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부터 역사의 한 줄이 시작될 것임을 알았고, 그 사실에 가볍게 전율했다.

바로 이것이었다. 위험하게 튀어대는 의원의 감시가 아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생생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그것을 위해 이곳에 오기를 자청한 것이다.

손이 근질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숙소로 돌아가 펜을 쥐고 싶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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