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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83화 (683/1,064)

683화

“보주는 감옥입니다.”

“감옥?”

“예. 정확히는, 감옥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물건이지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군.”

감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군터는 자연스럽게 보주 속의 영혼들을 떠올렸다. 죽음을 피해 도망쳤지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고통받고 있던 자들. 그들의 모습은, 일전에 렌의 봉인지에서 보았던 망국의 망령들과 겹쳐 보였다.

‘어설프게 죽음을 피한 결과란 결국 그 꼴인가.’

물론 보주 속의 고대인들과는 달리, 렌에서 본 망령들은 타의에 의해서 봉인된 자들이기는 했다. 하지만 육신을 잃고 영혼만 덩그러니 남은 자들의 말로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대인들은 보주의 보관 기능에만 주목한 모양입니다만…….”

“보관?”

“영혼의 보관 기능 말입니다. 보주에는 육신을 잃은 영혼이 본래의 형체와 성질을 잃지 않도록 보존시키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그 기능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하지 않아?”

“감옥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하지만 감옥이라는 것이, 그냥 덩그러니 있다고 해서 어느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감옥과 죄수들을 관리하는 간수나 옥장이 필요하지요.”

그즈음, 군터는 모페이브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보주의 기능은 주인의식을 마침으로써 비로소 완전히 발휘됩니다. 보주의 주인이 보주를 다스리면 보주 안에 갇힌 영혼들이 오염될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확신하나?”

“칠할 정도는…예. 확신합니다.”

그 정도면 확신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기도 애매한 수준이다. 그러나 그건 일반적인 경우의 이야기. 모페이브가 칠할을 이야기하면서 저렇게 자신감을 보이는 것을 보면 대충 때려 짚은, 어중간한 짐작은 아닐 터였다.

“옛 시대의 지식을 다룬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대략적이나마 보주에 새겨진 술식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아! 대략적인 해석이지만 그 신뢰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어째서지?”

군터는 모페이브가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사내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물은 것은 모페이브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의 관심사는 보주의 쓰임새와 사용법 정도였지만, 관련된 지식에도 어느 정도는 관심이 있었다.

“그림을 뚜렷하게 보지는 못하더라도, 멀리서 바라보아 그것이 산과 강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있지요.”

“그런 경우라는 건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까부터 칠할이니, 거의니 하는 추측성 표현들을 쓰고 있지만 정작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군터는 그런 모페이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래서…그 주인의식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그것은…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 연구를 해야겠지요.”

모페이브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 어색한 웃음을 본 군터도 덩달아 실소했다.

“실은, 그래서 보고를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성과가 없었으니 장군께서 무슨 소식이라도 기다리고 계실 것 같아…….”

“잘했다. 한번 성과를 냈으니, 이제부터는 조금 더 순조롭겠군.”

“정말로,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모페이브가 조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 * *

“앞으로!”

“뭣들 하나! 빨리빨리 움직여!”

소란스럽다. 군졸들이 모여있는 곳이 시끌벅적한 것이야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게 테리브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북부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대도시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7황자가 거하는 도시라면 장터의 상인들도 목소리를 신경 써서 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각이라고는 하지만 테리브란 안에서 시끄럽게 호통을 치고 있는 장교들이나, 그 호령에 맞춰서 힘껏 발을 구르고 있는 병사들이나, 일반적이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서부의 전란이 나와는 상관없다는 안일함은 당장 집어치워라! 내일 당장 출정 명령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바로 전장에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시 머릿속에 담아두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조정의 명에 따라, 정확히는 황자의 명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방금 젊은 장교가 말한 내용은 황자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황자는 정말 내일 당장이라도 테리브란의 군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나갈 생각인 듯했다. 전례가 없던 것도 아니라, 조정의 대신들은 정말로 황자가 테리브란의 수비군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해가 안 되는군.”

“뭐가 말인가?”

보리스가 못마땅한 투로 중얼거리자 자밀이 물었다.

“전하께서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신다는 게, 그렇게 만류할 일인지 모르겠다는 말이네.”

“존귀한 몸이시지 않나. 험한 곳에 가셨다가 자칫 큰일이라도 나면 돌이킬 수가 없지.”

“2황자를 무찌르고 동부를 병탄할 당시에도 전하께서 친정하시지 않았나.”

“그랬지. 하지만 과거의 업적에 눈이 멀어 자만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예로부터 일일이 샐 수 없을 정도로 허다했네.”

“대장이 함께하는 군대는 그렇지 않은 군대보다 훨씬 강해. 대장이 앞장서는 군대는 그보다도 더 강하지. 황좌의 주인을 가리는 일전이 되지 않겠나. 그렇다면 물불 가릴 때가 아니지.”

자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네 말도 맞네. 하지만 조정의 대신들은…뭐랄까, 조금 낙관적인 것 같아.”

“낙관적이라고?”

보리스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자밀이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길게 보고 있어. 상대의 수에 맞춰 어울려줄 생각이 없지. 자네도 들어서 알고 있지 않나?”

“…뭐.”

아록과 리바스트라, 어쩌면 타라냐드까지를 저지선으로 삼아 적과 대치하겠다는 대전략. 자이드라 멕시스가 고안한 것을 황자가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보리스도 들어 알고 있었다.

“싸움을 최대한 길게 늘일 생각인 게지. 시간을 끌면 아군이 유리해지는 것은 분명하니까.”

“하지만 상대도 바보가 아니지 않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저들도 알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그게 문제일세. 그래서 나는 저들이 어찌 나올지가 궁금해. 걱정도 되고.”

비단 그런 걱정을 하는 이가 자밀뿐일까. 적의 속셈을 헤아리고 싶은 이는 이 테리브란에만 해도 수백 명이 넘을 것이다. 물론 보리스도 그중 하나였다.

“실감이 나지를 않아.”

“뭐가 말인가?”

“이 전쟁이 끝날 즈음엔 제국의 주인이 가려지는 것 아닌가.”

“음. 그렇겠지.”

보리스가 조금 들뜬 기색을 드러냈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 자밀은 그런 친우이자 매제를 보며 실소했다.

“긴장은 되지 않나?”

“긴장? 글쎄. 잘 모르겠군. 긴장보다는 뭐랄까, 흥분이 더 크네. 자네는 그렇지 않나? 우리는 지금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거야. 후세의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하겠지.”

“역사의 중심에서 이름 한 줄 못 남긴 채 부질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네.”

“하기에 따라 한 줄이 아니라 수십 줄을 남길 수도 있겠지. 길을 떠나기 전에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할 수는 없어.”

“그래. 그런 건 자네답지 않지.”

원래 그런 사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자밀은, 하나뿐인 누이의 반려가 조금은 몸을 사려주었으면 했다. 개인으로도 크렘보르 가문의 후계자이자 독자가 아닌가. 보통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제 몸 아끼기를 금쪽같이 아끼는데, 어째 보리스는 전장에서 백부장으로 구르던 때보다 더 과감해진 것 같았다.

“바크렌에서 군대가 내려온다고 하더군.”

“바크렌? 티브리악이 움직이는 건가?”

자밀은 듣지 못한 소식이었다. 우슈무르 가문의 당주이기는 하나, 조정의 실세 중 한 명인 자이드라 멕시스와 직접 끈이 닿아 있는 보리스였기에 이런 기밀도 보다 먼저 접하곤 했다.

“음. 끌어모을 수 있는 전력은 죄다 끌어모을 생각인 것 같아.”

“다른 이유일 수도 있네. 바크렌의 평탄 작업이 시작된 지도 꽤 되었으니, 티브리악에서도 성의를 보이라는 뜻일 수도…….”

“견제인가?”

“전하의 뜻은 아닐 것 같지만…내 생각은 그렇네.”

자밀이 신중하게 의견을 표하자 보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정말이지, 언제 어디서든 정치로군.”

“뭘 새삼스럽게. 자네도 다 알지 않나? 조정에서 결정되는 모든 일은 정치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아.”

“그래. 어제도 배우고, 오늘도 배우고 있네. 내일도 배우게 되겠지.”

자밀은 쓴웃음을 짓는 보리스를 보며, 훗날 그가 조정에서 목소리를 낼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본인이 인정을 할지 안 할지는 모르지만, 보리스는 그의 부친을 닮았다. 자밀의 눈에는 그래 보였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군인. 자밀 본인도 그런 부친을 두었었기에, 그런 자들이 대개 어떤 길을 걷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염증을 느끼게 되지. 적아가 분명한 전장과 달리, 조정의 정치판은 지저분하고 난잡하기 이를 데 없으니.’

그런 것도 나쁘지는 않다. 얽히지 않는다면 해를 입을 일도 없으니. 평온한 삶을 위해서는 오히려 정치판에서 멀어지는 것이 나을지도.

‘군인에게 평온한 삶이라. 그것도 우습군.’

우습지만, 아마 모든 군인이 바라는 삶일 것이다. 평온하기 위해 칼을 든다니, 참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그런 그렇고, 그 말썽꾸러기는 요즘 좀 어떤가?”

“여전하지.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기는 한데, 별로 달라지지는 않았어. 불안해하는 것 같더군. 그 겁쟁이 같은 모습이 그 녀석의 진면목이겠지.”

평소 당당하던 자하브의 삼남은 평소의 모습을 잃었다. 오만한 귀공자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집을 잃어버릴까 끙끙대는 한 마리 비루먹은 개새끼일 뿐.

처음에는 그런 판셀 자하브를 보며 즐거워하던 보리스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별 볼 일 없는 상대를 가지고 낄낄대는 것은 그와 맞지 않았다. 눈 밖에 난, 가치 없는 적을 신경 쓰는 것은 시간 낭비다. 다만 한심스러운 것은, 저런 저열한 자인지도 모르고 그 때문에 속을 태웠던 과거의 자신이다.

‘내가 놈이었다면 어땠을까.’

내 집이 불에 탈 위기가 된다면 어떨까. 물론 그만큼 거대하고 화려한 집이어야겠지만.

‘뭐, 가정은 무의미하지.’

그럼에도 한번 생각을 해보자면, 애초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만들면 된다. 하지만 그러려면 대체 얼마나 강한 힘이 있어야 할까.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는 외풍에 휘둘리지 않는다.’

야스메티가 해준 말이었다. 언젠가 그가 부친의 뒤를 이었을 때, 크렘보르라는 나무를 그런 흔들리지 않는 거목으로 만들라며.

야스메티는 떠났지만, 보리스는 종종 그가 해주었던 말들을 지금처럼 곱씹곤 했다.

‘내 자식들에게, 보다 더 안정적인 미래를 선물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며, 해야 하는 일이겠지.’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아내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언젠가 생길 자식들을 떠올리며 다짐한다.

‘군인에게 전쟁이란, 더없는 기회가 아니겠는가.’

자밀은 그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흥분한다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다가 아니다. 보리스의 마음은 그보다 더 큰 것을 향해 뛰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삐 움직이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는 보리스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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