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후우…후우…….”
할렌은 이마에서 흘러내린 구슬땀을 손으로 훔치며 가빠진 호흡을 가라앉혔다. 쉼 없이 움직인 몸이 과장 조금 보태서 불구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좀처럼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달라졌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매달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좋은 쪽으로의 변화였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런.’
예전이었으면 이 정도 힘을 썼다고 해서 헉헉대지 않았을 것이다.
‘인정하기 싫구만.’
체력만 문제가 아니다. 전체적으로 몸이 삐걱대는 것이 느껴진다. 요즘 들어서 갑자기 이런 것도 아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꾸준히 그런 느낌을 받아왔다.
‘몸을 험하게 굴리긴 했지.’
어렸을 적에 부족을 떠나올 때, 아니 그 전부터 또래들보다 훨씬 험한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나마 조금 신세가 필 무렵부터는 전장에서 몸을 혹사했고.
생각해보면 그나마 지금까지 무탈했던 것만 해도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할렌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과, 그에 따른 변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변화, 아니 쇠락을 인정하는 순간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군터 장군은 말할 것도 없고, 살라스님도 멀쩡하다. 그런데 어째서 나만…….’
험하게 살아왔기로 따지면 둘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과 달리 젊었을 적 못지않다. 군터야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살라스는 아니지 않은가.
‘기력이 쇠하기는커녕, 오히려 젊었을 때보다 더 힘이 넘치시는 것 같단 말이지.’
아무에게 티를 낸 적은 없지만, 할렌은 내심 살라스에게 부러움…어쩌면 질시의 감정까지 느끼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점점 약해지는 몸을 실감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지저분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까지나 현역일 수는 없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러나 손에서 칼을 놓고 물러나야 한다면, 그 시기는 스스로 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 할렌은 물러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라모트도, 로우렌도, 이제는 내 손을 떠났다.’
걱정거리였던 자식들은 나름대로 길을 찾은 듯했다. 테리브란에 있는 보리스가 그 둘을 필요로 하는 듯하니 잘 이끌어줄 것이라 믿었다. 매번 자식들을 보내라보내라 노래를 부르던 루시도 이제 마음을 놓았을 터.
‘욕심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내 자리에서 버티는 것뿐.’
권력 욕심이 아니다. 쓸모없어지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물론 할렌은 자신이 일선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군터가 홀대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보며 인상을 찡그린 할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아주 오랜만에 모페이브를 찾아갔다.
“할렌님. 이거 의외로군요.”
모페이브는 특유의 편안한 미소를 머금으며 할렌에게 자리를 권했다. 할렌은 그가 가리킨 의자에 조용히 앉으며 살짝 고개부터 숙였다.
“늦은 시각에 실례를 범하는군요.”
“별말씀을. 그보다 말씀처럼 이런 시각에, 그것도 따로 저를 찾아오신 것을 보면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민망하군요. 하지만 정확하십니다. 아쉬울 때만 찾아뵙는 것 같아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만…….”
“그런 말씀 마십시오. 할렌님이 한가하신 분도 아닐뿐더러, 그간 제 연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배려해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 생각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변명이 아니라 정말 사실이었다. 할렌과 모페이브는 소원한 사이가 아니었다. 알아온 지가 오래되기도 했고, 그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온갖 일들을 겪기도 했다. 그러니 특별히 가깝게 지낸 것은 아니라 해도, 서로에게 필요한 가벼운 도움 정도는 얼마든지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할렌은 푸근한 분위기를 풍기는 모페이브를 보며 몇 번이나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음…….”
할렌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모페이브는 옅게 머금고 있던 웃음기를 지우고 침음을 흘렸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할렌님. 인간의 몸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힘을 잃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저는 아직 칼을 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할레님은 아직 정정하십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물론 모페이브는 할렌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알았다. 억지로 버티고 싶지 않다는 뜻이리라. 최고의 상태로, 젊었을 적에 뒤지지 않는 몸 상태로 조금 더 칼을 쥐고 싶다는 뜻이겠지.
‘허어.’
술사인 모페이브는 할렌의 심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술사들은 무인들에 비해 육신의 쇠락에 영향을 받는 부분이 적기 때문이다. 나이가 먹어도, 물론 머리가 조금 둔해지기는 하겠지만 얼마든지 진리를 탐구하고 신비를 연구할 수 있다. 하지만 무인들은…….
“제가 어떻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전날, 각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상상도 해본 적 없는 힘이 몸에 깃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요.”
“할렌님. 각인이라는 것은 분명 피시술자의 몸에 술법의 힘을 부여해주지만, 그 힘이라는 것도 결국 원기에 기대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각인의 힘을 사용해보셨을 테니, 분명 할렌님도 느끼셨을 텐데요.”
할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제가 알기로, 일반적인 각인이 아니라…보다 은밀하게 전승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모페이브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할렌이 정말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그가 어디서 이런 위험한 지식을 접했는지 궁금해졌다.
“…분명 그런 것이 있기는 합니다. 허나 그런 것들은 대부분 금술로 지정되었지요. 그리고 금술이라는 것들은 대개, 금술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상관없습니다.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요.”
“명을 깎아 먹는 일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말 아래의 열흘보다, 말 위에서의 하루가 낫습니다.”
“…….”
솔직한 심정으로, 모페이브는 할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할렌을 어리석다 여기지는 않았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중히 여기는 가치가 있는 법이다. 안락한 삶을 사랑하는 그와 달리, 할렌은 위태로운 투쟁의 삶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이해는 가지 않지만, 모페이브는 할렌을 존중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저도 더는 만류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허나, 저는 각인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몇 가지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할렌님께 도움이 될만한 것은 없습니다.”
“음.”
희색이 떠올랐던 할렌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그를 보며 모페이브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나 금술에 대한 지식은 지극히 비밀스럽게 전승되곤 하지요. 반드시 알아낼 수 있다고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 말씀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할렌이 돌아가고, 모페이브는 한참 동안 고민을 거듭했다.
이미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한 마당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잘한 일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장군께는…말씀을 드려야 할까.’
어지간한 일은 다 보고를 해왔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개인사였다. 할렌이 군터의 수하라고는 하나, 아마도 할렌은 이 일에 대해 군터에게 알리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래. 아직은 이르다. 마땅한 금술을 찾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벌써 고할 필요는 없겠지.’
고민을 거듭하던 모페이브는 결국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각인. 각인이라.’
굳이 각인이 아니더라도, 육신의 힘을 높여줄 수 있는 술법이면 된다. 그렇다면 강체술 쪽으로 알아봐야 하는 걸까.
‘뜻하지 않게 숙제가 생겼군.’
물론 그래도 주는 여전히 보주의 연구다. 할렌이 요구한 것은…여유가 생길 때마다 알아보면 될 터.
안 그래도 보주의 연구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던 모페이브다. 그런데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버렸으니, 조만간 그의 이마에 주름살이 늘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 * *
“욜든 강 쪽에 요새를 축조하고자 합니다.”
살라스의 말에 군터는 벽에 걸린 지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쪽 벽을 거의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지도 덕분에 욜든 강이 어디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솔롬에서 동쪽으로 엿새, 내지는 이레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강.
“엄밀히 따지면 판니른 밖이군.”
“그렇기는 합니다만, 누가 따지겠습니까. 그곳에 요새를 세운다면 적이 지난번처럼 들이닥치더라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겠지요. 또한, 하루 이틀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음.”
확실히 그렇다. 적이 동쪽에서 온다면, 욜든 강을 지나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느냐.”
“요새라고 말씀드리기는 했습니다만…규모 있는 초소 정도면 족하지 않겠습니까? 고렘의 힘을 빌린다면 그 이상도 가능하겠습니다만.”
“기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렇다면…….”
“허락하지. 재물을 아낄 필요는 없다. 고렘도 지원하마.”
“믿어주신 만큼,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군터는 희색을 띤 살라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활기가 넘치는군.’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모두가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알고 있다. 당장은 한걸음 떨어져 있는 판니른과 솔롬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는데, 유독 살라스는 그런 분위기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긴장감보다는 기대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본래 이런 성향은 아드리안 정도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었는데, 지금의 살라스는 그 아드리안보다도 더했다.
‘이 정도로 급격한 성정의 변화라…….’
자연스럽지 않다. 물론 큰일을 겪었을 때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살라스의 경우는 그런 것과도 다르다.
그렇다면 의심해볼 수 있는 것은…한가지뿐.
군터의 시선이 살라스의 오른팔로 향했다. 옷에 가린 데다, 얇은 가죽 장갑까지 껴서 맨살이 보이지 않았다. 살라스는 이질적일 만큼 창백한 오른팔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아서 가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가리곤 했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뭐, 상관없겠지.’
침착하던 성정이 다소 정력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전의 모습도 괜찮았지만, 지금의 변한 모습도 꽤 마음에 들었다.
“장군.”
살라스가 보고를 마치고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페이브가 그를 찾아왔다.
“연구에 대한 성과가 있어 보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성과?”
“예.”
모페이브가 드물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