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1화
군터는 하잘로 가서 로드니 캄브라이와 만났다.
“전쟁이 벌어질 것 같소.”
“바라눔 트라소프와 말인가?”
“그 외에 달리 누가 있겠소. 언제고 벌어질 일이었지. 이 대전의 향방에 따라 우리 모두의 명운이 갈릴 거요.”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것치고 로드니 캄브라이는 제법 담담해 보였다.
“서쪽의 황자는 아군이 총력을 다해 대적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적이오. 조정에서도 바짝 긴장한 모양이더군.”
“명령이 내려온 건가?”
“그렇소. 일단 내려진 명령은 대기지만…언제든 병력을 보낼 수 있도록 준비시켜 놓으라더군.”
“규모는?”
“최소 5만.”
많다. 터무니없을 정도는 아니나, 판니른의 역량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빠듯한 숫자. 물론 군인다운 군인으로만 5만을 요구한 것은 아닐 테니, 어떻게 머릿수를 맞추는 선에서 타협을 본다면 영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만…그렇다 해도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1만 정도뿐이오.”
“너무 적군.”
“판니른을 완전히 비워도 된다면 방위군 병력 전부를 돌려도 상관없겠지.”
로드니 캄브라이는 얼마 전에 아바시스의 군대가 들이닥쳤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두 번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병력을 뺄 때는 빼더라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데는 그도 동의했다.
“그렇다 해도 1만은 너무 적소.”
“지금부터 착실히 준비한다면 1만에서 더 늘어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말한 대로요.”
“으음.”
“내게 말할 것이 아니라, 귀족들을 닦달하는 편이 더 나을 거요. 그들이 거느린 사병을 조금씩만 보태주어도 그대의 시름이 크게 덜어질 테니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 않소. 하아……. 아무튼 알겠소이다.”
골치 아픈 이야기를 먼저 끝낸 후. 로드니 캄브라이는 보다 은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조정에서는 전쟁이 벌어질 경우, 저들의 선침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소. 그렇게 될 경우, 아군은 수비로 일관할 것이며…주전장은 아록과 리바스트라가 될 거요. 어쩌면 타라냐드까지도.”
“버티기로 일관한다는 말인가?”
“저들의 세가 그만큼 강하니까. 또한,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보고 있는 거요. 동부 3주가 이미 병합되었으며, 폴츠와 렌도 시간문제지. 렌은 병합을 한다고 해도 예전의 모습을 반이라도 되찾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그렇다 해도 상관없지. 구 2황자의 세력권을 병탄한 것만으로도 우리 전하께서는 압도적인 우위에 서 계신 거요. 그 우위를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일 뿐.”
“그것만이 아니겠지.”
“음?”
“대전이라고 할 정도의 전쟁이라면, 동원되는 병력 역시 상당할 터. 그만한 군대를 먼 적지로 보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아. 맞소. 일리 있는 이야기요. 허나 그 결정이 전략적인 이유로만 이루어졌다고 믿소?”
“아니라는 말이로군.”
군터의 말에 로드니 캄브라이가 실소했다.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생각하지 않은 건지 모르겠군.”
안다. 조정에서 논의되는 사안들이 효율과는 무관하게, 정치적인 이유로 결정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그러나 그야말로 세력의 명운이 걸려있다고 봐도 무방한 중대사가 아닌가. 그런 일에까지 정치적인 이유를 대입하려 하다니, 군터가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자하브와 카리아는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격이오. 테리브란에 있던 가문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본가로 돌아갔다더군. 나름대로 준비를 하려는 것이겠지.”
“반발하지는 않았나?”
“명분이 없지 않소. 자이드라 멕시스가 고안한 전략이지만, 그는 타라냐드가 전화에 휩싸이는 것을 감수하고 전하께 주청을 올렸소. 여기에 대고 반발한다면 꼴이 이상해지지.”
“자이드라 멕시스가 크게 마음을 먹었군.”
“대단한 독심이오.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나름의 계산도 있었을 테고.”
“계산?”
“자신의 근거지가 크게 상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합리적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러한 전략을 직접 입에 담았소. 이번 일로 테리브란은 물론이고, 각지의 인사들이 자이드라 멕시스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그전까지 자이드라 멕시스에 대한 세간의, 그러니까 귀족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의 인식은 그리 좋지 않았다. 대단한 권력자라는 것은 다들 인정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음험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자이드라 멕시스에게 있어, 테리브란 조정에 똬리를 튼 권력자들보다 더 큰 장애물이었다.
“대의 앞에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대범함을 보였소. 그는 위험부담을 졌지만, 대신 보이지 않는 큰 이득을 얻은 셈이지.”
“그렇군.”
위험부담을 지는 것은 자하브와 카리아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위험의 크기로 따지면 두 가문이 더 크게 짊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영리하고 과감하게 한발 먼저 움직였고, 그 대가를 취했다.
“대단한 자요. 심계가 깊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야기가 나온 그 자리에서 곧바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을 보면 순발력도…….”
“미리 생각해두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음?”
“서쪽의 황자가 움직일 거라는 것은 어차피 다 짐작하고 있었던 일 아니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응책 역시 고안해볼 수 있었겠지.”
“흐음. 일리 있는 말이오. 다만 그럴 경우, 더 무서워지는군.”
그 점은 군터도 동감이었다. 무섭지는 않지만,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어떻게 그 어린 나이부터 지금까지 타라냐드의 왕 행세를 해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사람을 보내왔소. 그가 말하길, 곧 나를 위한 시간이 올 거라더군.”
“5만 병사를 거느리고 집안에 인사라도 하라던가.”
“하하. 그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소. 활약할 기회가 올 거라는 뜻이겠지.”
힘과 힘이 부딪치는 전면전이다. 전쟁의 끝은 두 황자 중 한 사람의 죽음으로 장식될 터. 서로의 모든 것은 거는 대전인 만큼 동부 3주. 아니, 4주의 병력도 이변이 없는 한 결국 투입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판니른의 총독인 로드니 캄브라이의 존재감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가 군대와 함께 움직인다는 전제 하에.
“나설 참인가?”
“물론이오.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누가 가주 자리를 떠먹여주는 것이 아니니까. 아아. 염려하지 마시오. 군사(軍事)에 개입하는 일은 없을 테니.”
로드니 캄브라이가 염려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괜한 말이었다. 군터는 설령 그가 군사에 개입하려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만에 하나 허튼짓을 벌이려고 한다면 동맹이고 뭐고 짓눌러버리면 그만이니.
그런 군터의 속을 짐작이나 하는지, 로드니 캄브라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잔을 권했다. 군터는 그 후로 그와 몇 잔을 주고받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놈은?”
두서없이 툭 던진 말이었지만 그라모트는 보리스가 말한 ‘그놈’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이제는 익숙하다. 그놈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더 험한 말이 나오지 않은 게 어디인가.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신 못 차리는군. 멍청한 놈.”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리지만, 그런 말을 뱉는 얼굴은 편하게 풀어져 있다. 그라모트는 보리스의 기분이 며칠 전부터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알기에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그놈도 사라져버리면 좋을 것을. 아쉽구나.”
“삼남 아닙니까. 게다가 테리브란의 군적에 이름이 올라 있으니, 중진들은 본가로 돌아가더라도 굳이 따라갈 이유가 없지요.”
“네 생각이더냐?”
그라모트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턱을 긁었다.
“…그게, 로우렌이.”
보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자이드라 멕시스가 제안한 전략에 대해 당사자로부터 전해 들었다. 부친인 군터가 자이드라 멕시스와 손을 잡았기에, 조정의 굵직한 동향에 대해서는 자이드라 멕시스로부터 정보를 얻는 편이었다. 물론 그렇게 얻는 정보는 자이드라 멕시스가 주고 싶은 것들뿐이지만, 조정에 달리 줄이 없는 보리스로서는 그마저도 소중했다.
‘자기 집이 불구덩이에 휩싸일 판이니, 속이 타들어가겠지.’
자이드라 멕시스에게서, 정확히는 그가 보낸 서신을 통해서 앞으로의 대전략에 대해 전해 들은 보리스는 다음날 보게 될 판셀 자하브의 얼굴이 궁금했다.
‘근 몇 년간 가장 통쾌한 순간이었지.’
예상대로, 다음날 만난 판셀 자하브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밤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기야, 자칫 하다가는 가문의 근거지가 불탈 상황이 되었는데 어찌 편히 잠을 이룰 수 있었겠나. 삼남이라고는 하지만, 본인이 가문을 입에 달고 사는 것처럼 가문에 대한 소속감이 남다른 판셀 자하브였다. 그런 그이기에, 가문의 위기가 자신의 위기보다 더 크게 다가왔을 터.
평소 보리스는 남의 불행을 가지고 웃음 짓는 것은 당당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해왔지만, 판셀 자하브에게 만큼은 예외였다.
“마음에 들어.”
“그날 이후로는 조용합니까?”
“정신이 없어 보이더군. 혼자 생각에 잠기는 시간도 많은 것 같고. 뭐, 아무튼 덕분에 유치한 시비는 걸지 않으니 다행이지.”
로우렌과의 대화를 통해 판셀 자하브가 자신에게 가진 악의가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 후에 부글부글 끓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기는 했으나, 가문만 믿고 설치는 얼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불쾌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바라눔 트라소프. 무척 용맹한 자라고 들었지. 제국 군부의 신망이 대단하다던가.’
만만치 않은 대적이다. 그가 움직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로 줄곧 무거워진 테리브란의 공기가 그를 증명한다.
‘그래. 마냥 즐길 일은 아니다.’
당장은 그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의 임무는 테리브란을 수호하는 것이지, 저 멀리 아록과 리바스트라의 주 경계까지 가서 적을 막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당장은 상관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는 모르는 일이다. 상술했듯,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어쩌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까지 순서가 돌아올지 모른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아직 적응도 다 하지 못했을 텐데, 벌써부터 긴장할 일이 생기는구나.”
“전쟁이 격화된다면 판니른에 있었던들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그리고 군문에 몸을 담은 이상, 항상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라모트의 무뚝뚝한 말에 보리스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