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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80화 (680/1,064)

680화

만남 이후, 나짐은 군터에게 중용을 받기 시작했다. 모페이브가 홀로 진행하고 있던 보주의 연구에 함께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빠르군.”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짐이 모페이브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같은 술사들끼리는 어지간하면 상호존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정도의 깍듯한 예는 선배 대접을 한다고 쳐도 과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나짐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찔리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완이 좋소이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소.”

“죄송합니다. 익힌 재주가 재주인 터라. 불쾌하셨다면…….”

“아아. 이해하오. 불쾌하지도 않고. 정말 탓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움츠러들 필요 없소.”

“감사합니다.”

사정을 헤아린다고 해도, 결국 속인 셈이니 나짐으로서는 모페이브가 불쾌해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속으로야 어찌 생각하든, 겉으로나마 괜찮다고 말해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가 함께 연구해야 할 물건에 대해 들으셨소?”

“아니요. 장군께서는 모페이브님께 직접 들으라 하셨습니다.”

“음. 일단 가십시다. 가서 설명하도록 하지.”

보주가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보물인 만큼, 그것을 연구하는 장소는 수십의 병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따로 명칭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알 방도가 없어 일단은 보주라고 부르고 있소.”

“보주…….”

몇 개의 철문을 지나니 협소한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나짐은 온갖 술법 도구들이 곳곳에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이 모페이브의 연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장군께서 보주의 연구를 명하셨다면 믿어도 되는 자라고 여기셨다는 뜻. 그러니 나도 숨기지 않으리다. 보주는 헤이모라의 지하에 있는 미궁에서 가져온 물건이오.”

“헤이모라? 군주 쿠엘단의 도시가 아닙니까? 헌데 지하 미궁이라니요? 그건 또 무슨…….”

“긴 이야기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드리겠소. 그보다, 보주에 대해 더 이야기하도록 하지.”

“아, 예.”

사령술사로 살아오며 몸에 밴 것일까. 나짐의 태도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모페이브는 나짐의 그런 태도가 만족스러웠다. 흥분하는 것보다는 조심스러운 것이 좋다. 저 조심스러움이 연구에까지 이어질 수도 있을 테니.

“보주에는 고대인들의 영혼이 담겨 있소.”

“영혼…말입니까.”

“그렇소. 처음에 나는 보주의 기능 중 하나가 영혼을 담아두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

“아니었다는 말씀이군요.”

“지금은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가둬두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소.”

“감옥처럼 말입니까?”

“그렇소. 감옥처럼.”

거기까지 말한 모페이브는 드디어 나짐에게 보주를 보여주었다. 보주를 직접 본 나짐은 눈을 빛내며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는 슬쩍 모페이브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모페이브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보주에 가까이 다가갔다.

“보주에 쓰인 술식을 알아보겠소?”

“아니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전에 하셨던 말씀이 이해가 가는군요.”

“그대는 사령술을 익혔으니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으음.”

모페이브의 허락 하에, 자밀은 본격적으로 보주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보주의 표면에 새겨진 술식을 살피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술력을 불어 넣어보기도 했다. 바로 그때, 그는 머릿속을 울리는 괴성을 접했다.

[아아아아―!]

[내보내 줘! 내보내 줘!]

자밀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대여섯 걸음을 물러난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그러자 모페이브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들은 모양이군.”

“방금 그것은…….”

“보주에 갇힌 영혼들이오. 처음에는 그럭저럭 이성을 유지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미쳐버렸지.”

“머리가…깨질 것 같습니다.”

“그대는 사령술을 익혔으니, 나보다 더 그들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을 거요. 반동 역시 크게 느꼈겠지.”

모페이브와 천천히 대화를 나누면서, 나짐의 일그러졌던 표정도 점점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금 전의 그 끔찍한 고통은 여전히 화인처럼 남았기에, 나짐은 보주에서 멀찍이 떨어져 그것을 주시했다.

“이러면 섣부른 접촉은 위험하겠습니다.”

“바로 그 점이 연구의 난항 중 하나지. 동시에 연구할 거리 중 하나이기도 하고.”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좋군. 이제 우리는 이 보주를 함께 연구해나갈 것이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군터가 술사들을 모집하고, 판니른 동부로 몰려든 난민들을 정착시키는 동안 판니른 밖에서는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하.”

테리브란의 조정. 연일 온갖 주제로 격론이 벌어지는 그곳에, 지금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정황은 명백합니다.”

“그런 것 같군.”

휘하 무장의 말에 7황자가 담담히 답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생각에 잠긴 것 같은 그 모습이 조정 대신들의 입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콜레인에서 족히 5만은 되는 군대가 움직였습니다. 청기(靑旗)를 든 군대입니다.”

여기에 모인 이들 중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는 이는 없다. 사실상 명예직인 두 품계를 제외하고, 제국에서 무관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 제국을 통틀어 그 자리에 오른 이는 단 둘뿐이며, 그중 한 명이 서쪽의 황자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가 움직였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물론 누가 움직였네 어쩌네 하기 전에 5만이나 되는 군대가 이동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아직 주 경계를 넘은 것은 아니니…….”

“어찌 그런 안일한 말씀을 하시오.”

“무슨! 안일하다니! 그런 것이 아니라, 중대한 일인 만큼 조금 더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말이었소.”

“어차피 저들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었던 것.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소. 당황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지.”

무장은 쏘아붙이듯 말하고는 다시 옥좌의 황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전하. 전운이 드리우고 있습니다. 일전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옛적에 분부를 내리신 덕에, 군대는 상시 준비되어 있습니다. 명만 내리신다면 10만 대군이 즉시 아록과 리바스트라로 진군할 수 있습니다.”

황자가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빛내는 무장들과, 이런저런 계산으로 머리가 복잡해 보이는 신료들에게 번갈아 눈길을 주었다.

“다른 의견은 없는가?”

그는 바로 그, 머리가 복잡해 보이는 신료들을 보며 물었다. 정확히는 그들 중에서도 제레이스를 위시한 고위 귀족들에게.

“전하.”

그의 눈길은 가장 먼저 다이시리 제레이스를 향했지만, 정작 입을 연 것은 다른 자였다.

“서부 총독.”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 자. 그는 바로 서부 총독 자이드라 멕시스였다.

“바라눔 트라소프 황자는 호전적인 성미로 유명하지요. 그런 자가 지금까지 인내했으면 오래 참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래 참았다……. 그래. 오래 참았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았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의 배다른 형제가 어떤 사내였는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망나니 행세를 하며 좋을 대로 황도를 휘젓고 다니던 그였으나, 눈만큼은 똑바로 뜨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남달랐지.’

그가 직접 처리한 바라누르와는 같은 배에서 난 형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바라누르가 고양이라면 바라눔은 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나운 기질과 자질 때문에 일찍부터 전장을 누볐으며, 그로 인해 군부의 인사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분별없이 나서다가 조용히 사라질 줄 알았건만.’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피를 타고 났음에도 암묵적인 제약에 묶인 것이 황자들이다. 황제가 영원불멸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자들은 황자들이 제국의 대소사에 관여해 역량을 발휘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렇다고 황제가 자식들에게 관심을 두는 것도 아니니, 모난 돌이 된 황자들은 언제 튕겨 나가도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산송장이 신세가 된 황자가 적지 않았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눈치가 빨랐던 것인지.’

그렇게 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남방의 소국과 벌어진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성미를 주체하지 못하다 결국 일을 치렀구나 싶었지만…결과적으로 그 일이 목숨을 살려준 꼴이 됐다.

‘운이든 실력이든, 결국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한 것이겠지.’

그 일로 바라눔에 대한 군부의 신망은 더욱 굳건해졌다. 제국에 단 둘뿐인 청포 중 하나가 황도에서 멀찍이 떨어진 서쪽 땅까지 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일전을 벌인다면…이쪽이 불리하겠군.’

차지한 땅도, 인구도, 심지어 병력의 수도 이쪽이 앞선다. 하지만 전쟁은 머릿수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바라눔 트라소프의 이름 아래 모인 군대는 제국의 최정예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강군이다. 병졸부터 장수까지, 질로 비교하자면 아무리 낙관적으로 보아도 이쪽이 부족함을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은 우리의 편입니다. 그것을 저들도 알고 있기에 먼저 싸움을 걸어오는 것일 테지요.”

자이드라 멕시스는 이미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가정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이들이 몇 있었지만, 그가 지금 황자에게 이야기하는 중이었기에 감히 그의 말을 끊지 못했다.

“저들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필요는 없습니다. 문을 닫아걸고 방비에만 집중하면 될 것입니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저들이 아무리 준비를 단단히 했다 해도, 대군을 길게 운용하는 것은 저들에게도 큰 부담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차하면 아록과 리바스트라를 벽으로 삼아 버텨도 좋겠지요.”

“그 무슨!”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던 그들은 황자의 가라앉은 시선이 자신들에게 향하자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조금 전의 고함이나, 자신에게 향하는 사나운 눈길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동부 3주, 아니 4주가 안정되어 가고 있습니다. 렌은 기약이 없지만, 그 4개 주만으로도 충분히 든든하지요. 두 개 주로 적의 대군을 붙들어놓아도 손해가 아닌 이유입니다.”

“여차하면 두 개 주가 아니라 세 개 주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흥미롭군.”

아록과 리바스트라에 더해, 타라냐드에까지 전화가 미칠 수 있음을 언급했다. 그런데도 자이드라 멕시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정말 적의 창칼이 타라냐드에까지 미쳐도 지금 말한 것처럼 태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이 자리에서는 기꺼이 부담을 감수하겠다고 답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전 언성을 높였던 자들은 혀끝의 독기를 상당수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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