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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79화 (679/1,064)

679화

모페이브는 테리브란에서 온 술사들이 눈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실망은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술사들의 생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실력 있고 명성이 높은 술사들은 이미 다 몸담은 곳이 있다는 것 정도는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크렘보르의 이름을 걸고 술사를 모집한다고 해도 고급 인력이 모여들 거라는 기대는 품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연구일세. 한 고대 유적에서 유물을 발견했는데, 이제껏 보지 못한 옛 시대의 유물이어서 술식을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네.”

“옛 시대라 하심은, 어느 정도인지…….”

모페이브는 말을 편히 했고, 새로 온 술사들은 공손하게 받았다. 모페이브가 크렘보르 가문에서 먼저 일한 선배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룬 업적에 대해 술사로서 존경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페이브. 고렘의 창조자가 아닌가.’

이즈음, 고렘에 대한 정보는 테리브란의 술사라면 가벼운 풍문으로라도 접하고 있었다. 아무리 조정에서 정보를 통제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의 입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조정의 인사들을 통해 이야기가 새어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조차 짐작할 수 없네. 말했듯, 이제껏 내가 본 적이 없는 형태의 술식이었다네.”

“보고 싶군요.”

“보게 될 걸세. 그대들이 크렘보르를 위해 헌신한다면, 언젠가는 말이지.”

당장은 보여줄 생각이 없다는 뜻. 모페이브의 단호한 말에도 술사들은 불쾌해하거나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고대의 유물이라는 것은, 물론 유물도 유물 나름이기는 하지만 대개 보물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고대의 잊힌 지식을 탐구할 수 있는 매개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물며 모페이브 정도 되는, 상당한 성과를 이룬 술사가 본 적도 없는 형태의 술식이라고 할 정도면 일반적으로 발굴되는 수준의 유물은 아닐 터.

기대가 차올랐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머지않아 진귀한 고대의 유물을 연구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나짐이라고 했는가? 물의 술법을 주로 쓴다고?”

“예. 그렇습니다만, 대단한 수준은 아닙니다.”

물론 그럴 것이다. 대단한 수준이라면 진작에 다른 귀족 가문에 영입되었겠지.

모페이브는 이국적인 외모의 술사를 잠깐 살피다가 그에게 적절한 임무를 내주었다. 개척촌의 부지를 살피는 임무였다. 근래에 난민의 유입이 크게 늘면서 솔롬 부근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들을 위한 개척촌을 세워야 했는데, 마을을 세우기 위해서는 기타 입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물이 중요했다.

“대충 오백 정도를 감당할 수 있으면 되는 겁니까?”

“음. 그 정도면 충분할 거요.”

“알겠습니다. 허면 바로 움직이지요.”

“바로 말이오? 처음 솔롬에 왔으니 조금은…….”

“어차피 줄곧 머물게 될 집입니다. 조금 늦든 빠르든 결국은 익숙해질 테니, 지금은 여유를 부리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습니다.”

“좋은 말이군. 그대가 그리 말한다면 내 어찌 만류하겠소? 장군께서 그대의 근면함에 기뻐하시겠군.”

“별말씀을.”

모페이브는 담담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나가는 나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단할 것 없는 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평가가 조금은 더 높게 바뀌었다. 당장의 능력이야 어떨지 몰라도, 부지런히 일을 찾아다니는 술사는 보기 드물다. 물론 저 모습이 잘 보이기 위한 꾸며낸 모습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성의라도 보인다는 것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나짐이라.’

모페이브는 그 이름을 네 개의 이름 중 가장 먼저 기억했다.

* * *

살라스가 군터의 앞에 서서 보고했다.

“개척촌이 들어설 부지를 스물세 곳 찾아냈습니다.”

“스물셋이라. 그 정도면 충분한가?”

“앞으로도 난민들이 계속 몰려올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당장 급한 불을 끌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새로 온 술사들 덕분입니다.”

“그 네 명 말인가.”

“예. 특히 나짐이라는 술사가 부지런히 움직였더군요. 그가 아니었다면 시일이 끌리면서 골치깨나 썩었을 겁니다.”

살라스는 콕 집어서 나짐의 이름을 언급했다. 모페이브도 그랬지만, 그 역시 요 한 달간 하루건너 하루꼴로 보고서를 올리는 나짐의 성실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다른 세 명의 술사들도 놀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나짐에 비하면 그들 모두가 게을러 보일 정도였다.

‘상당한 인재야.’

이번에 모집한 술사들이 대단할 것 없다고 들었었고, 그래서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한 달도 되지 않아 완전히 바뀌었다.

‘능력이 출중하면 뭘 하나. 그 출중한 능력으로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면, 능력이 얼마나 뛰어나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런 의미에서, 나짐은 비록 술사로서의 역량은 평범하다 할지라도 일선에서 뛰는 술사로서 상당히 유능했다. 살라스는 만약 나짐이 지금과 같은 자세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일해나간다면, 머지않아 군터에게도 중용 받으리라 확신했다.

“쓸만한 녀석 같더냐.”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부족한 안목으로 살피기에는 괜찮은 자 같더군요.”

“그래?”

잠시 침묵하던 군터가 다시 입을 뗐다.

“불러라. 나짐뿐만 아니라, 나머지 셋도 전부.”

“예.”

그들이 솔롬에 온 후,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별로 관심도 없었고, 이래저래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얼굴도 안 비치고 부릴 수는 없으니, 어떤 자들인지 직접 얼굴을 보고 확인해볼 참이었다.

“크렘보르 장군을 뵙습니다.”

군터는 술사들을 한 명씩 따로 만났다. 관심이 있든 없든, 어쨌거나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그를 위해 일하게 될 술사들인 만큼 한번 살피는 김에 제대로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무색하게, 새롭게 그의 아래로 들어온 술사들은 눈여겨볼 만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술사에게 이런 말을 쓰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모페이브가 왜 기대할 필요 없다고 말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셋에게 조금 실망한 군터는 마지막으로 모페이브와 살라스가 언급했던 나짐을 만났다. 그의 순서는 일부러 마지막으로 빼놓았다. 나름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자였으니, 앞선 셋과는 다르기를 기대했다.

“나짐이라 합니다.”

“이번에 공이 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작은 재주를 보이기 위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을 뿐이지요.”

“그 부지런함이 공이 된 것 아니겠나.”

“그리 봐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과연, 나짐은 앞선 셋과는 달랐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을 이국적인 생김새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말 어지간히 충격적인 생김새가 아닌 이상, 껍데기 따위는 군터에게 있어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보는 것은 그 껍데기 안에 가려진 진짜 모습이었다.

‘이 녀석.’

군터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나름 담담한 척을 하고 있지만, 이마에서 땀방울 몇 개가 흐르고 있는 나짐은 처음부터 그의 흥미를 끌었다.

“그런데…속였군.”

“예? 그게 무슨…….”

“물을 다룬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나다만. 어찌?”

“사령술사인가?”

“…….”

나짐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볼을 지났다. 그 순간, 군터는 나짐의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사령술을 익힌 그다. 또한 사기에 관련한 감각은 일반적인 사령술사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수준이다. 그런 그였기에, 나름대로 꽁꽁 감춰놓은 나짐의 은밀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죽음의 냄새였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하자면, 어설픈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지금은 단지 호기심이지만, 여기서 한 번 더 거짓을 고한다면 그 호기심이 의심으로 변할지도 몰라.”

나짐은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애써 유지하던 담담함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듯하던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속이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장군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령술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좋지 못하지 않습니까.”

“나 또한 사령술을 익혔다.”

“그것이 제가 장군을 찾아온 이유입니다. 장군이라면, 어쩌면 저 같은 자를 거두어주실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지?”

“희망은 있었으나,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리고…소문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었지요. 해서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럴듯했다. 사령술사들이 제국의 음지에 숨어다닌 세월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그 세월 동안 그들이 겪은 고난이 결코 가볍지 않으니 매사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만했다. 어쩌면 나짐은 지금 이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직접 확인하니 어떤가.”

“소문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또한…장군께서 이루신 성취가 믿어지지 않는 수준이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성취? 그런 것이 한눈에 보이나?”

“풍기는 기운으로 가늠할 뿐이지요.”

나짐이 마른침을 삼켰다.

군터가 처음 나짐을 보고 그가 사령술사인 것을 간파했듯이, 나짐 역시 군터를 처음 보자마자 그가 강력한 사령술사임을 알아차렸다.

‘이런 농밀한 사기라니.’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갓 죽은 시체 수백 구를 모아두어도 이 정도의 사기를 풍기지는 않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다. 그 정도로 무지막지한 사기였다. 특별히 의식하고 풀어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기에 민감한 사령술사이기에 저 몸 안에 깃든 죽음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특수한 법보라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저 정도의 사기를 몸에 품고 있을 수 있을 리 없다. 사령술에 대한 성취가 얼마나 되든지 간에, 살아있는 사람이 저럴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은 법보였다. 평범한 법구로는 어림도 없다. 말로만 들어본 법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상념에 잠겨있던 그를, 무뚝뚝한 목소리가 깨웠다.

“그래서, 생각은 정해졌나?”

“…허락해주신다면, 장군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겠다면 허락하지.”

“어찌 감히 다른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장군께서 이 몸을 거두어주신다면, 충성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기대하지.”

나짐이 허리와 고개를 함께 푹 숙이니 맺혀있던 땀이 코끝을 타고 떨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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