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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77화 (677/1,064)

677화

군터가 헤이모라에서 술사들을 탄압한 일은 조용히 퍼져나갔다. 그곳에 있던 술사 중 권세가에 소속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가 없는 무소속 술사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에게 군터의 만행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일, 그러니까 군터가 곤란해지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군터 크렘보르. 그자는 판니른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

“전하의 총신이기도 하지.”

“듣기로는 자이드라 멕시스와도 긴밀한 관계라고 하던데.”

우선 군터 크렘보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도 나름대로 한 지역에서 이름을 떨치는 권력자들이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지역 유지 정도에 불과했다. 한 주의 군권을 쥔 군단장과는 비할 수 없었다. 게다가 테리브란에 있는 황자가 그를 총애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그 자이드라 멕시스와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라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는 마당이다. 이 정도만 해도 손을 쓰기가 부담스러운데, 하물며 명분마저 조악하지 않은가?

헤이모라에, 군주의 땅에 멋대로 발을 들이는 것이 금기라는 것을 모르는 제국민이 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그런 금기를 범했다면,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음이 옳다. 그곳에서 무슨 부당한 일이 벌어졌건, 따질 만한 것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번엔 참아주지.”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말해야 끓는 속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 같았다.

그들은 지금쯤 솔롬에 가 있을 무식한 무부를 실컷 씹어대며 분을 삭였다.

한편. 군터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자들이 자신을 욕해대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살라스가 그의 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해놓았지만, 그의 선에서 처리할 수 없는 일들은 고스란히 쌓였기 때문이다.

“피난민들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땅은 남아돌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무슨 뜻이지?”

“그 어떤 이들이 외지인을 반기겠습니까?”

“아. 그렇군.”

살라스가 조금 돌려 말했지만, 군터는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했다.

“어찌 할까요? 강압적으로 진행하려면 할 수 있겠습니다만.”

양쪽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어차피 판니른에서, 그것도 동부 쪽에서는 군터의 말이 곧 법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해들리르는 몰던의 계략으로 인해 빈사 상태나 다름없었고, 총독은 그의 동맹이라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입을 다무는 편이다.

고만고만한 지역 유지들은 감히 그의 행사에 뭐라 할 처지가 못 된다. 일개 백성들은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느냐?”

“어느 쪽이든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야 그럴 것이다. 난민들을 받아들이면 장기적으로 세수가 늘 것이며, 징집을 해야 할 때도 보다 쉽게 병력을 확충할 수 있을 터. 반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내쫓는다면 당장 민심이 어수선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아바시스의 군대가 들이닥친 이후 어수선해졌던 솔롬과 인근의 민심이 이제야 간신히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받아들인다.”

“예.”

어째서냐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둘 모두 장단이 있으니, 무엇을 택하든 이상하지 않으니까. 난민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추후의 득을 더 중시했다는 뜻일 터.

살라스는 그렇게 짐작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군터는 솔롬과 인근 지역을 크렘보르 가문의 터전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과거 야스메티가 그렸던 청사진을 따른 것이다. 야스메티는 비록 판니른이 일전의 전란으로 다소 피폐해졌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크렘보르 가문이 들어서기 더 적합하다고 했다.

‘혼란이 생긴다면 오히려 더 좋다.’

전란으로, 그 후의 이런저런 일들로 많이 쓸려나갔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유지라고 할만한 자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그들은 지금 고개를 조아리고 숨을 죽이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그런 태도를 유지할까? 그럴 리가.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겉으로만 굴종할 뿐. 언제든 태도를 바꿀 수 있는 녀석들이지.’

문제가 될 만한 일말의 여지라도 있다면 아예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 그것이 야스메티의 생각이었고, 군터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난민의 대량 유입은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요소다. 그들로 인해 혼란이 일어난다면, 그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혹, 직접 손을 쓰실 생각이신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시다면, 언제든 명을 내려주십시오. 처리하겠습니다.”

“직접 말이냐?”

군터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껏 살라스는 특별히 몸을 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직접 나서서 손을 더럽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전과 달리 꽤 적극적이다.

“정리해야 할 자들이 아닙니까. 또, 오랫동안 서류만 붙잡고 있으니 몸이 굳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흠.”

일전에도 몇 번 느꼈었지만, 살라스가 조금 변한 것 같았다. 그 변화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떠나 매사에 진중하기만 하던 살라스의 이런 변화가 군터는 꽤 색다르게 보였다.

* * *

헤이모라에 다녀온 후. 모페이브는 줄곧 보주의 연구에 매달렸다.

그는 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거의 전부를 연구에 쏟아 부었는데,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보주에 대해서 몇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보주는 안에 있는 영혼들에 대한 구속력이 있다. 외부의 작용 없이는 빠져 나오지 못해. 이 정도면, 감옥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하 미궁에서 영혼들이 괴물의 형태로 현신하고 물리력까지 행사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헛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그곳의 봉인 자체가 상술한 외부작용의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 만약 봉인이 없었다면, 혹은 보주가 봉인을 벗어났었더라면 고대인들의 영혼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을 터.

‘영혼들을 가두는 것 외에, 또 다른 역할을 하는 술식이 있다. 비중을 보면 오히려 이쪽이 더 중요해 보여.’

문제는 그 술식 역시 까마득한 고대의 술식인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이건 나 한 사람이 매달린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페이브는 나름대로 객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도, 과대평가하지도 않았다.

“장군.”

보주를 앞에 놓고 미간을 찌푸리기를 며칠. 마음을 굳힌 모페이브는 군터를 찾아갔다.

“보주의 연구를 위해, 술사가 더 필요합니다.”

“술사?”

“예.”

“믿을만한 자가 있는가?”

헤이모라의 지하 미궁에서 가져온 물건이라는 점을 제하더라도, 비밀스러운 보물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 알려져서 좋을 것은 없다. 연구를 한다면 보주에 대해서도 깊숙이 알게 될 터인데, 추후에 입을 막아버릴 것이 아니라면 믿을만한 자로 구해야 한다. 그런데 군터는 술사 쪽으로는 인맥이 없었다. 기껏해야 호닝거 정도? 하지만 그는 지금 고렘의 병기화를 위해 눈코 뜰새 없이 바쁠 터.

“이전에도 몇 번인가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장군. 이번 기회에 술사들을 거두심이 어떨지.”

“음.”

단순히 보주의 연구를 위해 잠깐 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수하로 두라는 뜻이다. 확실히 모페이브가 이 주제에 대해 이전에도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넘겼었는데, 이번에는 모페이브도 꽤 진지해 보였다.

“장군께서도 아시겠지만, 어지간한 권세가들은 술사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습니다.”

드러난 자들만 여럿이고, 드러나지 않은 자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특히, 힘 있는 귀족들이 정적의 암수를 우려해 사령술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었다.

“장군의 명성은 판니른은 물론이고, 테리브란에도 널리 퍼졌습니다. 장군께서 술사들을 찾으신다면 실력 있는 자들이 앞다투어 몰려올 것입니다.”

“글쎄. 퍼진 것이 명성인가? 내 앞이라고 좋은 소리만 하지 않아도 된다.”

정곡을 찔린 모페이브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장군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들이 돌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것은 긍정적이었고, 어떤 것은 그 반대였지요.”

“둘러대지 않아도 된다. 나도 내 이름이 어떤 식으로 도는지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으니.”

사실 잘 모르지만, 대충 짐작은 간다. 뻔한 것 아닌가. 제국의 금기라는 사령술을 써대는 과격한 군인. 어떤 자들은 그것을 조금 더 좋게 포장해서 말할 것이고, 어떤 자들은 거기에 온갖 부정적인 말들을 줄줄이 달아놓았겠지.

“술사들의 반응도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자들은 장군을 경계하며, 어떤 자들은 흥미를 보입니다. 장군께서 이름을 내걸고 술사들을 청하신다면, 적지 않은 이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술사들을 들일지 말지도 결정하지 않았지만, 설령 들인다고 해도 어중이떠중이는 사양이다.”

“어차피 실력 좋은 술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잘 모르더라도, 호닝거 공은 누가 인재라 할만한지 알고 있을 겁니다.”

“좋다. 한 번 해보도록.”

“예. 허면 테리브란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군터의 허락을 얻은 모페이브는 바로 테리브란에 사람을 보냈다.

* * *

“술사들을 모집하라?”

보리스는 솔롬에서 온 서신을 읽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뜬금없기는 하지만, 부친의 지시이니 따라야 했다. 게다가 술사들을 모집하라는 지시는 보리스에게도 썩 괜찮게 들렸다.

‘하긴, 그동안 우리 가문이 너무 조촐하기는 했지.’

크렘보르는 역사가 짧아 명문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권세가라고 할 수는 있는 가문이다. 가주는 한 주의 방위군단장 직을 맡고 있으며, 황자의 총신이다. 게다가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권력자들의 면면도 제법 화려하고.

하지만 그런 가문임에도, 테리브란의 저택을 비롯하여 겉으로 드러난 부분은 별로 권세가스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좋은 기회다.’

이번 일은 가문의 힘을 외부에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다. 술사라는 족속들이 워낙 돈 먹는 괴물로 유명하다 보니, 그런 술사들을 여럿 모집한다는 것은 그들 가문이 그런 괴물을 여럿 거둘 만큼 재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같다.

‘궁정술사 호닝거와 상의하란 말이지.’

얼굴은 모르지만 이름은 알고 있다. 부친을 따라 전장에 나가기도 했고, 모페이브와 함께 연구를 하기도 했던 술사가 아닌가.

“당분간 바빠지겠군.”

입으로는 투덜대지만, 보리스의 안색은 밝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몸짓에도 활기와 의욕이 묻어났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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