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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76화 (676/1,064)

676화

“전하. 동부 3주가 저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나머지 2주도 금방입니다. 이대로라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저들의 세력은 더욱 강대해질 겁니다. 친다면 지금입니다.”

각진 턱이 인상적인, 강직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가 얼굴만큼이나 딱딱한 말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옥좌에 앉은 사내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각진 턱의 사내가 말을 마치자 짧게 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움직이자는 건가.”

“군대는 준비를 마쳤습니다. 전하께서 명만 내리신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출정할 수 있습니다.”

“출정…….”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익숙하다. 전장에 나서는 것 또한 익숙하다. 이제껏 그가 쌓은 시체만 해도 작은 산을 이룰 정도였다.

다만, 새삼스레 감상에 빠졌을 뿐이다.

‘내전이라.’

군대를 움직인 것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배다른 형제의 목을 여럿 치기도 했다. 은밀히 움직인 적도 있고, 드러내놓고 친 적도 있다. 이제와서 내전 운운하는 것도 우습다는 뜻이다.

그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새삼스러운 연유로 망설이게 되는 것은, 이제부터의 전쟁은 한번 시작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전쟁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

“확신…이라시면, 무슨 확신을 말씀하시는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남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구나.”

“…군주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불경한 호칭이다. 제국의 수호자, 제국의 검 같은 거창한 명칭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들을 일컫는다면 제국인으로서 마땅한 존중을 표해야 할 터인데 사내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존중은커녕, 오히려 꺼림칙한 무언가를 입에 담듯이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일반적인 제국인이 군주에 대해 갖는 경외심이 없는 것이야 그럴 수도 있다고 칠 수 있지만, 이런 반응은 그런 수준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그자는…전하, 너무 과민하신 것이 아니신지.”

“그럴 수도 있지. 그랬으면 좋겠군.”

각진 턱의 사내는 옥좌에 앉은 사내의 말끝이 흐려지는 것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실 수밖에 없지.’

바라눔 엘 트라소프. 제국의 스물일곱 번째 황자는 그가 이제껏 봐온 이들 중 가장 용맹과감한 사내다. 하지만 그것이 앞뒤 분간 없는, 무모함과 같은 뜻은 아니다. 그는 저돌적인 사내 중에서는 꽤 신중한 편에 드는 자였다. 대사를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질 정도로 속이 깊다는 뜻이다.

“영 걸리십니까?”

“어찌 아니 그럴 수 있겠나. 아말로페가 겁이 많기는 하지만, 멍청한 녀석은 아니다. 뻔히 불구덩이인 것을 알면서도 섶을 지고 뛰어들 바보는 아니라는 소리지.”

하지만 그는 뛰어들었다. 그것도 기름을 잔뜩 묻힌 섶을 지고.

‘나라를 팔아먹겠다는 속셈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는 없을 터. 하지만 겁이 많을 뿐이지, 자기 몸속에 흐르는 피에 대한 자부심은 여느 멍청이들 못지않은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아바시스 놈들에게 허리를 굽힐 리는 없어.’

하지만 지금 드러난 정황들을 놓고 보면 허리를 굽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릎까지 꿇은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다. 대협곡은 이미 문을 열었고, 공공연하게 아바시스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첩보는 들을 필요도 없을 정도다. 이것은 틀림없이, 남방을 손에 쥔 아말로페 트라소프의 묵인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

“그놈이 내 앞에 있었다면 머리통을 으깨버렸을 것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 그러실 수 있을 겁니다. 배신자가 전하의 앞에 엎드려 살려달라 애걸하게 되겠지요.”

“음.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조금 더 생각해보도록 하지.”

“전하. 어찌…….”

각진 턱의 사내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바라눔 트라소프는 입 다물라는 듯 가볍게 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영 마음에 걸린다. 한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신중을 기울이고 싶다.”

“하지만 결국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마음에 한점 거리낌 없이 전쟁에 임하고 싶은 것이다.”

각진 턱의 사내는 납득한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입을 놀릴 수 있는 것이 여기까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충언이며 조언이었지만, 이 이상은 반항이다.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그리 결정하셨다면…….”

“군대의 준비가 끝났다지만, 준비에 끝은 없는 법이다. 병사들이 최고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라.”

“옛.”

수하를 내보내고, 바라눔 트라소프는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자콥. 그 녀석.’

한때, 황도에서 물불 안 가리고 날뛰던 망나니를 떠올렸다. 당시 안 좋은 소문을 몰고 다니던 앳된 얼굴에는 사내다운 분위기가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았기에 일곱 번째 황자를 깔보지 않았다. 제멋대로 날뛰는 꼴을 보면서도 필시 흉중에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으리라 짐작했었다.

누가 들어도 터무니없는 소리였기에, 그는 일곱 번째 황자에 대한 평가를 가슴 속에 묻어두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그 평가가 옳았음이 증명됐다.

‘그 돼지 녀석이 당한 것은 아쉽지 않다.’

2황자, 바라누르 트라소프는 그의 동복형이다. 하지만 같은 배에서 난 형제였음에도, 그는 한 번도 바라누르 트라소프를 자신의 형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탐욕, 소심함, 등등. 갖출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요소는 죄다 가진 것만 같은 수치스러운 형제. 언제나 모친의 걱정거리였던 그가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명분으로 삼을 수는 있겠지.’

둘째와 일곱째의 다툼. 서로 모든 것을 걸고 맞붙은 전쟁이었기에 변명거리도 없지만, 어쨌거나 동복형이 죽은 것은 사실이다. 형제의 복수는 더할 나위 없는 전쟁 명분일 것이다. 그 상대가, 비록 이복이라지만 또 다른 형제라는 점이 우습긴 해도 말이다.

‘놈을 거꾸러뜨리고, 놈이 가진 모든 것을 취할 것이다. 그리되면 난 이 나라의 절반, 아니 그 이상을 취한 것이나 다름없지.’

자콥 트라소프를 해치우고 나면 남는 것은 아말로페 트라소프 뿐. 그러나 그는 이미 민심을 잃었다. 머리가 조금이라도 깨인 관리들은 열세 번째 황자가 아바시스에게 붙은 배신자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아바시스. 아바시스라.’

비겁한 배신자 놈은 안중에도 없다. 북동부를 평정하고 나면 그가 맞닥뜨려야 할 적은 아말로페가 아니라 아바시스다. 일찍이 선황조차 도모하지 못한 강적이지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아국의 혼란을 틈타 이런 수작을 부리다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의 마음이 타오르니 넓은 대전의 공기가 덩달아 달아올랐다.

[무엇에 그리 분노하고 있지?]

만약 갑작스레 머릿속에 울린 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가 움켜쥔 옥좌의 팔걸이는 박살이 났을 것이다.

“……!”

바라눔 트라소프가 눈을 치켜떴다. 그는 어둠에 잠긴 대전 끄트머리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은 옥좌의 우측에 기대어 놓은 검을 쥐고 있었다.

“이건 무슨 장난질이지?”

[용건이 있어 찾아왔을 뿐이다.]

“기분 나쁜 잡술은 집어치우시오. 난 입으로 나오는 말이 더 취향에 맞으니, 날 찾아왔다면 내 방식대로 따르시오.”

[여전히 오만하군.]

“그대로 되돌려드리지.”

바라눔 트라소프가 검을 뽑았다. 옥좌에서 일어난 그는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사내를 차갑게 응시했다.

“내 목을 가져가려고 오셨소?”

[안심해라. 그럴 마음은 없다.]

“흥! 그 말이 당신을 살렸소.”

부정의 한마디를 듣자마자, 뽑았던 검이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다. 암살자로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슨 용건이지?”

[어째서 전쟁을 미루고 있나. 시간이 네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전쟁을 벌이든 말든, 그건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오.”

바라눔 트라소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검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다시 검을 뽑아 들지는 않았다. 암살자로서 온 것이라면 전력으로 상대해주겠지만, 적의를 가지고 오지 않은 상대와 드잡이질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라고 해도, 저자는 선황 때부터 초월자로서 무명을 떨친 군주였으니.

[황좌에 관심이 없나?]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둠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건만, 그의 몸은 여전히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어둠이라는 옷을 온몸에 걸친 것 같은 모양새. 보기만 해도 불길한 느낌이 뒷골을 긁어내리는 듯했다.

“그 역시 당신이 관여할 바는 아니지.”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난 그저 권하러 왔을 뿐이니. 원치 않는다면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다.]

“…날 부추겨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시오?”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나?]

“당신 말고, 당신의 뒤에 있는 자 말이오. 그자가 얻으려는 게 뭐요?”

[알고 있었군.]

“난 바보가 아니오. 황도를 떠나기 전부터 귀를 열어두었고, 떠난 후에는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더욱 귀를 기울였지.”

황도에서 웅크리고 있는 또 다른 군주. 그의 은밀한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을 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면 세울수록,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가 눈앞의 이 사내를 통해 은밀한 일들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아차렸다.

[그는 혼란을 바란다.]

“혼란?”

[이 제국은 황제의 유산이지. 하지만 그는 황제를 증오했으니, 황제가 남긴 유산 역시 망가지기를 원하고 있다.]

“자기 손으로 이룩한 성과를 말인가?”

[원해서 이룬 성과가 아니지. 그에게 이 제국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래서…나더러 제국을 망가뜨리라는 건가?”

[황좌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지. 그러나 노리는 자는 셋. 어차피 너희는 서로의 목을 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치지. 그래서, 이렇게 직접 찾아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말했듯,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자콥이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넌 자콥에게 무난히 패하겠지. 그런 그림은 그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다.]

“치열하게 치고받아라 이 말인가? 내가 무슨 꼭두각시 인형처럼 보이는 모양이군.”

[달리 선택지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자콥에게 달려가 목을 들이밀기라도 할 셈이냐?]

“…….”

[지금이 적기다. 지금 움직이겠다면 그가 너를 지원할 것이다. 그의 지원을 받는다면, 자콥과의 일전에서 크게 도움이 되겠지.]

“필요 없다.”

어둠 속의 사내가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바라눔 트라소프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옥좌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내 싸움은 내가 알아서 한다. 그대나, 황도에 있는 늙은이의 도움은 필요 없어. 물론 그 음흉한 장단에 놀아나 줄 생각도 없고.”

[그렇다면, 자콥에게 가서 무릎이라도 꿇을 테냐?]

“아니. 놈의 목을 칠 것이다. 단, 그 시기와 방법은 내가 정해.”

[…….]

“전할 말을 다 전했다면 이만 사라져주시지. 지금 내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하니, 당신이 더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는 칼을 뽑을지도 몰라.”

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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