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4화
[보주(寶珠)다. 영혼을 담을 수 있는 용기지.]
듣자마자 그것이 어떤 보물인지 감이 왔다. 그리고 이 괴물, 그러니까 군집체가 어떻게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
[짐작하고 있는 것이 맞다. 우리는 우리의 혼을 보주에 담았고, 수하들에게 보주를 봉인하게 하여 재앙을 피했다.]
[재앙?]
[그렇다.]
[더 설명이 듣고 싶지만…그것보다, 그 보주라는 것을 내게 넘기면 너희는 어찌 되는 거지?]
[그게 문제다. 보주의 힘을 빌어 존재하고 있는 우리는, 보주가 없어지면 더는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그러니 우리에게 육신을 다오. 물론 네 육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깃들 수 있는 육신을 따로 준비해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거기에 깃들 것이며, 보주는 네 것이 될 것이다.]
[내가 그냥 빼앗는다면?]
괴물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냥 빼앗아도 되지 않는가? 다소 과격한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이 괴물은 먼저 그의 몸을 빼앗니 마니 하며 덤벼든 적이었다. 적에게 승리하고, 패배한 적의 것을 취하는 것은 승자의 권리다.
그러니, 괴물에게 육신을 구해준 후에 대가로 보물을 받는 것보다 그냥 괴물을 없애고 보물을 얻는 게 더 편해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되겠지. 그러나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는 보주를 파괴할 것이다.]
[보주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어차피 사라질 것이라면, 남 좋은 일을 시키지는 않겠다는 거다.]
누군가 이런 말을 육성으로 내뱉었다면 허세가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뜻 그 자체를 전하는 소리에 거짓은 섞일 수 없다. 그러니 괴물의 저 말은 진심이며, 진실일 터.
군터는 고민했다.
괴물은 그의 육신을 탐한 적이다. 그런 적을 위해 육신까지 마련해주어야 할까? 보주라는 것이 그렇게 귀한 물건일까?
잘 모르겠지만, 보주의 기능에는 관심이 갔다. 영혼을 담아둘 수 있는 보물이라니. 그것이야말로 그가 원하던 물건이 아닌가. 게다가…군집체로서 봉인의 힘을 빌렸는데도 어떻게든 이겨내지 않았는가. 그런 괴물이, 설령 육신을 얻은 뒤에 다른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그리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 받아들이지.]
* * *
“장군. 정말 괜찮겠습니까?”
할렌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군터는 깊게 파인 구덩이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할렌과 모페이브에게만 사정을 알렸다. 군터가 끝내 괴물을 무찌른 줄만 알았던 그들은 군터의 짤막한 이야기를 듣고, 그가 손에 든 주먹만 한 구슬을 보며 시름에 잠겼다. 특히 할렌이 걱정을 내비쳤다. 그는 그렇게 살벌하게 적의를 불태우던 괴물을 어찌 믿겠냐며 구슬을 부숴버리는 게 어떻겠느냐고까지 말했다.
그런 우려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괴물을 큰 위협으로 여기지 않는 군터나, 괴물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보주의 가치를 더 높게 치는 모페이브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리라.
“장군. 이 보주라는 물건은…확실히 범상치 않은 보물임이 틀림없습니다. 보주의 표면에 새겨진 술식은 모두 생소한 것들뿐입니다.”
모페이브는 보주에 새겨진 술식이 지하 미궁에서 보았던 고대의 것들과도 다르다고 했다. 그야말로 기원을 알 수 없는 생소한 형식의 술식이라고.
“이 술식이 어떤 원리로 구성되어 있는지, 정확히 무슨 기능을 하는지조차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는 것은…영혼을 담는 기능 외에 다른 기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건가?”
“그럴 수도 있지요.”
괴물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이 보주에 정말 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괴물조차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는 뜻.
“그 괴물이 말씀하신 것처럼 군집체라면, 그들의 정신은 상당히 오염된 것으로 보입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군집체란, 본래 각자의 독립된 정신을 가진 생명 여럿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정신이 온전하겠는가? 군터는 몸을 내놓으라며 같은 말을 도뇌던 괴물을 떠올렸다.
“추측입니다만, 일반적인 군집체가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보주가 정확히 어떻게 기능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족히 수백이 넘는 영혼을 담아두었을 터. 게다가 그 안에 봉인되어 있던 세월이 까마득할 텐데, 그들의 정신이 어찌 멀쩡할 수 있겠습니까?”
“음.”
“그들에게 육신을 구해준다고 한들, 그들이 온전한 상태를 회복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쩌면 그대로 미치광이가 되어버릴지도…….”
“보주만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 놈들과 약속한 것은 육신을 구해주고 그 대가로 보주를 받는 것.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논한 바 없으니.”
여차하면 육신을 얻은 그들을 그 자리에서 없애버리면 그만이다.
“그보다, 족히 수백은 될 육신을 어찌 구해야 할지 모르겠군.”
가장 간단한 것은 죄수들을 사형시키고, 그 시체에 깃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수라고 해서 아무나 죽여버릴 수는 없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자들을 써야 할 텐데, 그러면 수를 맞추기가 어렵다. 아니, 턱도 없이 부족하다.
“그들이 아무리 갈급하다지만, 아무 육신에나 깃들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혼을 다른 육신에 불어넣는 것은 사령술의 일종이라 아는 바가 많지는 않습니다만, 대충 생각하기에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애당초 그런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부터가 의문입니다.”
영혼을 시신에 불어넣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령술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야말로 한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제껏 숱한 사람들이 갈망해왔던 기적인 것이다.
“그들은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만.”
분명히 그렇게 느꼈다. 물론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오랜 세월 군집체로서 봉인되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들이니, 그냥 미쳐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보면 알겠지.”
미친 소리인지, 아니면 정말 고대의 기적이 재현되는 것인지는 시체 앞에서 보주의 봉인을 풀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다.
* * *
어쨌거나 보주 안의 영혼들을 위해 시신을 구해야 했다. 군터는 최소 수백 구에 달하는 시신들을 어찌 구할지가 문제라고 생각했으나, 모페이브는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시신이라면 저 위에 넘칠 만큼 있지 않습니까.”
“저 위에? 설마…….”
넘칠 만큼 있다는 말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예. 쿠엘단의 인형들 말입니다.”
모페이브가 그 생각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죽은 지 한참이 된 것들 아닌가.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 것 같던데.”
“기이하게도, 이미 뼈가 드러난 것들도 있는 반면에 어제 죽은 것처럼 멀쩡한 것들도 있습니다. 아마 인형이라고 해도 다 같은 인형이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음.”
“보주 안의 영혼들에게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단 당장 눈앞에 쓸만한 소재가 있으니 활용은 해보시지요.”
군터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겨 일단 모페이브의 말대로 해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은 일단 이 지긋지긋한 지하 미궁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쁜듯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다스리는 기색이, 물론 죽은 동료들을 애도하기 위해서겠지만, 보기에 꽤 우스꽝스러웠다.
“멀쩡한 인형들을 모아라.”
지하 미궁을 나와 도시로 올라온 군터는 즉시 병사들에게 인형들을 모아올 것을 명했다. 병사들은 지친 와중에도 창고들을 돌며 멀쩡해 보이는, 다시 말해 썩은 내가 나지 않는 인형들을 모아왔다.
족히 백여 구가 훌쩍 넘어 보이는 인형들을 보며, 군터는 보주를 꺼냈다.
[어떤가.]
[훌륭하군.]
괴물, 아니 고대인들의 군집체가 보주 속에서 답했다. 그들은 눈은 없었으나 앞에 있는 인형들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듯했다.
[훌륭해. 최상급의 육신이다. 뭔가…인위적인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좋아. 만족스럽군.]
[그렇다면 들어가라.]
[음. 그냥 들어갈 수는 없다. 그대의 도움이 필요해.]
[도움?]
[우리의 혼을 이끌어서 육신에 불어넣는 거다. 어렵지 않아. 보주에 술력을 주입하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알아서 육신에 깃들 수 없다면, 내게 덤벼들 때는 어떻게 내 몸을 차지할 생각이었지?]
[그때는 봉인의 힘을 이용해 영체로나마 현신할 수 있었지. 그러나 지금은 봉인지를 벗어난 데다, 그대와의 전투 때문에 영력이 크게 쇠하기까지 했어. 우리에게는 이제 여력이 없다네.]
[그런가.]
하는 수 없이, 군터는 보주에 술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그저 알 수 없는 기운이 뭉쳐있다고만 여겼던 보주에서 생소하고 기이한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정교한 건축물을 통째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 어떤 구조인지,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가 훤히 느껴졌다.
‘백…이백…삼백…….’
막연히 몇백 정도 되겠지, 하고 짐작했던 것을 직접 확인했을 때. 군터는 경이와 함께 역한 느낌을 받았다. 그 수많은 영혼이 질서 없이, 오물을 섞어놓은 것처럼 뒤엉켜 있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이제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는군.]
[우리라고? 그 정도의 자각은 있나?]
군터가 느낀 불쾌함은 그가 전하는 말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보주 속의 군집체는 자조하며 답했다. 그의 소리에는 씁쓸함과 슬픔, 분노 등이 섞여 있었다.
[때로는. 어떨 때는 정말로 모든 것을 잃고, 잊은 체 괴물처럼 혼란 속을 헤맸었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기쁘군.]
[너희의 영혼이 육신에 깃들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부활하는 건가?]
[부활이라. 글쎄. 모르겠군.]
[모르다니?]
[고안만 했지, 한 번도 제대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불완전한 술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확실하지도 않은 것에 모험을 걸었다는 건가?]
[달리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비록 불완전하지만, 몇 가지 실험에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고.]
군터는 그들이 말했던 고대의 재앙을 떠올렸다. 선택지가 없었다는 말은, 분명 그 재앙과 관련이 있으리라.
[조금 더 보완을 해서 시도해도 되지 않겠나?]
[우리에게는 이제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충분히 오래 갇혀 있었고, 고통받았다.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좋아. 우리는 해방되기를 원한다.]
그들의 간절함이 생생히 전해졌다. 군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그뿐이다. 그게 거래의 내용이었으니까.
[좋아.]
보주에 주입하는 술력을 더 늘렸다. 보주의 표면에 새겨진 복잡한 술식들이 점차 힘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