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3화
군터는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오는 괴물을 보며 떨쳐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뻗어오는 손에서는 분노는 물론,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다행스러운 점은 할렌과 병사들, 그리고 모페이브는 이미 몸을 뺐다는 점이다.
‘그렇게도 자신이 있나?’
다급하게, 발끝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기세인 괴물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끌고 들어가기만 하면 어떻게 해볼 자신이 있다는 걸까?
너무 우습게 보인 것이 아닌가 싶어 불쾌함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그는 저 괴물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굳이 상대가 유리한 판에서 어울려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일단 한발 물러나려 했을 뿐.
그런데 그런 생각이, 아무래도 상대에게 이상한 생각을, 아니 착각을 심어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한번 보지.’
군터는 몸을 틀었다. 쫓아오는 괴물을 마주 보며, 뻗어오는 손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 * *
할렌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군터가 괴물에게 붙잡히는 장면이었다. 그 후로는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기에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이런!’
군터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할렌이었지만, 흙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군터를 보며 걱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걱정이 된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것이 할렌의 마음을 더 급하게 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손에 칼을 쥐고서도 무엇하나 손을 보탤 수가 없다니.’
물론 적은 칼로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말 그대로 괴물이다. 상상할 수 없는 신비를 다루는 술사들조차도 대응하지 못한 괴물인 만큼 일개 무부인 그가 무력해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더라도, 마음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렇게 무력해져 본 적이 거의 없었으며, 있었더라도 먼 과거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슨 한심한.’
낯선 무력감은 할렌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긁어내렸다. 걷힐 생각이 없어 보이는 자욱한 흙먼지를 보며, 할렌은 이를 악물었다.
* * *
[우리의 그릇이 되어라.]
[언제까지 헛소리만 주절댈 생각이지?]
군터는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에 냉소하며 창을 휘둘렀다. 끝없이 달려드는 사념들을 베고, 또 베었다.
괴물의 거대한 몸뚱이는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망령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정체 모를 사념들이 끝없이 덤벼들었다. 그 사념들은 물리적인 위해는 가하지 못했지만, 마치 은밀한 독처럼 군터의 정신으로 스며들려 들었다.
군터는 그것들을 모조리 베었다. 그의 창이 요마의 뼈로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안에 담긴 사기 때문인지 그의 창에 닿을 때마다 사념들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그럴 때마다 괴물은 노성을 내지르며 더욱 격렬하게 군터를 공격했다.
‘이상한 놈이군.’
까다롭기로 따지면 괴물 거인이었을 때가 더 까다로웠다. 지금과 같은 공격은 귀찮기는 해도 상대하기는 오히려 더 쉬웠다. 그것을 괴물도 모르지 않을 텐데, 몰랐다고 해도 이제는 슬슬 깨달았을 텐데 어째서 계속 이런 식으로 덤비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주절대는 우리라는 말 또한.
‘군집체인가?’
한창 사령술을 익히던 시절, 온갖 술법과 신비에 대해서도 겉핥기식으로나마 공부를 했었다. 그때 인상 깊게 보았던 것 중 하나가 군집체라는 존재였다. 술사들이 일컫는 군집체란 하나가 아닌, 여럿이 합쳐져서 하나가 된 존재를 이른다. 자연적으로는 생겨날 수 없는 존재이며, 또한…….
‘불안정하다고 했지.’
당시 군터는 모페이브에게서 그리 배웠다. 물론 모페이브가 알고 있는 지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릇이 되어라!]
통하지 않는 공격을 계속하고, 지진아처럼 같은 말만 되뇌는 것을 보면 말이다.
처음 봉인이 풀리고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분명 이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처음의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 몸을 차지하겠다는 욕망에 매몰된 것 같았다. 마치 가지고 싶은 것을 향해 무작정 손을 뻗는 아이처럼.
‘내가 다시 벗어나려 할 것을 두려워하는군.’
얼마나 깊게 가라앉은 것인지 모르겠다. 몇 번이고 땅이 무너지면서 균형을 잡아야 했는데, 아마 꽤나 올라가야 할 정도로 깊게 파묻혔을 것이다. 게다가 그게 다가 아니다. 늪 속에 빠진 것처럼, 계속해서 두 발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아마 괴물이 부린 술수일 텐데, 군터는 계속해서 몸을 띄우면서 저항하고 있었다.
[우리는 너의 그 육신으로 다시 숨 쉴 것이다.]
[꿈도 크군.]
군터는 코웃음 치며 다시 몸을 띄웠다. 그러자 갑자기 땅이 불쑥 꺼지는 듯하더니 예의 그 괴물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상반신만 형상화된 거인이 군터를 향해 팔을 뻗었다.
쉬익!
그러나 이번엔 조금 전과 달랐다. 거인이 팔을 뻗은 순간, 거대한 팔이 여러 갈래로 나뉘더니 뱀처럼 꿈틀대며 여러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군터는 그중 일부를 쳐냈으나, 미처 쳐내지 못한 두어 갈래가 군터의 몸을 옭아맸다.
“흥!”
군터는 몸에 힘을 주는 한편, 그의 영육이 품은 사기를 있는 대로 끌어냈다. 농밀하고 거대한 사기가 몸을 타고 흘러나가자, 그를 옭아매고 있던 사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그러자 속박도 덩달아 풀렸는데, 그를 속박하고 있던 괴물의 팔 일부가 바로 그 사념들에 의해 움직이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단일 개체라고 생각했던 저 괴물 거인도 결국 군집체였던 것이다.
‘모조리 베어주마.’
이제 저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저 괴물이 군집체라면, 군집한 사념들을 모두 없애버리면 될 일이다.
[그릇이 되어라!]
아직도 저런 헛소리를 주절대지만, 아까와는 다르다. 공격이 조금 무뎌졌다. 공격을 가하는 사념들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리라.
‘기세. 기세다.’
군집하여 하나가 됐다 하여 진정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사념 하나하나가 각자의 생각대로 움직인다. 물론 그 생각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한 수준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두려움 정도는 느끼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해, 자신의 안위를 살필 줄 안다는 것이다. 몸을 차지하니 어쩌니 해도, 몸을 차지하는 그 우리 안에 자신이 들어있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생각 정도는 할 줄 안다는 거다.
그것을 알아차린 이상 어려울 것은 없다. 사념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면 된다. 강력한 힘과 가차 없는 잔혹함으로써.
[오래전에 썩어 문드러진 것들아. 모두 굴복해라.]
이제는 안다. 뭐라도 되는 듯이 떠들고 있는 저 괴물이, 괴물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모두 오래전에 죽어 사라진 것들이라는 것을. 저들의 본질은 망령과 다르지 않다. 다만 알 수 없는 술법으로 인해 일반적인 망령들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그 존재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척이나 뒤틀려버렸다는 점이 다를 뿐.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본질이 망령과 같다면 군터로서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는 죽음을 다루는 데 익숙하니, 망령들은 그에게 있어 손쉬운 상대였다.
[저항해봤자 소용없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위에 선 자 특유의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나 왜일까, 그 일갈이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떠들지 말고 와라. 먼저 오는 놈부터 베어주마.]
함께 분노하기는 쉽다. 함께 욕망하기도 쉽다. 그러나 먼저 나서기는 어렵다. 사람도 그러하며, 사람이 죽어 된 망령들 역시 그럴 터였다.
군터는 그가 한 말을 착실히 지켜나갔다. 덤벼오는 공격을 가차 없이 사납게 받아쳤고, 그때마다 사념들이 사기에 휩쓸려 사라져갔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괴물의 공세는 점점 무뎌졌다. 군터는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으나, 괴물의 공세가 그 이상으로 무뎌졌기에 버티기가 어렵지 않았다.
싸움은 지구전으로 흘러갔다. 군터가 처음에 바라지 않던 방향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쳐가는 것은 그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으으…포기해라. 모르겠나? 네게 승산은 없다.]
[모르겠군.]
지금 떠드는 놈이 처음 떠들던 놈과 같은 놈일까? 군터는 이제 괴물에게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괴물에게서 느껴지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지쳐가는 몸에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너희 중 마지막까지 남는 놈이 있다면, 어쩌면 내 몸을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허나 앞서서 나서는 놈은 반드시 사라질 것이다.]
그들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던 시절에는 어땠을지 모른다. 그러나 육신을 잃고 군집체가 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욕망, 두려움 같은 본능뿐이었다. 세월이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지금, 군터에게 있어 그들은 수가 조금 많을 뿐이지 전장에서 숱하게 마주쳤던 일개 병사들보다도 못했다.
* * *
얼마나 오랫동안 창을 휘둘렀을까. 군터는 적의 기세가 눈에 띄게 꺾였을 때부터 이 싸움의 끝이 어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졌다.]
[그래서?]
공격이 그쳤다. 괴물의 욕망은 여전했으나 전의는 차갑게 식었다.
[우리는 사라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어찌해야 하겠나?]
[내 몸을 가져가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거다.]
[패자에 대한 처우는 승자의 권리지.]
괴물 거인이 허물어졌다. 늪처럼 끈적거리던 땅도 정상적으로 굳어졌다.
[패자에 대한 자비 또한 승자의 권리지.]
[권리일 뿐, 의무는 아니다.]
[대가를 지불하겠다.]
괴물의 아쉬움이 진하게 느껴졌다. 지금 말한 대가라는 것이, 괴물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인 듯했다. 그것을 내어놓겠다는 말 역시 거짓이 아니라는 뜻일 테고.
[대가?]
그 말에 쿠엘단의 유산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떠오름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 봉인도, 괴물도 쿠엘단과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걸 확인했지 않은가.
[그래. 우리의 보물이다. 장담하건대, 네 마음에도 들 것이다.]
흥미가 없지는 않았다. 감히 몸을 가져가니 마니 한 것은 괘씸했지만, 어차피 이 괴물은 더 이상 그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봉인 안에서는 물론, 봉인 밖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들어는 보겠다.]
군터는 창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물론 그러면서도 몸에 긴장을 풀지 않으며, 만일을 대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