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화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의 창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군터는 본능적으로 뛰어올라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빨리 이어서 손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가 창을 손에 쥠과 동시에 강한 폭발이 일어났다. 마지막 순간에 창을 손에 쥔 군터는 그 폭발에 휘말려 크게 나가떨어졌다. 그가 밟고 있던 땅은 무너져 내렸고, 군터는 무너지는 땅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장군!”
모페이브는 할렌과 병사들의 다급한 외침을 들으며 바닥난 힘을 어떻게든 짜내려고 노력했으나, 한 번 붕괴하기 시작한 땅은 순식간에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허억…허억…….”
맥이 풀리며 억지로 참았던 고통이 물밀 듯 밀려왔다. 모페이브는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주저앉았다. 그의 시선이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는 먼지구름을 향했다.
* * *
[기약 없던 기다림의 마지막 순간이, 설마 이렇게 틀어질 줄이야.]
영문 모를 폭발에 휘말렸어도, 발 딛고 있던 땅이 무너져 내렸어도 별 충격은 없었다. 그의 육신은 이미 초인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에 이르렀기에, 이 정도로는 눈살 한번 찌푸리고 끝이었다.
[강력한 육신이군. 그릇으로 삼기에 적합하다.]
군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먼지구름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대꾸했다.
[넌 뭐냐.]
[너머를 볼 수 있는가? 훌륭하군. 너를 제물로 했다면 보다 온전한 상태로 깨어날 수 있었을 것을.]
아직도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요마의 본체에서 튀어나온 것이, 이곳에 몰려든 술사들이 바라는 보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정체를 밝혀라.]
군터가 거칠게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창이 긋고 간 궤적을 따라 먼지구름이 걷히며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정체? 그건 이곳을 찾아온 네가 밝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은 거인이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세 배는 될 법한 키와 덩치를 제외하면, 사람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크게 무리가 있는 외관이었다. 사지 비슷한 것이 달려있기는 했으나 그 모습이 제각각이라, 사람보다는 괴물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처참한 몰골이지? 그러나 괜찮다. 이제 곧 멀쩡한 육신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사람 머리만 한 구멍이 휑하니 파여 있다. 코도, 입도 없다. 그저 머리로 추정되는 덩어리 하나만이 덜렁 몸뚱이 위에 붙어 있었다.
[쿠엘단의 장난감인가?]
[누가 감히 이 몸을 통제할 수 있겠나. 무지에서 비롯된 모욕은 관대히 용서해주지.]
정체 모를 괴물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쿠엘단과 관련 없는 자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군터는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처음에 기약 없는 어쩌고, 하면서 한탄 비슷하게 하지 않았던가?
[이곳에 묻혀있었던 건가? 언젠가 누군가가 깨워주기를 바라면서?]
[인간의 호기심과 탐욕에 기대를 걸었던 거지. 보다시피,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고.]
쿠엘단이 남긴 유산이니, 보물이니 하는 것을 찾아 이곳까지 왔던 술사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괴물의 말처럼 그들의 호기심과 탐욕이 부른 결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흉측한 몸뚱이와 주절대는 말로 봐서, 그 기대가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군.]
[너머를 보는 자들끼리 대화를 함에 있어 거짓은 있을 수 없지. 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느꼈을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 그가 말하는 내용에 대한 진위는 물론, 그 안에 담긴 감정까지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니 사실 이런 물음은 불필요한 것.
다만 군터가 계속 말을 이어가는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할렌과 병사들이 몸을 뺄 수 있는 시간을.
“장군! 이게 대체…….”
시간을 벌 수 있는 만큼 벌어주었고, 덕분에 할렌과 병사들은 괴물에게서 멀찍이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괴물은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직 군터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지금부터는 나서지 마라!”
그렇게 경고한 후, 군터는 창을 늘어뜨리고 괴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바깥세상이 궁금하군. 어떻게 변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아. 우리의 마지막으로부터 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흐른 것인가?]
군터는 답하지 않았다. 저 괴물이, 괴물의 안에 들어있는 자가 얼마나 오래전의 인간인지 따위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과묵한 자로군. 좋아. 아쉽기는 하지만 상관없지. 어차피 이런 사소한 것들 따위는 직접 나가서 확인하면 되는 것이니.]
들썩거리던 괴물의 기세가 갑작스레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괴물의 거대한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군터의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부웅!
거대한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간 일격에 군터의 머리카락이 죄다 뽑힐 듯 뒤로 휘날렸다.
괴물의 급습은 쾌속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군터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괴물의 주먹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갈 때, 기다란 검은 선이 괴물의 팔에 새겨졌다.
촤악!
괴물의 굵은 기둥 같은 팔에 깊숙한 상처가 생겼다. 그러나 그 큼지막한 상처에서는 피 한 방울 새어 나오지 않았다.
[대단한 실력이군. 우리의 시대에도 네 녀석 정도의 실력자는 흔치 않았다.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군.]
[인형에 빌붙어 있는 주제에 말이 많군.]
[이런. 마음의 수행은 육신의 수행에 비해 형편없군.]
괴물이 뭐라 지껄이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군터는 방금의 일합을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그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몸뚱이가 아니다. 저것 또한 술법인가?’
기운 자체는 느끼고 있다. 이곳의 봉인에 흐르고 있는 기운이 저 괴물에게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구형의 요마를 상대할 때부터 말이다.
[좋아. 대화가 내키지 않는다면 억지로 권할 생각은 없다. 세상의 빛이 간절하니, 길게 끌 생각도 없고.]
괴물이 몸을 굽히더니 두 손을 땅에 댔다. 그러더니 그 거대한 몸이 순식간에 땅에 녹아들었다. 말도 안 되지만, 빗물이 땅에 스며들 듯 순식간에 사라지는 괴물의 모습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군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괴물의 몸뚱이는 사라졌으나, 그 기운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아니, 오히려 모습이 눈에 보일 때보다 기운만은 더 거대해졌다.
‘이건…….’
뜻밖의 상황에 조금 의외기는 했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이런 광경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일전에 회색산에서 요정들과 혈전을 벌였을 때. 그때 이런 술법, 혹은 재주를 부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땅과 바위, 나무에 수시로 녹아들면서 모습을 감추고 뜬금없는 곳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기습하는 전투 방식. 그 기괴한 수법에 제법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이 캄캄한 지하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까다롭긴 하지만, 그뿐이다.’
모습을 감췄다고 해서 대처할 방도가 없는 것이 아니다. 기감이 발달한 사람이라면 대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일반 병사들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으면 그럭저럭 반응을 하는데, 하물며 군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와라.’
선공권은 내줄 수밖에 없다.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노려 반격해야 한다.
군터는 기감을 곤두세우며 괴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이런 재주를 부리는 데도 당연히 힘이 소모될 테니, 오래 기다리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군터의 추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과연 괴물은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괴물이 다시 나타난 방식은 군터의 예상과는 상당히 달랐다.
* * *
우드득! 콰직!
땅이 부서졌다. 발을 딛고 있던 땅이 갑작스레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지자 군터는 재빨리 뛰어올라 멀쩡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렇게 그가 옮겨가자마자 새로이 발을 디딘 곳도 갈라지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붕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군터는 다시 한번 뛰어올랐다.
“장군!”
할렌 등이 거칠게 소리쳤다. 그들의 눈에는 군터가 땅으로 파묻히는 것처럼 보였다. 전혀 틀리게 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군터는 무너지는 땅과 함께 계속해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흡!”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제는 군터도 마냥 여유로울 수가 없게 됐다. 그는 요마를 향해 달려들 때처럼 빠르게 달렸다. 붕괴는 그가 움직이는 곳마다 따라다녔지만, 그가 달리는 속도가 한층 더 빨라지니 제대로 그를 뒤쫓지 못했다.
‘엄청나군.’
달리는 도중에도 군터는 괴물의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껏해야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기습을 가하는 정도를 생각했었거늘,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리다니.
‘하지만…제약 없는 힘은 없다.’
큰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에 따르는 대가도 큰 법.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이라면 그 대가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아니면 제약이 크거나.
“물러나라!”
군터의 추측은, 괴물의 힘이 이 봉인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서 극대화된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 정도 되면 봉인과 괴물이 한 몸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봉인지를 벗어나!”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전쟁으로 비유하자면, 방비가 삼엄한 성을 낀 적을 상대로 굳이 공성전을 해주는 꼴이다. 성을 함락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굳이 성벽 위에 올라 있는 적을 상대로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할까? 밖으로 끌어내어 야전을 벌이면 더 쉽게 상대할 수 있는데 말이다.
“장군의 말씀을 들었겠지! 물러난다! 봉인지에서 벗어나!”
할렌이 병사들을 이끌고 움직였다. 거동이 불편한 모페이브와 아드리안까지 챙겨서 다급히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군터도 다리에 힘을 더 불어넣었다. 그는 아직도 봉인이 한복판이었다. 그가 움직이는 경로의 땅이 자꾸 불규칙하게 무너지기를 반복하니, 이래저래 방향을 꺾으며 달릴 수밖에 없었다.
[물러난다고?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또 한 번 전면의 땅이 무너져 내렸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속에서, 기괴한 몰골의 거인이 한층 더 거대해져 모습을 드러냈다. 상반신만이 드러난 거인은 한껏 쳐올린 팔을 내리쳤다. 막대한 기운이 거인의 팔과 함께 군터를 향해 날아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