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화
“장군! 제단 위를 보십시오!”
“……?”
또 한 명의 머리를 터뜨린 순간. 군터는 모페이브의 쥐어 짜낸 것 같은 외침을 들었다. 그가 고개를 제단 쪽으로 돌리니, 검붉은 가시가 한 사람의 몸뚱이를 꿰뚫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가시에 몸뚱이가 뚫린 자가 술사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마지막까지…….”
군터가 본 것을 모페이브도 보았다. 그는 제단 앞에 선 자, 루멘을 보고 실소를 머금었다. 보지 않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독하구나.’
패색이 짙은 것을 보고 일을 그르쳤음을 깨달았음에도,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아군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허약한 육신 하나를 더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의미 없는 짓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쿠궁!
“……!”
갑작스레 거센 흔들림이 느껴졌을 때. 모페이브는 그게 틀린 생각이었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 * *
“아아…….”
루멘의 얼굴이 환희에 물들었다.
사실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저지른 일이었다. 열망은 가득했으나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살아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봉인의 비밀이라도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말 코앞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옆에서 술력을 끌어올리던 중년 술사에게 거리낌 없이 손을 썼다.
쿠궁!
나이든 술사의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가자 봉인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루멘은 제단이 비틀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면세계에서의 비틀림이었다. 그는 이제 봉인이 풀리고 그 안에 숨겨졌던 것이 모습을 드러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윽?!”
그렇기에 이질적인 기운이 뭉치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운이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을 때. 그의 몸도 누가 거칠게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끌려가기 시작했을 때는 루멘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몸은 반쯤 허공에 떠서 끌려가고 있었으며, 루멘에게는 그 힘에 저항할 재주가 없었다.
“커억!”
모든 것은 한점에 모여들었다. 자그마한 구멍에 대야의 물이 모두 빨려 들어가듯이.
루멘은 자신의 몸이 찢기고 압착되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죽음을 느낄 새도 없었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다음 순간, 그의 사고는 끊어졌으니.
* * *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몇 남지 않은 적의 목숨을 마저 끊어놓으려던 할렌과 병사들은 마무리를 짓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제단 쪽을 바라보았다.
제단이 붕괴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시커먼 구멍 속으로 모두 사라지고 있었다. 자그맣던 구멍은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는데, 그럴수록 흡입력 또한 강해져 멀리 있는 할렌과 병사들마저 누가 등을 떠미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 정도였다. 만약 저 구멍이 여기서 더 커진다면…….
“장군! 어찌해야 할지…….”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할렌의 말은 일단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미였다. 어지간해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할렌조차 불안한 기색을 띨 만큼, 저 시커먼 구멍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은 심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장군. 저것은 분명.”
아직도 숨을 헐떡이던 모페이브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마저 떼기도 전에, 시커먼 구멍이 일순간 크기를 키웠다.
할렌이 우려했던 것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흡입력의 변화는 없었다. 단지.
“…….”
군터는 구멍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심력을 기울여 보이지 않는 너머를 들여다보고자 노력했다. 조금만 더하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스으윽!
그렇기에 그는, 구멍 너머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는 것을 한발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엇인지 모를, 하지만 분명 움직이고 있는 그것을 본 순간. 군터는 머리가 부서진 용병의 손에서 창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힘껏 던졌다. 사기를 잔뜩 실은 채 내던진 창은 구멍 속에서 막 움직이던 정체 모를 것을 향해 날아갔다.
[크아아악―!]
창이 구멍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섬뜩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군터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으나, 병사들은 무기마저 놓치고 비틀거릴 정도로 크게 충격을 받았다. 모페이브는 아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목을 움켜잡을 정도였다.
“뭔가 나온다! 주의하라!”
그나마 할렌은 살짝 비틀거렸을지언정 검을 놓치지는 않았다. 그는 안색이 핼쑥해진 병사들에게 정신차리라 외치며 거대해진 구멍을 노려보았다.
쿵!
실제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옷자락이 바닥에 스치듯, 미끄러지는 것처럼 부드럽게 구멍 속에서 흘러나왔을 뿐.
그러나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귀에는,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저런…괴물을 불러내려고 그렇게 난리를 친 건가?”
할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괴물.
구멍에서 나타난 것을 묘사하는 데 그 한 단어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것은 형체가 있는 듯 없는듯했다. 반투명한, 희미한 안개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었고 뚜렷하게 드러난 부분도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구형이었다. 커다란 구 같은 것이 있고, 그 주변으로 흐릿하고 뚜렷한, 끔찍한 것들이 꿈틀거렸다. 꼬리 같기도 하고, 팔 같기도 하며, 어떻게 보면 혀 같기도 한 것들이.
“드러난 부분만 노려라. 되도록 공격은 삼가고, 피하면서도 반격하는 데 집중하라.”
군터는 그것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병사들에게 그리 말했다. 척 보기에도 평범한 괴물 같아 보이지는 않았기에, 적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될 때까지 신중하라 명한 것이다.
할렌과 병사들은 경험이 많다. 인간과의 전투 경험은 물론, 괴물들과도 싸운 경험이 적지 않았다. 그런 만큼 괴이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어도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저런 괴물들과 싸울 때는 용맹함보다 신중함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군. 저 요마(妖魔)는 파수꾼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군터가 앞으로 나서려던 찰나, 모페이브가 다급하게 외쳤다.
“파수꾼?”
“그렇습니다. 더불어, 저 요마는 현재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제물은 충분하게 바쳤으나, 뭔가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저런 형태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불완전하다? 저 괴물, 아니 요마의 꼴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저게 불완전한 상태라면, 완전한 상태였다면 어느 정도였다는 소리인가. 지금만 해도 병사들이 위축될 정도인데, 완전한 상태였다면…….
“뻗어 나온 것들은 모두 곁가지입니다. 진짜는 저 구형의 몸뚱이. 필시 저 안에 이 봉인이 숨기고 있던 보물이 들어있을 테지요.”
보물이라.
흥미롭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리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저 안에 보물이 들어있든 뭐가 들어있든, 결국 저 요마를 해치워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
다만 한 가지. 몸뚱이를 쳐야 한다는 것은 그럭저럭 유용한 정보였다.
‘놈에게도 사고하고 판단하는 최소한의 이지는 있다.’
그 증거로, 놈은 나타나자마자 날뛰는 대신 가만히 멈춰 있다. 놈에게 눈은 달려 있지 않은 듯했지만, 군터는 놈이 이쪽을 살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놈이 괴물답지 않은 신중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처음은 탐색이겠지.’
저 정도로 신중한 녀석이라면 처음부터 전력으로 덤벼오지는 않을 터. 이쪽의 힘을 재기 위해 가볍게 탐색부터 시작할 테니, 그것을 노려 처음부터 강하게 찌른다면.
쉬익!
흐릿하고 길쭉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군터는 채찍처럼 날아드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땅을 박찼다.
채찍 같은 것이 그가 피한 자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반투명하던 채찍 같은 것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허상?’
아니. 아니다. 피하기 직전까지 그가 느꼈던 위협감은 진짜였다. 저것도 일종의 술법으로 봐야 할까.
‘받아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평범한 무기라면 어렵지만, 그의 창은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사기까지 두른다면 저 유령 같은 공격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터.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모페이브의 말에 따르면 저것은 곁가지다. 곁가지를 암만 쳐봐야 별 의미 없으니, 노린다면 본체를 노려야 하지 않겠는가.
군터는 차분하게 기회를 살폈다.
* * *
“놈의 주의를 끈다.”
할렌은 군터와 모페이브의 대화를 들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무리하게 거리를 좁히지 마라. 거리를 유지하며 최대한 신중히 움직이되, 놈의 공격을 유도해내는 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차피 일격은 군터가 날릴 테니, 그들이 할 일은 그를 위한 틈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들었겠지! 드러난 부분만 노려라!”
몇몇 병사가 괴물의 몸뚱이 중 뚜렷하게 드러난 부분에 화살을 날렸다. 제법 매섭게 날아간 화살들은 목표에 닿지도 못하고 벽에 부딪힌 것처럼 팅! 하는 소리를 내며 튕겨 나왔다.
그를 본 할렌이 미간을 좁혔다.
‘투사체에 대한 면역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방벽 같은 것이 둘려 있는 건가.’
그도 아니면 술법일 수도 있다.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달리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가시가 박힌 꼬리 같은 것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저것에 맞았다가는, 아니 스치기라도 했다가는 단번에 육편이 되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크읍!”
할렌이 다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몸을 구르자마자 쾅! 하는 굉음이 터지고 땅이 흔들렸다.
‘실체다.’
땅에 부딪힌 어깨가 욱신거리는 와중에도, 할렌은 방금 떨어져 내린 꼬리가 실체였다는 것을 생각했다.
“하압!”
그 생각이 들자마자, 할렌은 번개처럼 몸을 튕겨 일으키며 이제 막 다시 올라가려 하는 꼬리에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검광이 번뜩이고, 어지간한 통나무보다 더 두꺼운 꼬리에 깊은 생채기가 생겼다.
꿈틀!
생각보다 얕게 들어간 검에 혀를 차면서도, 할렌은 괴물의 꼬리가 꿈틀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위기감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관통했다.
‘물러나야……!’
본능의 경고에 순응하며 급히 몸을 빼던 중. 할렌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한 사내가 괴물의 몸뚱이를 향해 뛰어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