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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69화 (669/1,064)

669화

“쳐라!”

군터가 첫 화살을 날렸을 때부터 이미 전투는 시작된 것이었다. 군터보다 늦게, 하지만 바삐 달려온 할렌과 병사들은 모페이브 일행을 겁박한 술사 무리를 향해 사납게 달려들었다.

“막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당황했으나, 술사들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명백한 ‘적’을 향해 즉각 대응했다.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들이 앞을 가로막고, 술사들은 그 뒤에서 술식을 읊기 시작했다.

“갑시다! 살려면 달려야 하오!”

양측이 충돌하기 직전. 아드리안은 이를 악물고 모페이브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군터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모페이브가 제대로 뛰지 못하자 아예 그를 들쳐메고 달렸다.

“잡아!”

즉시 추적자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이 아드리안과 모페이브에게 가까워지려고 할 때마다 군터가 활을 쏘았다. 대충 쏘는 것 같은데도 추격하던 용병들은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어야 했다.

“이 무슨!”

그들은 속사에 가까우면서도 더없이 위력적인 화살에 경악하여 치를 떨었지만, 이 상황이 못마땅한 것은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법.’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적의 실력이 예상 이상임을 느꼈다. 행색을 보아하니 돈에 팔려 다니는 놈들로 보이는데, 모르긴 몰라도 저 정도면 상급이라 할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장군!”

모페이브를 업은 아드리안이 숨을 헐떡이며 그의 앞까지 달려왔다. 군터가 그를 위아래로 살펴보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평소 그의 수하 중에서 강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드리안이 이런 몰골이 된 것을 보아 고초가 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생했다.”

“송구합니다. 제가 모자란 탓에…….”

“쉬어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드리안이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그나마 쓰러지기 전에 모페이브를 부축하여 세워놓고 쓰러진 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힘없이 쓰러진 수하를 내려다보며, 군터의 속에서 열이 치솟았다.

스릉!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모페이브와 아드리안을 노리던 술법을 막기 위해 창을 던져버린 터라, 당장 수중에는 검 한 자루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에 들린 것이 창이 아니라 검인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창은 너무 길어, 찌르고 베어도 감흥이 덜했다. 그에 반해 검은 길이가 짧으니, 살을 찌르고 목을 벨 때 손맛을 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으윽!”

군터는 가장 가까이 있던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덩치에 맞지 않는 쾌속한 움직임에 당황했는지, 적의 대응은 살짝 늦었다. 그것이 그의 빠른 죽음을 확정지었다.

푸욱!

검 끝이 그의 목을 찔렀다. 깊이 박힐 필요도 없었다. 목젖을 찢고, 명줄을 끊는 데는 아주 약간이면 충분했다.

“크륵!”

반응하려던 몸이 굳었다. 군터는 살짝 찔러넣은 검을 도로 빼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둘렀다. 날카로운 절삭음이 터짐과 동시에 일그러진 얼굴이 땅으로 향했다. 잘린 머리가 땅을 뒹굴었다.

파삭!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스치고 지나간 것이 아니라 군터가 반사적으로 피한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기감에는 뚜렷하게 잡히는, 형체 없는 힘을 말이다.

그가 몸을 옆으로 틀기 무섭게, 그의 등 뒤쪽 땅에 세 갈래의 상흔이 생겼다. 덩치 큰 짐승이 있는 힘껏 앞발을 휘두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건 무슨 술법이지?’

순간 궁금해졌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온갖 종류의 술법들이 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군터는 그 모든 것들에 차분히, 하지만 빠르게 대처했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했고, 피하기 어렵게 날아드는 것은 받아쳤다. 평범한 검 한 자루로는 술법의 힘에 맞설 수 없어도, 사기를 머금은 검은 이야기가 달랐다.

쾅!

창을 던져 회색 철퇴를 막았듯, 검을 휘둘러 적의 술법을 받아쳤다. 그러는 데 크게 부담은 없었지만, 검에 부하가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검이 평범한 것이었다면 지금처럼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으아아아!”

우락부락한 인상의 적이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것을 토하면서 달려들었다. 군터는 그의 창을 고개만 살짝 젖혀 피하고,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거칠게 뜯어냈다. 살점이 한 움큼 뜯어지니 건장한 사내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콰직!

쓰러진 그의 머리를 발로 밟아 으깨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직접 검을 들고 나선 이후, 해치운 것이 벌써 열 명을 넘어섰다. 이제 자처해서 그의 앞을 막아서는 자는 없었다. 다만 그가 달려드니 어쩔 수 없이 맞설 뿐.

콰앙!

그 어떤 창칼도, 그 어떤 술법도 그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음험하게 날아드는 술법에 검을 휘두르면서도, 군터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흥분한 기색도 없이, 그저 담담히 피를 뿌리며 걷는 그의 모습에 적들은 전율했다.

“마, 막아! 돈값을 하란 말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술사가 고용인들에게 어서 할 일을 하라 독촉했지만, 그의 말을 듣는 자는 없었다. 이제 서른 정도밖에 남지 않은 용병들은 그들이 저 무시무시한 거한을 결코 막지 못할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사, 살려줘!”

“우리는…우리는 그저 고용주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야!”

그들은 살기 위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의 가치 없는 변명은 군터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의 명을 받은 할렌 및 수하들에게도 마찬가지.

“아악!”

할렌의 검이 춤을 췄다. 그를 상대하던 세 명의 용병이 잘려나간 사지에서 피를 뿜으며 뒷걸음질 쳤다. 살려달라 외친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뭘 늑장을 부리느냐! 장군께서는 이미 놈들을 쓸어버리라 명하셨다! 그럼 그대로 따르면 그뿐이다!”

할렌이 순간 동작이 느릿해진 병사들에게 일갈했다. 그러자 상황이 변하는 것인가 싶어 눈치를 살피던 병사들이 다시 적극적으로 전투에 돌입했다.

“진정 끝을 보려는가!”

사실상의 항복선언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받아들이지 않고 몰아붙이니, 용병들도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혹시나 했던 마음을 버리고 이를 갈았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도는 없었다. 죽든 살든 온 힘을 다해 저항해보는 수밖에.

“어이! 이제는 수가 없소! 다 같이 죽지 않으려면 그쪽도 숨겨둔 패를 다 까란 말이오!”

그들은 뒤쪽에 있는 술사들에게 외쳤다. 감춰둔 술수가 있으면 모두 꺼내라고 말이다. 그들은 저 음흉한 족속들에게 비장의 수가 한두 개쯤은 있을 거라 확신했다. 지금까지 저들을 호위하며 지켜봐 온바, 술사라는 자들은 태생적으로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그들은 절대 자신의 속내를 남에게 털어놓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도 만일을 대비한다. 그들을 호위하면서도, 여기까지 와서 제물을 바치는 것을 보면서도, 용병들은 자신들의 고용주가 언제 어떻게 음험함을 보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는 그것이 몸서리치게 싫었었는데, 지금은 그 불안함에 의지해야 했다. 설마 이런 상황이 올 줄이야.

“적을 막으려면 평범한 술법으로는 부족하다! 위력이 큰 술법을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

“빌어먹을!”

시간 운운하는 데서 이미 욕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시간? 시간이라고? 저 괴물을 상대로 시간을 벌라는 말을 하는 건가?

‘그 시간 좀 벌려면 목을 내놔야 할 판이 아닌가!’

하지만 다른 수가 없다. 당장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적은 멈추지 않을 테니.

“모두 들었겠지! 상황이 뭐같이 돼버렸다! 살려면 목을 걸어야 해! 한두 번 하는 일도 아니잖아?!”

동료들에게 하는 말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내며, 뻔히 보이는 죽음에게 달려들었다.

* * *

“으으……!”

중년의 술사가 이를 악물었다.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술력을 있는 대로 전부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바닥까지 힘을 끌어낸다면, 필시 이 상황이 어찌어찌 지나가더라도 한동안은 후유증에 시달려야 할 터. 허나 지금은 있는 힘은 물론, 없는 힘까지 다 끌어내야 할 판이니 후일에 대한 걱정 따위는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다. 중년의 술사뿐 아니라 다른 자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

그러나 오직 한 명. 루멘만은 얼굴도 일그러지지 않고, 신음도 내지 않으며 눈을 감고만 있었다. 그 신색이 너무나 평온해 보여,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강렬한 기운만 아니었다면 그가 혼자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그가 눈을 떴다. 그의 옆에 있는 중년의 술사는 아직도 신음을 흘리며 힘을 끌어모으고 있었으나, 루멘은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살육의 현장을 눈에 담았다.

“아악!”

처음 용병들에게 일갈했던, 작은 용병무리의 우두머리가 거한의 검에 팔이 잘려나갔다. 이름이…게일이었던가, 케일이이었던가?

‘끝이군.’

살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지만, 루멘은 비관적이었다. 설령 이 자리에 있는 술사들이 모두 비장의 수를 꺼낸다 한들, 저자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신비를 파헤치고 이치를 밝히는 술사답지 않지만, 그는 이 불확실한 직감이라는 것을 무척 신뢰했다. 지금껏 술사로서 살아오며 때때로 이성이 마비됐을 때, 옳은 길을 가르쳐준 것이 다름 아닌 이 직감이라는 놈이었기 때문이다.

‘사기?’

당황하여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조금 진정하고 살피니 거한이 휘두르는 힘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가벼운 몸짓 하나하나에서 죽음의 향이 흘렀다.

‘그렇군.’

루멘은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사령술을 사용하는 거한. 7황자가 총애한다는 무장. 판니른 전역에 무명을 떨치고 있는 그의 이름은, 타지인인 그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무장이면서 직접 술법을 사용한다는 것. 그것도 제국에서 금기로 지정된 사령술을 사용한다는 것 때문에 더욱 그 이름을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래. 내 실수로군.’

그의 시선이 저 뒤쪽에 있는 모페이브에게 닿았다. 그와 그의 무리가 군부에 속해있음은 알았지만, 설마 저자의 수하일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달랐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당시의 그는 눈이 뒤집혀 있었다. 봉인해제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이토록 훌륭한 제물들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눈이 뒤집히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독에 당한 게지.’

상자에 함부로 손을 댄 대가다. 어쩌면 어렵지 않게 상자 안에 든 보물을 취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는 이렇다.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이상 누가 세상 모든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루멘은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그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

그는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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