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화
“으윽!”
짤막한 비명. 그것으로 끝이었다. 굵직한 가시가 살을 파고들고, 피가 빠져나갔다. 근육질에 보기 좋던 몸이 삽시간에 마른 장작처럼 변해버렸다.
“이……!”
아드리안이 이를 부득 갈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의 몸을 짓누른 구속은 분노만으로 떨쳐내기에는 너무 강력했다. 피눈물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이 잔뜩 핏발 선 눈은 섬뜩하기 그지없었으나, 주변의 술사들은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들은 애써 흥분을 억누르며 의식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확실히 건강한 장정이라 그런지, 술사 서넛보다 더 낫군.”
“그러게 말이오. 다행이지. 제물이 부족할 일은 없을 듯하니.”
복부를 꿰뚫었던 가시가 모습을 감췄다. 제단 위에는 가죽이 뼈에 달라붙은 시체만이 남았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걸어 올라가 가벼워진 시체를 밀어 떨어뜨렸다.
“올라가라.”
눈에 초점이 흐려진 병사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제물이 되기 위해 스스로 걸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잔혹하군.”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시오.”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루멘은 굳이 그것을 받아쳤다. 모페이브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대까지 순서가 오지 않기를 바라오. 동지를 제물로 삼고 싶지는 않거든.”
“그 배려가 그다지 고맙지는 않구려.”
“그렇게 말하지만, 그러면서도 먼저 나서지는 않고 있잖소?”
“부인하지는 않으리다.”
루멘이 그거 보라는 듯 씩 웃었다. 조소는 아니었으나, 모페이브는 그것을 조소로 읽었다.
“어떤 봉인인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푸는 것은 위험하지 않겠소?”
“진귀해 보이는 상자가 눈앞에 있다면 한번 열어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
“그 상자에 독이 묻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 정도 위험까지 감내하기 싫다면 어미의 배에서 나오지 말았어야지.”
극단적인 말이지만, 술사들에게는 충분히 통용되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이 금은보화에 홀리는 이상으로, 술사들은 지식과 신비에 끌린다. 세상의 비밀을 엿본다는 것. 그 황홀함과 중독성은 겪어보지 않은 자는 알지 못한다.
제국에서 사령술이 터부시되고 금기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사실 다른 분야를 파고드는 술사들 역시 집념과 광기에 있어서는 사령술사들 못지않다. 단지 그들이 사령술사들처럼 인식이 나쁘지 않은 이유는, 겉으로 비치는 그들의 연구 방식이 조금 점잖기 때문일 것이다. 즉, 껍데기가 조금 더 낫다는 뜻.
바꿔 말하면, 조금 더 나은 껍데기를 제쳐놓고 보면 사령술사든 다른 술사들이든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다.
‘나 역시 마찬가지지.’
갑작스레 자괴, 혹은 회의감 비슷한 것이 들었다. 방금 루멘의 비아냥대는 말에 대꾸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단지 목숨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변명거리는 있지만, 그게 불편한 마음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 * *
“느껴지시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술사의 얼굴에 흥분이 가득했다. 그는 조금 전보다 더 붉게 빛나는 가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봉인이 헐거워지고 있습니다.”
“머지않았소.”
“다음 제물을 올리지요.”
묻는 자나, 답하는 자나 진정하지 못하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목소리만 경박하지 않게 억누르고 있을 뿐, 그들의 행동은 안달이 난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았다.
“올라가라. 어서!”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 넉넉하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제물이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저 고대의 제단은 마치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 항아리와 같았다. 이제 슬슬 찰 것 같은데, 그때마다 부족하다며 입맛을 다신다. 조금만 더하면 될 것 같은데 제물은 바닥을 보여가니, 조바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루멘 공. 무얼 하고 계시오?”
또 한 명의 병사를 제단으로 올려보낸 뒤, 나이 지긋한 술사는 저 아래 반쯤 부서진 기둥 앞에 서 있는 루멘을 발견했다.
“술식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이미 살펴볼 만큼 살펴보지 않았소? 더 본다고 뭐가 나올까.”
“그렇긴 합니다만, 어차피 달리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흠.”
맞는 말이다. 계속 제물을 올려보내는 것 외에 그들이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나이 지긋한 술사는 루멘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시 제단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시 한번, 붉게 빛나는 가시가 제물의 복부를 뚫고 나왔다. 피가 빨려 들어가고, 가시가 꿈틀거렸다. 흡사 발아하기 직전의 꽃을 보는 것 같았다.
“아직인가?”
그러나 꿈틀거리기만 할 뿐,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지켜보던 술사들의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그들의 마음속에 설마 하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이렇게 질 좋은 제물들을 대거 끌고 왔음에도 부족한 것일까?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제물을…….
퍼억!
둔탁한 소리. 희미한 수준이었지만 잔뜩 예민해져 있던 자들의 귀는 그 소음을 놓치지 않았다.
“뭐냐!”
소리는 바깥쪽에서 들려왔다. 혹 의식이 방해를 받을까 싶어, 종들에게 경계를 서게 했다. 이 자그마한 소란은 분명 그쪽에서 일어난 것일 터. 초조하게 제단 쪽만 바라보고 있던 술사들이 벌컥 성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때, 오직 두 사람만은 이상을 감지하고 표정이 바뀌었다.
한 명은 모페이브였다. 그는 희미한 비명이 들려온 순간 눈을 번뜩였다.
‘드디어!’
병사들을 먼저 보내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해온 이유. 그것은 흔적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흔적을 남긴 그의 목숨이 끊기는 순간, 흔적도 빛을 잃을 것이기 때문에.
‘오셨구나.’
모페이브가 이를 악 물었다.
먼저 간 이들의 복수를 위해서, 남은 이들을 보내면서 기다려왔다. 이제 그 기다림의 보상이 따라오려 하고 있다.
‘뭐지?’
한편. 이상을 눈치챈 또 한 명, 루멘은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캄캄한 어둠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뒷골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설마 다른 놈들이?’
그를 포함해 수십이 넘는 술사가 뜻을 합쳤지만, 이 미궁 안이나 지상의 도시에는 면식도 없는 술사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 그들 중 일부가 이쪽의 계획을 눈치채고 급습을 가해온 것이라면…….
‘멍청하게 꼬리를 밟힌 자가 있는 건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주 잠깐, 그의 시선이 모페이브 쪽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아주 잠깐이었다.
‘그럴 리 없지.’
모페이브가 무슨 수작을 부려놓았을 가능성. 그리고 그 수작으로 인해 또 다른 적이 뒤를 밟아왔을 가능성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러니 분명 어떤 음흉한 놈들이…….
피잉!
날카로운 파공음.
퍼억!
그리고 머리가 박살이 나며 뒤로 날아가는 몸뚱이 하나.
‘뭐지?’
피가 튀고, 머리가 반쯤 사라진 몸뚱이가 바닥에 뒹굴 때까지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아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탈진한 것처럼 몸을 숙이고 있던 아드리안이 갑작스레 포박을 끊고, 옆에 있던 용병의 목을 비틀어버렸을 때. 그들은 드디어 깨달았다.
“막아!”
또 다른 용병이 아드리안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검이 채 뻗기도 전에, 또 한 번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지더니 그의 몸이 붕 떠서 나가떨어졌다. 그 사이, 아드리안은 땅에 떨어진 검을 들고 모페이브 쪽으로 돌진했다.
“어림없다!”
중년의 술사가 버럭 외치며 술력을 일으켰다. 지척에서 덤벼들었다면 반응할 방도가 없었겠지만, 지금처럼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면 칼 한 자루 믿고 설치는 무부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있는 불의 술법으로 단번에 저 건방진 놈을 태워버리리라 마음먹었다. 이 순간, 아까운 제물이라는 생각은 사치에 불과했다.
“크윽?!”
속으로 술식을 되뇌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서늘한 무언가가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사이한 기운이 그의 몸속으로 파고든 후였다.
‘이건…….’
다 끌어올렸던 술력이 흩어진다. 공명이 끊기고, 피어오르던 화염이 사그라진다.
“으…아아아…!”
체내에 파고든 이질적인 기운을 몰아내려 필사적으로 기운을 짜냈으나, 그의 노력이 빛을 보기도 전에 시퍼런 칼날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서걱!
일그러진 술사의 머리가 목과 분리되어 붕 떠올랐다. 아드리안은 거친 숨을 토하며 다시 달렸다. 많이 가까워졌지만, 아직도 거리가 남았다.
“그자의 목을 쳐! 당장!”
루멘이 거칠게 외쳤다. 그의 말을 들은 용병이 검을 들었다. 그러자 이제껏 얌전히 있던 모페이브가 몸을 날려 용병의 복부를 들이받았다. 물론 힘없는 술사가 몸을 날린들, 평생 칼밥을 먹으며 살아온 용병이 끄떡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나마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피잉!
그것이면 충분했다.
“윽?!”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기습을 당했을 때는 대응이고 뭐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미 한번 보지 않았던가.
몸을 잔뜩 움츠리고, 검신의 넓은 날 부분으로 머리를 가렸다. 덕분에 파공음이 울렸을 때, 화살촉에 직접 머리가 뚫리는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허나 그 대신.
콰직!
화살을 막은 검이 산산조각이 났다. 일부 파편이 얼굴이며 몸에 틀어박혔다. 일그러진 얼굴에 입이 열렸으나, 짤막한 비명 하나 내지 못했다.
푸욱!
서늘한 눈빛을 토하며 달려든 아드리안이, 그의 검이 소리를 뱉어야 할 목을 찔렀기 때문에.
* * *
두 번째 화살을 쏜 후, 군터는 전력으로 땅을 박찼다. 세 걸음째를 떼었을 때, 아드리안이 적의 목을 찌른 것을 보았다.
여섯 걸음 째.
아드리안이 검을 뽑았다. 그 옆에 쓰러진 모페이브가 막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흐읍!”
그리고 그 뒤에, 철퇴를 닮은 회색빛 형체가 그들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콰직!
달리던 것을 멈췄다. 오른발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군터는 그의 창을 있는 힘껏 던졌다. 사기를 머금은 거무튀튀한 창이 화살보다 빠르게 허공을 찢었다.
콰앙!
회색 철퇴와 검은 창이 부딪치고, 기파(氣波)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 *
콰앙!
검은 창과 회색 철퇴가 부딪치던 순간까지도, 아드리안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 둘이 충돌하기 직전에 섬뜩함을 감지하고, 모페이브를 끌어당기며 몸을 움츠린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크윽!”
폭풍의 앞에 서 있으면 이럴까. 어디서 불어온 것인지 모를 바람에 몸이 흔들렸다. 잔뜩 힘을 주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밀려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쿨럭!”
그러나 그는 그나마 나았다. 모페이브는 이를 악문 그보다도 더 충격을 받았는지, 연신 기침을 토했다. 안색이 창백해진 것이 단순히 바람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