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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67화 (667/1,064)

667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이틀? 혹은 그보다 더…….”

“다 따라잡았군.”

가까워지고 있다. 조금 더 속도를 낸다면 내일 즈음엔 따라잡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반나절 뒤. 또 다른 흔적을 발견했을 때, 흔적을 살피던 병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인원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전투는 꽤 격렬했었던 것 같고…결국 인원이 많은 쪽이 승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에는…….”

말을 이어가던 병사가 재차 인상을 찌푸렸다.

“흔적을 지웠습니다. 저희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요?”

군터는 병사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군터 자신조차도 이곳에서는 기감이 어느 정도 무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술법적인 힘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미궁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작용하고 있음은 틀림없었다.

그에게도 장애가 되는 만큼, 다른 술사들도 예외는 아닐 터. 그런데 하루 이상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그것을 감지하고 흔적을 지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상에 있던 누군가가 저들에게 알렸을 수도 있지만, 군터 일행은 입구를 통해 이곳에 들어온 후부터 모페이브 일행의 흔적을 따라 쭉 바쁘게 이동해왔다. 그런 그들을 앞질러서 소식을 전한다? 그 역시 현실성 없기는 마찬가지.

“그저 조심성이 많은 놈들일 뿐이다.”

술법의 흔적을 최대한 지워놓았다. 누군가를 의식했다기보다, 조심성 많은 자가 신중히 움직이는 것 같은 모양새.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돌아가는 놈들이다. 하지만 놈들은, 머리를 쓸 줄 아는 것이 자기들뿐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

“멀지 않다.”

이곳에서 끝내 안 좋은 꼴을 당한 모양이지만, 다행스럽게도 모페이브는 살아있다. 그는 패하여 끌려가는 중에도 흔적을 남겼다. 뒤따라올 아군이 보고 따라올 수 있도록.

“여기서부터는 더욱 서두른다.”

이곳에서 전투의 흔적을 발견하기 전까지, 군터는 여유를 유지하고 있었다. 모페이브 일행에게 일이 벌어졌음은 짐작했지만, 그리 크게 와닿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몹시 화가 났다. 가슴이 뛰고, 머리가 뜨끈해지기 시작했다.

모페이브는 살아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병사들은? 또한 살아있다면 과연 멀쩡히 살아있을까?

‘어떤 쥐새끼들인지는 몰라도…….’

대가를 치를 것이다. 반드시.

* * *

“음…….”

루멘은 갑작스레 섬뜩함을 느끼곤 침음을 흘렸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술사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오한이 들었을 뿐.”

“이 지하가 기분 나쁜 곳이긴 하지. 그렇다곤 해도…전투에서 너무 힘을 쓰셨던 모양이오.”

“그런가 봅니다. 마음이 들떠서 그만.”

“하하. 그럴 만도 하오. 이 정도 제물이면 틀림없이 봉인을 풀 수 있을 테니까.”

“예. 그렇겠지요.”

그 말에 루멘은 영문 모를 꺼림칙함을 잊고 기대감에 들떴다. 그의 시선이 축 늘어져 끌려가고 있는 제물들에게 닿았다.

“흔치 않은 제물이오. 수도 수지만, 하나같이 생기가 넘쳐. 단련을 쉬지 않는 군인들이라서 그런 것이겠지.”

“그럴 겁니다. 정말 행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요.”

“문제는…저들을 보낸 자가 변고를 눈치챌 것이라는 점인데.”

우려 섞인 말에 루멘이 코웃음 쳤다.

“그럴 테지만, 무슨 상관입니까? 증거도 없을뿐더러, 그자가 눈치를 챘을 무렵에 우리는 이미 성과를 얻은 채 이곳을 떠난 후일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하하.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구려. 봉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말이오. 필시 고대의 보물이나 비술을 감춰두었겠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삼엄한 봉인을 걸어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대화를 나누는 그들 둘만이 아니라,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술사들의 얼굴에도 열기가 감돌았다. 반쯤 탈진한 채 끌려가듯 걸음을 옮기고 있던 모페이브 또한 그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허나 그가 보인 반응은 술사들과는 달랐다.

‘봉인? 보물? 비술?’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귀를 열고 머리를 굴렸다. 그는 이 비열한 습격자들이 무슨 계획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제물…제물이라. 그렇다면 필시.’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저들의 계획을 알아챘다고 해서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래도 희망은 있다. 끌려오는 동안에 남겨둔 흔적. 만약 솔롬에서 이쪽의 변고를 눈치채고 빠르게 원군을 보냈다면, 그들이 그 흔적을 통해 따라올 수 있을지는 모른다. 다만.

‘너무 늦는 것은 아닐까.’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조바심과 흥분 때문일까, 이들의 이동속도는 꽤 빨랐다. 덕분에 끌려가는 입장인 그는 몸이 적잖이 고됐다.

‘아드리안 공 쪽은…….’

슬쩍 남모르게 시선을 움직인 모페이브가 아드리안 쪽을 살폈다. 아드리안의 상태는 그보다도 더 좋지 못했다. 습격자들과의 마지막까지 날뛴 탓에 저들이 더욱 과격하게 금제를 가한 탓이다. 항상 강건한 모습만을 보였던 그는 지금 더없이 쇠약해져 있었다. 그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제때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안락한 세월을 보내며 많이 무뎌졌다고 하지만, 한때 사교의 일원으로서 도망자의 삶을 살았던 그다. 순하기만 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제물인지 뭔지가 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그가 기색을 숨긴 채 틈을 보는 와중에도 이동은 끊기지 않고 계속됐다. 습격자들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익숙한 듯 걸음을 옮겼다. 모페이브는 이들이 목적지로 한두 번 가본 것이 아님을 짐작했다.

‘처음부터 우리를 노렸던 건가.’

그의 시선이 앞서가고 있는 자, 루멘의 등에 닿았다. 지상의 도시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의도를 가지고 접근해왔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었다. 루멘 스스로도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런 음험한 수작을 부릴 줄이야.

‘모두 한패였던가.’

힘없는 눈길이 좌우로 움직였다. 당장 눈에 보이는 술사만 해도 서른 이상. 이 정도면 헤이모라에 몰려든 술사 중에서도 상당수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인원이다. 이자들이 모두 뜻을 함께하고 있으니, 이들의 계획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닐 터.

‘이게 전부도 아니겠지.’

지금 그들이 가고 있는 목적지. 그곳에도 기다리고 있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이런 다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궁금해졌다. 대체 목적지에 있는 봉인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들을 한마음 한뜻으로 묶었을까? 제물이라는 것이 그 봉인을 풀기 위한 것임은 명확하다. 하지만 이 많은 술사들이 손을 잡게 만들 만큼 대단한 것일까?

‘보면 알겠지.’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서 모페이브는 자조했다. 이런 꼴이 되어서까지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술사였다.

* * *

“아아.”

모페이브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감탄했다.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루멘이 피식 웃었다.

“어떻소?”

그리 묻는 목소리에는 일말의 적의도 묻어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자신의 물건을 친구에게 자랑하듯, 살짝 들뜬 채 모페이브에게 감상을 물었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까칠하게 대꾸할 법도 한데, 모페이브는 그럴 정신도 없었다.

“이건…정말 대단하군.”

“그래. 대단하지. 도무지 믿기지가 않소. 현대의 인간들이 고대인들을 얕잡아보지만, 이것을 보고도 그럴 수 있을까?”

“…….”

“이 시대의,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들은 옛것을 토대로 했지.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가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고. 그런데 말이오, 이런 것을 보면…우리가 진정 발전한 것인지 의문이 드오. 더 편한 길을 택했을 뿐, 진정한 진보를 이루었냐는 것이지.”

루멘의 말에는 누구라도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할 말도 무척 많을 것이고.

하지만 그런 자들을 이곳에 데려다 놓고, 이 장관을 감상케 한다면…그때도 과연 같은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적어도 모페이브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마저 잊은 채, 눈앞의 광경에 빠져들었다. 아니, 압도되었다.

“비록 상황이 이런 탓에 우리의 관계가 안타깝게 되었지만, 그렇다 한들 같은 진리의 탐구자가 아니오. 시간을 줄 터이니 충분히 살펴보시오.”

루멘은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가 말했듯, 같은 진리의 탐구자로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지금 모페이브가 느끼고 있을 희열을 짐작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는 자신이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감동을 느끼고 있을 동지에게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을 표했다.

모페이브는 그런 루멘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이 압도적인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지상에 있는 궁이나 신전에 비하면, 이 정도는 크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화려하지도 않다. 한때는 화려했을 수도 있지만, 무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이었다. 기둥 하나하나, 바닥에 난 홈 하나하나에도 술식의 잔향이 맴돌고 있다. 이 건축물 자체가 통째로 하나의 술식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오래된,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건축물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술사의 눈에 이것은, 하나의 거대하고 충격적인 신세계였다.

“눈치채셨소? 이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봉인이오. 이곳의 모든 것이 그 봉인의 일부라고 할 수 있지.”

눈치챘다. 실로 터무니없는 봉인이다. 대체 무엇을 봉인하기 위해 이런 거창한 장치가 필요했던 것일까? 모페이브는 감히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두 달 전쯤에 이곳을 발견했소. 처음에는 용도를 짐작하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술식만을 연구했지. 하지만 연구를 거듭할수록 이 광장의 진의를 엿볼 수 있었고, 이것은 결코 소수의 술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소.”

뻔한 이야기였다. 홀로 가질 수 없는 보물.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 비밀을 알게 된 술사들끼리 손을 잡게 되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거듭하여 이 봉인의 구조에 대해 파악해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이 봉인을 푸는 데 제물이 필요함을 알아차렸다.

“별로 내키지도 않고, 위험한 일이었지. 하지만 그대도 이해할 거요. 진리를 좇다 보면 때로는 가시밭길도 걸어야 한다는 것을.”

대의를 추구하다 보면 자잘한 것은 감내하게 된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합리화지만, 술사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지식과 신비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반쯤은 광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꾸준히 제물들을 구했지. 그들의 생기, 영혼을 갈아 넣었소. 하지만 이 거대한 봉인은 도무지 만족할 줄을 모르더군.”

정확히 얼마만큼의 제물을 구했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소. 그대들 정도면 충분하리라 확신하고.”

루멘의 목소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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