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화
지하 미궁은 모페이브에게 여러모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동안 그가 배워왔고, 믿어왔던 많은 것들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사실 현대의 술사들은 고대의 비술들을 그리 대단치 않게 여기는 풍조가 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로부터 까마득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술법은 끝없이 개량되고 발전되어왔다.
그렇다. 발전이다. 더 나아졌다는 말이다. 더 나은 것이 있는데 굳이 그보다 못한 것에 눈길을 줄 필요가 있을까? 역사가라면 지나간 것에 눈을 돌리겠지만, 술사라는 부류는 그런 비효율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페이브 또한 그런 전형적인 술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지하 미궁의 유적을 살피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달라. 뿌리 자체가 다르다.’
과거의 술수에 토대를 두고 발전해온 것이 현대의 술법이다. 그러나 이 미궁에서 발견한 과거의 흔적들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고대인들은…스스로 발현하지 않아. 빌려오고 있다.’
다른 차이도 있지만, 가장 큰 차이를 지적하자면 바로 이 점이다. 현대의 술사들은 자신의 술력을 기반으로 세상의 기와 공명하여 힘을 발현하지만, 이 미궁의 흔적에서 나타나는 고대인들은 힘을 외부에서 빌려오고 있다. 다름 아닌, 그들이 숭배하는 신으로부터.
‘제물을 바침으로써 대가를 치르고, 신의 힘을 빌린다. 그런 설이 있기는 했었지.’
아주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다. 음험한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 도움을 구한다는 식의, 야만스러운 의식에 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들어본 적은 있었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괴거 바크렌, 그러니까 베이고르에도 토착신이 있었고 베이고르인들은 그들의 신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숭배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 숭배의 방식은, 이 미궁에 드러난 고대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방식은 고대인들의 것처럼 잔혹하지 않았고, 대개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물론 사서에 따르면 제국과 전쟁을 치르던 당시, 베이고르가 그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쳐 도움을 구했다는 구절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하게 서술된 데다,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탓에 진위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기록된 것이 창작일 리는 없겠지. 그러나 이곳을 만든 자들이 벽화에 나오는 당사자들이나, 그 후손일까?’
그런 것 같기는 하다. 벽화에서 내용을 다루는 방식이 부정적이지 않은 탓이다. 부정적이기는커녕, 중요한 순간을 다룰 때 내용이 더 상세해지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강조까지 하고 있다. 만약 이 미궁을 만든 자들이 벽화 속의 고대인들과 적대적이었다면 이렇게 표현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벽화 속의 세상은…그야말로 야만의 시대로군.’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벽화를 통해 보고 있을 뿐이지만,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쾌함이 치솟을 정도다.
‘게다가…….’
계단을 내려가 도착한 제단의 내부에서, 모페이브는 신경 쓰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 또한 벽화였는데, 그가 힘들게 올라온 이 제단과 매우 흡사한 무언가를 짓고 있는 고대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수십, 수백 개는 될 법한 제단.
그것을 다 짓고 난 후, 고대인들은 그 제단들을 이용해 의식을 치렀다. 그 의식이란…….
“왜 그러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만.”
아드리안이 모페이브를 보며 물었다. 제단 안에서 본 것을 떠올리자 순간적으로 속이 더부룩해졌는데, 아드리안이 그 짧은 변화를 알아본 듯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하라서 그런지 공기가 탁해 속이 답답해져서 그럽니다.”
“벌써부터 그러시면 어찌합니까. 여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아드리안이 혀를 찼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군인으로서, 그리고 무인으로서 육체단련을 쉬지 않는 그와 병사들과는 달리 모페이브는 술사였다. 전투 술사도 아닌 그가 평소 몸을 단련했을 리 만무하다.
“이거, 일정을 조금 조절해야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요. 연구도 연구지만, 모페이브 공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연구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이렇게 하지요. 이곳에서는 닷새만 머무는 겁니다. 닷새가 지난 뒤에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몸을 회복하고, 그런 연후에 다시 내려와 탐색을 재개하는 거지요.”
모페이브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했으나, 아드리안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가느다란 모페이브의 몸에 닿을 때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아드리안이 그렇게 고집을 꺾지 않으니 모페이브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아드리안의 뜻대로 따르기로 약속했다.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쉬도록 하지요.”
이동하던 중. 아드리안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모페이브가 슬슬 다리가 무겁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라고는 하지만 오늘이라는 말도 어색하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지하에서는 하루가 지났는지 안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체감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이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온 지 이틀 즈음 지났을 때부터는 믿을 수가 없어졌다. 몸의 감각이 흐려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모페이브뿐 아니라 병사들, 심지어 아드리안마저 받고 있었다.
‘묘하게 몽롱하단 말이지.’
피곤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동할 만큼 이동한 다음에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 모페이브에게 조용히 물어보았지만, 그도 짐작 가는 바가 없는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래도 말이야. 아직 다른 자들과 마주치지는 않았잖아.”
“맞아. 난 술사들과 싸워야 할 일이 생길까 싶어서 꽤 긴장하고 있었거든.”
생각에 잠겨있던 차에, 병사들이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왔다.
‘맞아. 아직 다른 자들을 본 적이 없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조금 이상하기도 한데.’
이곳에서 마주치는 자들은 적으로 상정해야 한다고 본인부터가 병사들에게 단단히 당부했었다. 그런 만큼, 다른 자들과 마주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그 점에 대해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알려진 바로 이곳으로 이어지는 입구는 세 곳이다. 우리가 그중 하나로 들어왔으니, 아무리 우연히 겹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한 번쯤은 다른 자들을 맞닥뜨릴 법한데…….’
이 지하 미궁이 더럽게 넓다는 것은 충분히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헤이모라로 몰려든 술사들이 한 둘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이런 음습하고 답답한 곳에서 오랫동안 버티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그들 역시 일정 시간 동안 탐색을 한 후에는 지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그러려면 자연히 입구 쪽으로 이동해야 할 터.
‘뭐가 됐든, 이제 하루 남았다. 지상으로 올라갈 때까지만이라도 더욱 주의해야겠군.’
칙칙한 어둠 속에서 감각이 무뎌질수록, 경각심만은 더욱 꼿꼿이 고개를 들었다. 숱한 사선을 넘어오며 단련된 전사의 본능이 그에게 쉼 없이 경고를 던졌다.
“잡담은 그쯤 하도록.”
“옛.”
아드리안은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에게 나직이 말했다.
“이곳이 전장이라면, 적이 우리를 치기 가장 좋은 시점은 바로 지금이다. 몸은 노곤해졌고, 긴장은 적당히 풀렸지. 너희도 경험이 적지 않으니 더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아드리안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데려온 병사들은 대충 끌고 온 이들이 아니었다. 경험이 많고 실력도 뛰어난 정예병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이 변한 것을 확인한 아드리안은 모포를 배까지 끌어 올리고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 날.
이동을 재개하던 중. 아드리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냈다.
“거기. 나오시지.”
모페이브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지체하지 않고 무기를 빼들며 그를 둘러쌌다.
“이런. 어떻게 알았지? 감이 좋군.”
아드리안이 바라보고 있던 방향에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선두에 있는 자는 모습이 눈에 익었다.
“루멘……?”
모페이브가 그의 이름을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 * *
“장군. 하온대 모페이브 공 일행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지하 미궁에 내려온 직후, 할렌이 군터에게 물었다. 생각보다 더 짙은 미궁의 어둠을 마주하고 마음이 답답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모페이브 일행을 찾을 수 있을까.
“어렵지 않다.”
군터는 그런 할렌에게 담담히 답했다. 그의 눈은 이곳에 깔린 짙은 어둠도 능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모페이브는 영리한 자니까. 그런 자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험지를 돌아다닐 리 없지.”
“예?”
군터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할렌을 뒤로 하고, 천천히 몸을 굽혔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울퉁불퉁한 석재 바닥에는 먼지가 세월의 흔적처럼 잔뜩 쌓여 있었다.
하지만 군터는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은밀한 것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흔적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저 쫓아가면 그뿐.”
모페이브는 흔적을 남겼다. 아니, 흔적이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 아주 그냥 대놓고 보라고 남겨놓았다. 기감이 일반적인 술사를 훨씬 상회하는 데다, 모페이브의 기운에 익숙하기까지 한 군터는 그리 여겼다.
“이동하겠다.”
군터 일행은 모페이브가 남긴 길을 따라 이동했다. 그 길은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고 있어서, 절대 알아보지 못할 일이 없었다.
“정말 대단합니다. 이런 곳을 개인이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쉬지 않고 이동하던 중. 할렌이 지하 미궁의 규모에 감탄하며 말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뒤따르던 병사들도 감상은 마찬가지였다.
“글쎄.”
그에 대해서는 군터도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사실 그는 처음에 이 지하 미궁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미궁이라는 것이 어떤 술법적인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일전에 송곳 탑을 보고, 직접 들어가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송곳 탑이라는 것은, 세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거창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직접 그곳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군터는, 어쩌면 그것이 허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공간이 멋대로 움직이고, 변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 실존하는 탑이기는 해도, 그 크기는 밖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마찬가지로, 지하 미궁이라는 곳도 술법으로 인한 감각의 마비 혹은 착각 때문에 거대하게 느껴질 뿐이지 실제 크기는 그리 대단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직접 내려와 며칠을 이동해보니 알 수 있었다. 술법적인 힘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이 지하 미궁이 어마어마한 규모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을 쿠엘단이 지었다고?’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왠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