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4화
솔롬으로 돌아가기 전, 군터는 하잘에 들러 로드니 캄브라이를 만났다. 그는 군터를 성대하게 맞이하며 웃는 낯으로 물었다.
“어떠셨소?”
“자이드라 멕시스가 대단히 적극적이더군.”
“그럴 수밖에 없지. 그는 조정을 휘어잡은 귀족들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었소. 그동안에는 의심만 받았다면, 이제는 확신을 주고 적이 된 셈이지. 아무리 계획하고 움직인 것이라지만, 상황이 급해졌으니 어린아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지 않겠소?”
군터는 로드니 캄브라이가 상당히 들떠 있다고 느꼈다. 자이드라 멕시스쯤 되는 자가 자신의 도움을 원한다는 사실이 꽤 즐거운 듯했다. 어쩌면 벌써부터 화려한 복귀를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정의 상황은 어떻더이까? 물론 대강 짐작이 되기는 하오만.”
“짐작하고 있는 그대로일 거요. 물어뜯으려는 쪽과 받아치려는 쪽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지.”
“구체적으로는?”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면 직접 가보지 그러시오.”
“아하. 장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소.”
로드니 캄브라이는 재빨리 사과하며 얼굴의 웃음기를 지웠다.
“장군의 눈에는 어찌 보였소? 서부 총독 중심으로 모인 자들과 조정 귀족들의 밑에 모인 자들. 어느 쪽의 세가 더 크더이까?”
“4대 6.”
“서부 총독 쪽이 4겠지?”
“그렇소.”
내심 반대이길 기대했던 것일까. 로드니 캄브라이가 들뜬 기색을 가라앉혔다. 그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빙긋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알고 계시오? 헤이모라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오.”
“심상치 않은 일?”
로드니 캄브라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송곳 탑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헤이모라에 들어선 자들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 것을 두고서 쿠엘단 전하께서 헤이모라를 떠나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소. 심지어는 그분께서 무슨 유산을 남겨두셨다는 이야기까지.”
거기서 한숨을 쉰 그는 그 유산이라는 것 때문에 술사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곳은 지금 완전히 무법지대가 되었다더군.”
“손을 쓰지 않는 거요?”
“손을 쓴다고? 누가 그럴 수 있겠소? 군주들의 영지는 불가침의 영역이오. 그 어떤 고관도 그곳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지. 관여하는 순간 황명을 어기는 셈이 되며, 군주들의 진노를 사게 될 텐데 누가 감히 그러겠소? 물론 송곳 탑이 사라진 것이나, 기타 정황 등을 보면 쿠엘단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의심만으로 목숨을 걸 자들은 많지 않지.”
눈이 벌게져서 헤이모라로 몰려드는 술사들이 있으니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불확실한 것에 목숨을 걸려 하지는 않는다.
“사실 나는 이 소란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소.”
“무슨 뜻이지?”
“장군도 알고 있다시피, 헤이모라는 골치 아픈 곳이오. 비단 헤이모라뿐만 아니라 영지라는 곳이 다 그렇지. 건드릴 수 없는 땅이 세력권 안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으면 누군들 속이 편하겠소? 하물며 거기 있는 것이 언제 활활 타오를지 모르는 거대한 불씨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했소.”
“이번 소란이 끝나면 확실해질 거요.”
쿠엘단의 부재, 혹은 입에 담기 힘든 그 이상의 무언가까지.
‘쿠엘단이 죽었기를 바라고 있군.’
어디 그런 자가 로드니 캄브라이뿐일까. 7황자 휘하의 관리 열 중 아홉은 같은 마음일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불안요소는 없는 편이 나으니.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이 있소. 우리의 대에 이르러, 뭔가 시대가 크게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
“황좌가 빈 것부터 시작해서,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소. 황자라는 작자가 아바시스 놈들을 끌어들인 것도 그렇고, 이번 헤이모라의 일도 그렇지. 난 내가 무언가, 거대한 흐름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하오. 장군은 그렇지 않소?”
“글쎄. 난 잘 모르겠군.”
“하하. 어쩌면 내가 과민한 것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들뜬 것일지도 모르고.”
군터는 쓸데없이 잔뜩 고무된 로드니 캄브라이의 헛소리를 더 듣고 싶지 않아 화제를 바꿨다.
“몰던과 해들리르의 일은 어떻소?”
“잘 진행되고 있지. 물론 몰던의 입장에서 말이오.”
그는 해들리르 형제의 다툼이 극에 다다랐다고 했다. 매일 가문 내의 인사들이 죽어 나가는 형국에, 내일 당장 가문 내에서 내전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몰던은 조금 더 끌 생각인 것 같지만, 아마 조만간 끝날 거요.”
“끝난다고?”
“아무리 이용당하는 처지라지만, 그쪽도 바보는 아니라서 말이오. 동생이 형의 목을 칠 거요. 아니면 그 반대던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군.”
“사실이오. 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몰던과는 동맹이지만, 해들리르에서 벌이는 일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것이다. 몰던이 들으면 섭섭해할지도 모르지만, 로드니 캄브라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해들리르의 일이 끝나면, 난 몰던에게 대가를 요구할 거요.”
“테리브란으로 돌아갈 셈이오?”
“그렇소. 하지만 당장은 아니오. 테리브란의 분위기가 조금 더 무르익어야 할 테고, 나도 준비를 해야겠지. 시기가 갖춰지고, 나도 준비가 끝나면…그때는 장군의 도움도 필요로 하게 될 거요.”
“그런 이야기는 그때 가서 하시오.”
“하하. 그러지.”
* * *
군터는 모페이브가 헤이모라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테리브란에 머물던 중에 들었다. 모페이브는 그에게 헤이모라로 가도 되겠느냐 허락을 구했고, 군터는 선선히 허락했다.
그때는 별생각 없었다. 그저 열심히 하는구나, 하는 정도? 하나 더 하자면, 과연 그 쿠엘단이 유산을 남겼을까…하는 의구심 정도.
하지만 솔롬에 돌아왔을 때, 모페이브의 소식이 끊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곳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수하들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군터는 그들의 반응을 보고 자신이 간과한 것을 깨달았다.
헤이모라는 여전히 제국의 금지였다. 송곳 탑이 사라졌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확인했지만, 쿠엘단이 확실히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이는 오직 군터 자신뿐이었다. 제국민들도, 그의 수하들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최악의 상황을 제한다면, 헤이모라로 몰려든 술사들과 일이 생겼을 수 있습니다.”
“아드리안이 함께 가지 않았습니까?”
“술사들이 얽히는 문제 아닌가. 칼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지.”
수하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군터는 생각에 잠겼다.
헤이모라에 얼마만큼의 술사들이 몰려들었는지는 모른다. 단지 적잖은 수가 모여들었으며, 지금도 모여들고 있다는 것만 알뿐.
“엿새라고 했나?”
“예. 본래대로라면 엿새 전에는 소식이 왔어야 합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발생하면 하루 이틀, 혹은 사흘 정도까지는 늦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엿새쯤 된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가보겠다.”
“예? 하오나 그것은…….”
“조용히 다녀올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솔롬에 돌아오기 전에 하잘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인지, 군터는 아직 연락이 늦어지고 있는 것을 심각하게는 여기지 않는 수하들과는 다르게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술사들이 적잖이 모여들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헤이모라의 특수성 때문에 많은 병력을 움직일 수는 없으니, 수하들 몇을 보낸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괜히 어설프게 몇 명 보냈다가 그들마저 소식이 끊긴다면 그때는 어찌할 것인가. 그때는 뭘 해보려고 해도 이미 늦은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느니, 차라리 지금 직접 움직이는 편이 나으리라.
“그러시다면…소관이 모시겠습니다.”
군터는 자진하여 나선 할렌과 몇몇 친위대 병사들을 거느리고서, 솔롬에 돌아온 당일에 다시 헤이모라로 떠났다. 올 때도 부지런히 이동하여 왔는데, 헤이모라로 향할 때는 전속행군을 할 때 이상으로 바쁘게 말을 달렸다.
* * *
“이곳이 헤이모라입니까? 뭐랄까…기분 나쁜 곳이군요.”
할렌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지겹도록 들었던 새소리가 헤이모라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짐승들뿐만 아니라, 땅 전체가 입을 다문 듯 고요했다. 간간이 지나치는 마을에서도 마찬가지. 외지인들의 출현에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촌민들조차도 영지 밖의 촌민들과는 뭔가 달랐다. 마치 이 기묘한 땅의 기묘한 분위기에 잠식이라도 된 것 같았다.
“인형의 도시라.”
이동하던 중 마주쳤던 촌민 한 명에게 들은 말이다. 쿠엘단이 거하는 탑의 도시, 그곳을 그렇게도 부른다고 했다.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 사는 도시라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던가.
하지만 군터 일행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인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무수한 인간들이었다.
“저자들이 모두 술사입니까?”
여느 도시들처럼 붐비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리 곳곳에서 심심찮게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인형처럼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모두 술사란 말인가?
“아니다.”
할렌의 물음에 군터는 고개를 저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저들이 모두 술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셋 중 하나는 술사였으니,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 흔치 않은 술사가 이곳에서는 과장 좀 보태서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보이니 말이다.
“흔적을 찾아라.”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요.”
“모페이브는 신중한 자다. 이런 곳까지 와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채 움직였을 리는 없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연락책 정도는 남겨놨겠지.”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소식이 끊겼다면, 뭔가 일이 틀어졌다는 뜻.
“모페이브는 병사들과 함께 움직였지. 이곳에 와서 보니 그런 인원 구성은 흔하지 않다. 분명 목격한 자가 있을 것이다. 찾아라.”
“예.”
명을 받은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