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3화
계단을 내려가는 어느 순간부터, 모페이브는 기감이 흐트러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착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희미한 느낌에 불과했지만, 점점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을 더 붙여라.”
지하의 어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짙었기에, 아드리안은 병사 두 명에게 말해 더 횃불에 불을 붙이게 했다. 하지만 그러고서도 간신히 주변 분간만 어느 정도 될 뿐, 시야가 탁 트일 정도는 아니라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벽에 손을 대지 마라. 앞사람의 등을 보고 걸어.”
아드리안이 벽 쪽으로 손을 뻗으려던 병사를 보고 차갑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병사가 벽으로 뻗던 손을 흠칫하며 거둬들였다.
“끝인 모양입니다.”
얼마나 계단을 내려갔을까. 세 사람이 나란히 서면 좁은 정도의 공간이 끝이 나고,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모페이브와 아드리안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이곳이야말로 미궁의 시작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횃불을 끄도록 하지요.”
“예?”
“지금부터는 이 등을 사용하겠습니다.”
모페이브가 자그마한 호롱불을 들었다.
“아끼시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본래는 그럴 계획이었습니다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끼려면 이 등이 아니라 횃불을 아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느낌…입니까.”
아드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모페이브의 판단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전장이라면 모를까, 여기는 모페이브의 영역이다. 아드리안은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언제든 칼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해두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모페이브가 등에 손을 대고 주문을 읊은 순간, 주변이 환해졌다. 횃불 열 개를 합친 것보다 더 밝은 빛이 주변에 퍼지자 병사들의 얼굴에 어려 있던 긴장감도 조금 가시는 듯했다.
“음.”
모페이브는 입구 앞의 바닥에 자그맣게 흔적을 남겼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그마한 표식에 약간의 술력을 불어넣었다. 다른 기능은 전혀 없는 술식이니, 이 정도면 열흘 정도는 문제없이 지속될 것이다.
“이동하겠습니다.”
* * *
아드리안과 병사들은 이동하는 내내 잔뜩 긴장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페이브는 전혀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지금 흥분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이 거대한 지하 미궁은 지식의 보고와도 같았다. 미궁 어딘가에 있을 거라 추측되는, 쿠엘단의 유산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기묘하군.’
예를 들면 이 벽화가 그렇다.
그들은 지금 미궁의 벽에 붙어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동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은 덕에 벽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볼 여유가 있었다.
‘원시 부족 사회…….’
벽화는 틀림없이 고대의 신비를 다루고 있었다. 제대로 된 복색도 없이, 대부분이 가죽옷을 입은 자들이 제단에서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그 신이, 숭배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제물을 받은 그들의 신은 그 부름에 응답했다. 그리고는.
‘전쟁.’
대부분이 그런 그림이었다. 잘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만, 대개 제사가 끝난 다음에는 전투가 벌어졌다. 정복하고, 제물을 바치고,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
사실 이런 내용만 놓고 보면 별로 흥미가 생길 이유가 없다. 이런 식의 오래된 벽화 같은 것은 다른 곳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무지했던 고대 야만인들이 인신공양 등을 통해 그들의 토속신을 섬기고, 그로부터 힘을 얻어 전쟁을 벌인다는 식의 흔한 서사구조.
그러나 이 지하 미궁의 벽화가 모페이브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벽화의 내용이 그런 흔한 것들과 달리 상당히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제물을 바치는 과정, 신자들의 제사에 응답하는 신. 그 후의 전쟁 과정까지. 일반적으로 벽화라는 것의 내용이 두루뭉술하거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축약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지하 미궁의 벽화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그려 넣는 것은 상상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지.’
이런 종류의 고대 벽화는 사실의 기록보다는 업적의 과시를 위한 용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그런 벽화는 과시하고픈 몇 가지만을 과장해서 그리곤 한다.
그런데 이 벽화는 그런 일반적인 벽화들과는 전혀 다르다. 강조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축약이나 두루뭉술하게 넘기는 부분 없이 서사구조가 짜임새 있게 잘 드러나 있다. 보는 이들의 입장에서 역동적인 그림에 감탄하기보다는, 그 서사구조에 절로 몰입하게 된다. 그만큼 설득력이 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됐다. 나중에 손을 댄 흔적은 조금도 없어.’
모페이브에게 고고학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가 벽화를 보고 연대를 추정한 것은 벽화에 걸려 있는 술식, 정확히는 술식이었던 것의 흔적을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쓰이지 않는 형태의 술식. 가끔 발견되는 오래된 유적에서나 이와 유사한 형태의 술식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쿠엘단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세상 모든 지식과 비밀을 알고 있다는 그라면…이런 고대의 술식도 구현할 수 있을지 몰라.’
그래.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 굳이 그런 수고를 들여서 이런 벽화를 만들 이유가 있나?
‘이 미궁은…쿠엘단이 만든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거대한 탑을 하루 만에 세운 초인이라지만, 이 거대한 미궁은 뭔가 다르다. 이곳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시간의 흐름만은 그 어떤 대단한 술법도 꾸며낼 수 없으니, 이 미궁은 분명 쿠엘단이 헤이모라에 자리를 잡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리라.
‘미궁 위에 도시를 만들었다. 이곳을 발굴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단순히 생각하면 그럴 것 같지만, 왠지 그게 다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술사로서의 직감이었다.
‘쿠엘단이 이곳을 발견했다면, 그것이 과연 우연었을까?’
헤이모라가 생기게 된 배경은 잘 모른다. 황제가 군주들에게 영지를 하사했고, 군주들이 자신들의 영지에 이름을 붙였다는 것 정도밖에는.
그러나 지금 이렇게 와서 보니, 단순히 하사받은 것이 전부가 아닐 것 같았다. 만약 쿠엘단이 이 지하 미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헤이모라는 그가 원해서 받은 땅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십중팔구는 그랬을 터.
“이곳이 뭐하던 곳이었는지 점점 궁금해지는군요.”
아드리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탁 트인 공터에서 어지간한 건물 서너 개를 쌓아 올린 높이의 거대한 제단을 본 직후였다.
“이거…전에 벽화에서 본 것과 똑같은 것 같습니다만.”
모페이브가 워낙 유심히 벽화를 살펴본 탓에, 아드리안도 덩달아 얼핏 벽화의 내용을 흘깃거렸다. 때문에 벽화에서 심심찮게 등장했던 제단의 형태를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것은 아닐 겁니다. 고대인들 나름대로 제단을 쌓아 올리는 양식이 있었겠지요.”
세련된 맛 없이 투박하지만 조잡하지는 않다. 압도적인 규모에서 오는 웅장함은 이 시대의 것 못지않다.
“그럴까요?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제단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생각은 제단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짙어졌다.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도 모를 제단에서는 음산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그 기운의 정체는 굳이 궁금해할 필요도 없이 바로 알 수 있었다.
‘귀기.’
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이 제단에서 죽어 나간 것일까.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만큼 망령들은 이미 오래전에 흩어져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원독은 제단을 이루고 있는 돌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음산함을 더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아드리안의 목소리에는 꺼림칙함이 가득했다. 어지간하면 저 불길한 건축물에 이 이상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은 기색이었다.
“살펴보지요.”
하지만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던 벽화를 제외하고, 이 지하 미궁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한 발견다운 발견 아닌가. 물론 먼저 들어온 자들이 이런 거대한 제단을 못보고 지나쳤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일었다.
“알겠습니다.”
“병사들과 함께 주위를 경계해주십시오. 살펴보는 것은 저 혼자서 하겠습니다.”
죽상이 되어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그 말과 동시에 활짝 펴졌다. 아드리안은 그런 병사들의 추태를 모르지 않았지만, 이번만은 그냥 넘어갔다. 사실 그 역시도 저 제단에 오르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겁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호기심 같은 것도 생기지 않는데 굳이 꺼림칙한 것에 다가갈 필요는 없지 않나.
그리하여 모페이브는 홀로 제단을 올랐다. 울퉁불퉁한 계단은 오랜 세월이 흐르며 군데군데 부러지고 깎여나갔으나, 어떻게든 발을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이건…….’
계단을 오르는 내내, 모페이브는 바닥을 보며 걸었다. 희미한 얼룩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핏자국일 것이다. 이 제단에서 희생당한 무수한 고대인이 남겼을.
‘독특하군.’
제단이라는 것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축물이다. 그리고 신과 소통하기 위해서, 대개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제물을 바친다. 신이 하늘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제단은 독특하다. 신과 통해야 할 제단이 지하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아무리 제단을 높게 세워봐야 하늘이 막혀 있으니 무슨 소용인가.
‘둘 중 하나겠지.’
이 미궁이 사실은 지하 미궁이 아니었거나, 혹은 이 도시의 고대인들이 섬기던 신이 하늘에 있지 않았거나.
‘역시.’
계단을 계속해서 올라 마침내 끄트머리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또 나왔다. 기껏 올라왔더니 다시 내려가는 구조. 마치 꼭대기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 같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다.
이 내려가는 계단을 통한다면 제단의 중심부로 향하게 될 터. 모페이브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음?’
올라올 때 그랬듯, 내려갈 때도 한참을 내려갔다. 아마도 제단의 중심부에 거의 닿았을 즈음, 모페이브는 신경 쓰이는 것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이건…….’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