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2화
“판니른 총독과 그대가 뜻을 모으고 있다면…혹, 몰던과도?”
그냥 한번 툭 던지는 것 같은 물음이지만, 이쪽의 속내를 들여다보겠다는 속내가 뻔히 보였다. 군터는 이번에 테리브란에 와서 자이드라 멕시스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이드라 멕시스의 화법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여우라는 별명답게 사람의 마음을 가늠하는 재주가 탁월했다. 상대를 떠보기를 즐기며, 머릿속으로는 항상 계산을 멈추지 않는다. 지금도 이렇게 물음을 던지기는 하지만, 군터는 이미 그가 반쯤은 확신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뭘 물으시오.”
“추측은 추측일 뿐이오. 직접 듣는 것이 낫지.”
“추측하는 대로요.”
“그렇군. 캄브라이의 추방자가 돌아올 날이 머지않았어.”
그리 말하는 자이드라 멕시스는 꽤 즐거워 보였다. 테리브란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일각이 캄브라이인 만큼, 그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로서는 이득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로드니 캄브라이가 그의 동맹이 된다면?
“어떤 것 같소?”
“음?”
“필시 판니른 총독에게 언질을 들었을 것 아니오. 내가 그에게 동맹을 제의했으니, 그는 답을 내리기 전에 이곳의 상황을 살피고자 했을 터. 그의 눈이 될 수 있는 이가 장군 외에 더 있겠소? 어떻소. 이제 판니른으로 돌아가면 장군은 그에게 뭐라 전할 것이오?”
“본대로 전해야겠지.”
“같은 것을 보고도 달리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지. 그러니 나는 장군의 생각을 듣고 싶소.”
“…….”
“장군도 확인했다시피, 저 오만한 자들은 자신들이 경쟁자는 물론,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자들까지 모두 짓밟으려 하고 있소. 저들의 뜻대로 된다면 장군도 그렇고, 판니른 총독도 결국 무사하지 못할 거요. 뭐, 목이 날아가지는 않겠지만…혹시 또 모를 일이지. 그리고 그게 아니라고 해도 여러 곤혹스러운 일을 겪게 될 터. 당연히 그런 것은 장군도 바라는 바가 아닐 테고.”
“내가 그에게 좋은 말을 해주기를 바라는 건가. 직접 설득하지 그러시오.”
“물론 그리 할 거요. 하지만 옆에서 거들어주는 말이 있다면 더 쉽겠지.”
자이드라 멕시스를 위해서 한 마디를 보탤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미리 로드니 캄브라이에게 부탁을 받은 만큼, 여기 와서 본 것을 그대로 전해줄 생각이었다.
“본 대로만 말해도 충분할 거요.”
그 말에 자이드라 멕시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장군을 믿지.”
군터는 로드니 캄브라이가 결국 자이드라 멕시스의 손을 잡을 것이라 예측했다. 그는 테리브란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자리를 되찾으려 한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이드라 멕시스 같은, 테리브란에 있는 힘 있는 조력자가 필수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니 손을 잡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오만했지.’
캄브라이도 그렇고, 제레이스도 그렇고, 어쩌면 만들지 않았을 수도 있는 적을 만들어버렸다. 군터는 그것이 그들의 탐욕도 탐욕이지만, 오만함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에 취해 있다. 언제나 그래왔으니, 이번에도 자신들의 강력한 권력으로 찍어누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물론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나중에 가서야 알 수 있는 일이다.
‘권력이라.’
모두가 권력을 쥐기 위해 필사적이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인 것처럼,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그런데 군터는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어 보였다. 한때는 그 역시 권세를 원한 적이 있었다. 물론 제레이스나 자이드라 멕시스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출세욕에 불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글쎄.
아무런 감흥이 없다. 마치 욕망이라는 감정이 거세되기라도 한 느낌이다. 왕궁의 대전에서 체슈퍼 캄브라이를 필두로 한 조정 귀족들이 몰아붙일 때도 마찬가지. 불쾌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버지.”
자이드라 멕시스와 이야기를 마친 날 밤. 실비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음?”
“제 무술을 한 번 봐주세요.”
보리스를 통해서, 그리고 그전에는 모페이브를 통해서 실비아 무술을 수련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들었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조금 하다가 말겠지 하고 가볍게 넘겼으나, 의외로 근성을 가지고 꾸준히 한다는 말에 필요한 것은 모두 지원해주라고 언질을 주었었다.
그게 벌써 거의 1년 전의 일이다. 보아하니 그동안 수련한 것을 확인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좋다.”
어렵지 않은 일. 군터는 실비아와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후우.”
실비아가 검신이 조금 얇은 장검을 늘어뜨리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하지만 힘 있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절도 있는 자세로 몇 차례 검을 휘두르던 실비아의 몸놀림은 점차 빨라졌다. 나중에 가서는 쾌속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빠르게 검을 놀렸는데, 그러면서도 검의 궤적이 살짝 거칠어졌을 뿐 자세가 크게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법.’
지켜보던 군터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1년 정도 수련을 한 것치고는 상당한 실력이었다. 아무리 검이 일반적인 것보다 조금 가볍다지만, 여인의 몸으로 저 정도를 해내려면 상당한 노력과 재능이 필요했을 터.
“어떤가요?”
검무를 끝마친 후, 실비아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얼굴에 땀은 흘렀지만, 호흡은 거칠어지지 않았다. 빠르게 검을 놀리면서도 힘 조절을 잘했다는 뜻. 또한 검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제대로 검을 휘둘렀다는 뜻이다. 이점만 놓고 봐도 무인으로서, 검사로서의 기본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괜찮았다.”
조금 더 큰 칭찬을 바랐던 것인지, 군터의 무뚝뚝한 말에 실비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지우더니 군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버지. 저, 여행을 떠나보고 싶어요.”
“여행? 어디로 말이냐.”
“목적지를 따로 생각해두지는 않았어요. 발길이 닫는 대로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요.”
“내가 허락하지 않을 것은 알고 있겠지?”
“왜죠?”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경험 많은 전사들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하물며 여인의 몸으로…….”
“여성 용병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들 대다수가 함께 다니는 남성 용병의 정부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아느냐.”
“…….”
“네 검술은 잘 보았다. 1년가량 연마한 것치고는 꽤 괜찮은 수준이다. 하지만 무술 실력이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세상에는 네가 생각지도 못한 온갖 위험이 산재해 있다. 검술 실력 같은 것은 그 위험을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
“그럼 무엇을 익혀야 그 위험에 대처할 수 있죠?”
“그런 건 없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이들 모두, 위험을 감수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네게 그런 각오가 있느냐? 내일 당장 목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마음 한구석에 늘 품고 있어야 한다.”
“저도…….”
실비아가 벌컥 항변하듯 입을 떼던 찰나. 군터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잘 생각하고 이야기해라. 난 네게 그 정도 각오가 되어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안전한 담장 안에서 태어난 네가, 몸을 씻는 것, 밥을 먹는 것조차 시녀들의 수발을 받으며 자라온 네가 야지의 삶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아. 만약 네가 지금 네 입으로 그럴 각오가 되어있노라고 말한다면, 난 네게 실망하게 될 거다.”
“…….”
이제껏 군터는 자식들, 특히 실비아를 대하면서 말 한마디 한마디에도 최대한 신경을 써왔다. 실비아가 어리기도 했고, 여아 특유의 예민한 감정을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실비아는 단 한 번도 부친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마치 생판 모르는 남을 대하는 것 같은 생소한 목소리에 바짝 굳었다. 경험한 적 없는 온도차. 거기서 오는 위화감과 이유 모를 위압감이 그녀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녀는 꾹 다문 입을 차마 열 수 없었다.
“너를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은 너를 죽이는 것과 같다. 난 내 딸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아. 네가 아비의 마음을 안다면, 다시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거라.”
충분히 기다려주었음에도 실비아는 답을 하지 못했다. 군터는 잔뜩 위축된 것 같은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 * *
“몇 번이고 말했으니 이제 충분히 숙지했겠지.”
“예.”
“미궁에 들어가면, 절대 아무것에도 손대지 마라. 벽은 물론,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도 손대지 마. 언제 어디서 기묘한 조화가 일어날지 모르니, 미궁에 들어간 후부터는 모페이브 공의 말에 전적으로 따른다.”
아드리안은 다시 한번 병사들을 세워두고 주의사항을 이야기했다.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이기에 지루할 법도 하련만, 병사들은 처음 듣는 것처럼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들은 아드리안이 쓸데없이 말이 많은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이 주의사항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터였다.
“미궁 내에서 마주치는 자들은 모두 잠재적인 적이라고 생각해라. 먼저 칼을 뽑아 휘두를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언제든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해. 술사들이 술법을 사용하는 데는 대부분 준비가 필요하니, 그들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피다가 낌새가 보인다 싶은 순간 바로 손을 써라.”
“예.”
아드리안은 병사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고서야 모페이브에게 고개를 돌렸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들어가지요.”
루멘과는 함께 하지 않기로 했다. 안 그래도 위험한 곳에서 믿을 수 없는 자와 함께 한다는 것은 위험부담을 배로 짊어지는 일이다. 루멘과 그의 일행이 함께한다면 그만큼 편해지기는 하겠지만, 모페이브는 그런 편리함 대신 안전을 택했다.
루멘과 헤어진 후. 사흘 동안 정보를 모으는 데 주력했다. 이 정적에 잠긴 도시에는 루멘 외에도 다른 술사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루멘처럼 미궁에 들어갔다가 나온 자들도 적지 않게 있었기에 그들에게 약간의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꽤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얻은 정보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니, 교차검증을 통해 한 번 걸러냈다.
“미궁의 입구는 세 곳입니다. 우리는 그중 남서쪽에 있는 입구를 이용할 겁니다.”
미궁의 입구에는 술사들과 그들의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이 여럿 보였다. 그들은 새롭게 나타난 모페이브와 아드리안 일행을 힐끗 보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든 말든, 아드리안은 언제든지 칼을 뽑을 수 있도록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주변의 동향을 살폈다.
“자. 내려가지요.”
지하 미궁이라는 말답게, 미궁의 입구는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 형식으로 되어있었다. 얼마나 깊이 이어지는지, 대낮임에도 그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모페이브가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아드리안이 그의 바로 뒤쪽에 따라붙고, 그 뒤를 병사들이 따랐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