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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61화 (661/1,064)

661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이런. 보아하니 아무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군. 소문만 듣고 덜컥 움직인 건가?”

사내가 살짝 혀를 차며 말했다. 아드리안과 모페이브는 이어지는 사내의 말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우선은 소개부터 합시다. 난 루멘이라 하오.”

“모페이브라 합니다.”

“아드리안.”

사내는 붙임성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이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말투도 그렇고 복색도 경험 많은 용병처럼 차려입었지만, 얼굴에는 흉터 하나 없었다. 모페이브는 한눈에 그가 술사임을 알아보았으나 아드리안은 그렇지 못했는데, 그래도 이런 요소들을 통해 사내가 칼밥을 먹고 사는 인생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놈이 이렇게 달라붙을 때는, 속에 품은 생각이 있기 마련이지.’

그 속내가 시커멓든 그렇지 않든 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이 도시에 대해 아는 것이 꽤 있는 듯하니, 적당히 어울려주면서 정보를 얻는 것도 좋을 터. 물론 속을 알 수 없는 자가 하는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으니, 듣기는 듣되 적당히 가려서 들어야 할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듣고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들이 들은 이야기는 아마도 사실일 거요.”

“사실이라 함은…….”

“군주의 유산 말이오. 유산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이 도시에 범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는 건 사실이라는 뜻이지.”

사내, 루멘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는 범상치 않은 무언가를 말하면서 욕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이 도시의 아래에 거대한 미궁이 있소. 사실 미궁인지 아닌지는 몰라. 처음 그것을 발견한 누군가가, 어쩌면 그 후의 누군가가 그것을 미궁이라고 불렀지. 그 뒤로는 모두가 그곳을 미궁이라고 부른다오.”

“미궁이라.”

“그곳은 정말 이상한 곳이오. 나는 술사로서 온갖 신비로운 것들을 경험했지만, 이 도시 아래에 잠든 미궁만큼 기이한 곳은 본 적이 없소. 그곳은 거대한 미로와 같소. 비현실적으로 비틀려있지. 그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이 세상과 단절되어, 동떨어진 미지 속에 파묻히는 느낌을 받게 되오.”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요? 어떤 곳일지 궁금하긴 하군.”

“가기 싫어도 가게 될 테고, 알기 싫어도 알게 될 거요. 어차피 그대들 역시 군주의 유산을 노리고 온 것 아니오?”

“물론 그렇긴 하지. 그런데 아직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 같소. 왜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해야 하지? 당신들은 왜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것이고?”

살짝 날이 선 말은 아드리안의 사나운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렸다. 루멘은 아드리안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살짝 움찔하는 것 같더니 곧 짐짓 여유로운 척 말을 이었다.

“말했듯이, 미궁은 거대하오.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요.”

“거대하다고 한들, 결국은 이 도시만 할 것 아니오.”

아드리안의 말에 루멘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랬다면 그대들에게 이리 말을 걸 필요도 없었겠지. 내가 말했잖소. 미궁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기이한 곳이라고. 그곳의 모든 것은 평범한 이들의 상식을 철저히 파괴하지. 그 거대한 미궁 속에서 사흘 밤낮을 한 방향으로 이동했지만, 끝에 다다를 수 없었소. 끝은커녕, 그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지.”

“그럴 수가 있나?”

“보아하니 그쪽…아드리안님이라고 했나? 술사가 아닌 모양이군.”

“그렇다면?”

“술법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오. 군주 쿠엘단은 하루 만에 하늘에 닿는 탑을 세웠다지? 그런 그가 제대로 공을 들였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미궁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않았겠소?”

“당신은 제국 출신이 아니로군.”

군주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추측한 것이다. 루멘은 숨길 생각은 없었는지 선선히 긍정했다.

“난 닐탄드 출신이오.”

아드리안도 모페이브도, 닐탄드라는 곳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어딘가에 있는 소국이리라.

“하지만 내 출신은 아무래도 상관없소. 중요한 건, 난 범죄자도 아니며 신의를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 또한 내가 그대들이 필요하듯, 그대들도 우리가 필요할 거요.”

“단언하는군.”

“지금 미궁은 굶주린 늑대들의 소굴이오. 무법지대가 따로 없지. 소위 지식의 탐구자라는 자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경쟁자들을 잔혹하게 제거하고 있어. 보물에 눈이 뒤집힌 거야.”

“동료가 필요하다는 말이군.”

“내게도, 그대들에게도.”

“만에 하나, 미궁에서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분배를 해야겠지. 모두가 만족하지는 못하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마 바로 답을 해주길 바라진 않겠지.”

“함께 갈 자들을 구하기 전까지는 기약 없이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처지요. 우리가 머무는 곳을 알려줄 테니 생각이 끝나면 찾아오시오.”

“머무는 곳?”

아드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심심하기 짝이 없는 외관의 창고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본래는 인형들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아니오. 저 모두가 이제는 주인 없는 곳이 되어버렸지. 인형들이 모두 죽었거든.”

“죽다니?”

“말 그대로요. 머리가 깨끗하게 비어 명령대로 움직일 줄만 아는 것들이, 명령을 받지 못하니 어찌 됐겠소.”

루멘은 창고에 인형들이, 정확히는 죽은 인형들이 가득하다고 했다.

아무도 인형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떠한 원리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지를 상실한, 그저 육신만 살아있을 뿐인 꼭두각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것들이 움직이는 것은 모두 쿠엘단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 텐데, 그들을 관리하는 쿠엘단이 사라졌으니 인형들의 모든 기능이 멈추어버린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기능에는 살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는 기본적인 행위도 포함이었다.

“모두 굶어 죽었는지 비쩍 말라 있더군. 그래도 연구를 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어 급한 대로 몇 구 챙겨서 방부처리를 해놨소. 만약 그대도 인형에 흥미가 있다면 창고를 뒤져보시오. 어쩌면 아직 썩지 않고 남아있는 시체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 말을 하며 루멘의 시선은 모페이브를 향했다. 이제 그도 모페이브가 술사이며, 아드리안은 모페이브의 호위 정도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마운 조언이오. 살펴보겠소.”

“우리가 머무는 곳을 알려주리다. 마음이 서면 찾아오시오. 아, 낮에 말이오.”

“불쑥 찾아가 놀라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소.”

“좋소. 그럼.”

모페이브와 아드리안은 루멘에게서 그들이 머물는 곳의 위치를 들은 뒤, 그들 무리와 헤어졌다.

그들은 적막한 거리를 걸으며 조금 전 루멘에게서 얻은 정보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일까요?”

“과장은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규모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사흘 밤낮을 이동해도 끝을 볼 수 없는 미궁이라니. 그런 것을 땅 밑에 지어놨단 말입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그자가 말하길,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술법이라고 했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럼 그 루멘이라는 자와 함께 움직이실 생각이신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드러낸 것은 그럭저럭 솔직해 보이더군요.”

그는 탐욕을 숨기지 않았다. 이 도시의 지하에 잠든 보물을 손에 넣겠다는 열망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누군가는 그런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아드리안은 음흉하게 속을 감추다가 등 뒤에서 칼을 꽂는 자들보다 차라리 솔직하게 욕망을 드러내는 자들을 더 선호했다.

“조금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막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며칠 정도 지체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겠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일단은 머물 곳을 구해야겠군요.”

“그자의 말에 따르면 주인 없는 창고는 널렸으니, 그중 하나를 골라서 쓰면 될듯합니다.”

그들은 적당한 창고 하나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썩은 내가 코끝을 찔렀다.

“그자의 말대로군요. 이건…….”

“음.”

헛간 같은 창고에는 시체가 십여 구 정도 널브러져 있었다. 족히 수백 마리는 되는 파리들이 시체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그 모습은 끔찍한 광경에 단련이 된 아드리안조차 바로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고약했다.

“다른 곳으로 가시죠.”

“다른 곳이라고 다를까요?”

몇 번 다른 곳을 찾아 움직였으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상황은 다 똑같았다. 모든 곳에 죽은 인형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모페이브와 아드리안은 개중 그나마 상황이 나은 곳을 골라 그 안에 있는 시체들을 치웠다. 냄새가 문제였지, 시체의 처리는 간단했다. 모페이브가 땅을 뒤엎고, 그 안에 시체들을 넣은 뒤 다시 덮기만 하면 끝이었다.

“냄새는 어쩔 수 없군요.”

아드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래 머물지는 않을 테니, 참아보도록 하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모페이브 공이 걱정될 뿐입니다.”

“한때는 이보다 더한 환경에서 몇 년을 지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과거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방치된 지하 무덤에서 며칠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보다 냄새가 좀 더 심하기는 하지만, 대신 뼛속까지 파고드는 음습함은 없으니 이 창고가 그때의 그 깨진 관 옆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이대로 밤을 보낼 수는 없으니, 몇 가지 조치를 해놔야겠습니다.”

루멘은 지하 미궁이 굶주린 늑대들의 소굴이라고 했지만, 그게 미궁에만 해당하는 말일까? 미궁 밖에도, 늑대는 아니더라도 들개들 몇 마리 정도는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경계의 비석. 약식이지만, 이 정도만 해도 하룻밤을 나기에는 충분하겠지.’

병사들을 세워두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몇 가지 간단한 술수를 사용하면 불침번을 세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모페이브 공. 헤이모라 밖에 주둔시켜둔 병사 중 일부를 들여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음.”

“이곳의 상황이 루멘 그자가 말한 것의 반만 되어도 문제가 상당히 심각합니다. 이목을 끌 것을 우려하다가 자칫…….”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이곳의 상황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드리안의 우려를 모페이브도 이해했기에, 병사들을 들여오자는 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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