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화
“이상한 곳이군요.”
모페이브는 아드리안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곧 답이었다.
그는 헤이모라로 들어선 후로 줄곧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헤이모라는 명목상 영지지만, 제대로 된 도시는 군주 쿠엘단이 머무는 수도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마을 수준이었고, 그마저도 난민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마을 주민들의 몰골을 보아하니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필시 어디에도 갈 수 없었던 자들이 마지막으로 찾은 도피처였으리라.
그러나 모페이브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초라한 마을들이 아니라 영지 전체에 퍼져있는 묘한 분위기였다. 깊게 가라앉아 있는, 짐승들조차도 입을 다문 것 같은 이상한 적막감.
“비슷합니다.”
“비슷하다니? 뭐가 말입니까?”
“이곳 말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비슷한 곳을 가본 적이 있지요.”
“그게 무슨, 아…혹시?”
“예.”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렌말입니다. 그곳이 이곳과 비슷했습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습니다. 그곳은 이곳보다 더…뭐랄까, 위협적이었지요. 불길했고요.”
렌에서의 기억을 떠올린 아드리안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 땅에서의 기억은, 아무리 대담한 그라고 해도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렇습니까?”
“예. 그런데 이곳은 불길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좀 꺼림칙하군요.”
“꺼림칙하다라…….”
“모페이브 공은 그렇지 않습니까?”
아드리안은 모페이브를 잘 몰랐다. 아드리안은 파헨델에서부터 군터를 따라 종군했었고, 모페이브는 테리브란에서 크렘보르 가문의 저택에 머물렀기에 만날 일이 없었다. 물론 이름 정도는 얼핏 들어보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술사인데 집사 노릇을 하는, 이상한 자라는 편견 아닌 편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헤이모라까지 오는 동안 겪은 모페이브는, 약간 샌님 같은 면모가 있기는 해도 꽤나 괜찮은 사내였다. 활발한 아드리안과 정적인 모페이브는 얼핏 보면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았지만, 모페이브의 푸근함과 배려심은 다소 거친 면이 있는 아드리안마저 포용하는 힘이 있었다.
술사라고 하여 내심 술사들 특유의 괴짜 같은 면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아드리안은, 의외로 소탈한 모페이브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와 적잖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모르고 있던, 과거 군터가 바크렌에 있었을 당시의 이야기 같은 것들은 그로서도 꽤 흥미로운 주제였다.
“같은 생각입니다. 영 꺼림칙하군요.”
“이거, 설마하니 어디선가 괴물이 툭 튀어나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백성들의 말을 들어보면 외지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이곳은 평안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요. 군주가 다스리는 땅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사고가 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말을 들어보면…솔직히 모페이브 공도 짐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안다. 그러나 제국민인 아드리안으로서는 머릿속에 떠도는 말을 입에 담기가 힘들 터였다.
“예. 짐작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반신반의 했습니다만…이곳에 온 뒤로는, 거의 확신하고 있습니다.”
“먼저 온 술사들이, 그리고 지금도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는 자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지 않습니까. 이곳의 평안은 깨진 지 오래입니다. 만약 군주께서 멀쩡하셨다면, 저들이 문제를 일으키도록 놔두셨을 리가 없지요. 이야기처럼 영혼을 빼앗아버리지는 않더라도, 무슨 조치를 취하셨을 것 아닙니까.”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아드리안도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가보면 알겠지요. 그리 멀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예. 이제 한 이틀 정도면 된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기준이다. 전원이 말을 탄 그들 일행의 경우,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하루면 충분할 것이다.
“그나저나 어찌 생각하십니까?”
“어찌 생각하다니, 무엇을 말입니까?”
“그 소문 말입니다. 사실일까요?”
“글쎄요. 뭘 모르는 백성들이 하는 말입니다. 쉽게 믿기는 힘들지요.”
“맞는 말씀이지만, 저들도 다 알 정도면 이미 이곳에서는 파다하게 퍼졌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뭔가 있으니까 소문이 퍼졌겠지요.”
맞는 말이다. 벌써 지나친 마을만 다섯 개가 넘어가는데, 그 모든 곳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소문이라는 것이 뜬소문일 때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다르다. 헤이모라에 몰려들고 있는 술사들이 다 바보겠나. 먼저 온 자들은 벌써 한참 전에 헤이모라에 왔을 텐데, 그자들이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헤이모라에 계속 머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소문이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더라도, 분명 뭔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알고 계시겠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 그렇겠지요.”
군주의 사망, 혹은 실종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찌 될까. 엄청난 파급이 있을 테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제대로 짐작하지는 못하겠지만…적어도 헤이모라는 지금보다 훨씬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쿠엘단의 유산을 찾는 것도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워질 터.
그러니 보물을 노릴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지금뿐이다. 문제는 이곳에 몰려든, 그리고 앞으로 몰려들 술사들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는 것.
“제가 술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지식욕이 어마어마한 자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금덩이보다도 지식을 담은 책 한 권을 더 중시한다지요? 세상에는 은화 한 닢을 두고도 피가 튀는 일이 흔합니다.”
의혹이 일고 있다지만, 그래도 이곳은 제국의 금지다. 이곳에 몰려든 술사들은 욕심에 반쯤 정신이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자들이라면, 경쟁자에게 음험한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어떻게 할까요? 눈에 띄는 대로 손을 쓰는 것이 편하긴 할 겁니다. 제가 술법은 잘 모르지만, 목이 날아가도 멀쩡한 자는 없을 것 아닙니까?”
“하하. 물론 그렇겠습니다만,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이곳에 몰려든 자들이 적지 않으니, 특별히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저들이 우리를 적대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럴까요?”
아드리안은 마땅찮은 기색이었다. 모페이브는 그가 헤이모라에 있는 술사들 모두를 잠재적인 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틀린 것은 아니지.’
적은 아닐지라도, 경쟁자인 것은 맞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드리안의 말도 잔혹하기는 하지만 일리는 있다. 경쟁자를 모두 제거해버리면 목적을 달성하기도 수월해질 터.
그러나 그런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군대를 몰고 온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주변의 이목을 끌게 된다.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군.’
군터를 따른 후로는 안락한 삶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 전, 모페이브는 도망자였다. 그의 스승이, 그가 몸담고 있던 곳이 제국에서 이단으로 선포한 사교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밖을 돌아다니면서는 따라오는 자가 있는지 의심하며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고, 밝은 하늘을 두려워해야 했다.
그때의 기억은 군터를 만나고 난 이후로 조금씩 흐려져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때는 그랬었지, 하고 추억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그때의 기억과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뒷덜미를 뻣뻣하게 굳히는 긴장감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친숙했다.
‘쿠엘단의 유산이라.’
군주에 대한 경외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한다. 그는 제국민이지만, 제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엘단을 경외하지는 않더라도, 그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술사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직접 그가 술수를 부리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전해지는 이야기 중 백분지 일만 사실이라고 해도 분명 그는 세계 최고의 술사라는 칭호가 부족하지 않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런 자의 유산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전지의 군주가 남긴 유산이라면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만약 그자가 자신의 지식을 열에 하나만이라도 남겨두었다면, 그것은 술사들에게 있어 세상에 더없는 보물일 것이다.
“저곳인 것 같군요.”
한나절을 이동하니, 헤이모라의 수도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영지에는 헤이모라라는 이름이 있지만, 영지의 수도에는 이름이 없었다. 쿠엘단이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영지의 백성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이 도시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곳을 ‘탑의 도시’라고 불렀다. 도시 한가운데에 우뚝 선 거대한 탑이 그들의 모든 시선과 생각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도시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 탑을 빼놓을 수 없었다.
“탑의 도시라더니, 탑은 온데간데없군요. 그렇다면 이제 이곳을 뭐라 불러야 할까요?”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딱히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닐 터였기에, 모페이브는 이 적막한 도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시에는 성벽이 없었다. 그런 데다 지대도 평평하여 도시 전체를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믿기 힘들었는데, 정말이었군요.”
탑의 도시는 독특한 곳이었다. 이 도시는, 도시면서도 거주민이 한 명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쿠엘단의 인형들뿐이었다. 영혼을 빼앗기고 이지를 상실한, 그저 숨을 쉬고 움직일 뿐인 인형.
그러니 탑의 도시에 집은 없었다. 무척이나 성의 없게 지어진, 창고인지 오두막인지 모를 것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을 뿐.
“아. 보물을 찾아온 또 다른 탐험가로군.”
모페이브와 아드리안이 도시에 들어섰을 때, 얇은 가죽 갑옷을 입은 사내가 다가왔다. 그의 뒤쪽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자들이 네 명 있었는데, 모페이브는 갑옷을 입은 사내가 술사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뒤쪽은…호위인가? 용병?’
모페이브가 그들을 보며 생각하는 사이, 아드리안이 앞으로 나섰다.
“그런 셈이지. 그쪽도?”
“물론. 그게 아니라면 이 무덤 같은 곳에 왜 왔겠소.”
“무덤?”
“쿠엘단 전하가 승천하셨지. 물론 그분의 영혼은 천상의 옥좌로 향했겠지만, 그 육신은 땅에 잠들었을 테니 무덤이라 할밖에.”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하는군.”
사내가 피식 웃었다.
“이거 왜 이러시오. 그대들도 보아서 알 것 아니오? 송곳탑이 사라졌소.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디뎠음에도 벌이 내리지 않았지. 이곳에 모인 자들이 다 바보가 아니라오.”
“그렇다고 칩시다. 그대들은 보물을 찾아 왔다면서, 보물은 안 찾고 여기서 뭘 하는 거요?”
“함께 할 자들을 찾고 있지.”
“함께 할 자들?”
“그렇소.”
사내가 아드리안과 모페이브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미궁에 들어가기에는 우리 쪽의 인원이 너무 적거든. 보물을 찾아 이곳에 왔다면,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게 어떻겠소?”
사내의 말에 아드리안은 물론, 모페이브까지 표정이 변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