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9화
군터는 자이드라 멕시스와 함께하기로 했다. 만약 그가 뭔가 대단한 것을 요구한다면 조정에서 덜떨어진 승냥이 같은 작자들에게 물어뜯길지언정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그가 요구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조정의 회의에서 말을 몇 마디 거들어주는 것. 그것이 그가 바라는 전부였다. 일단은 말이다.
“나는 서부 총독의 말에 동의하오.”
길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부분 이 한 마디면 충분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현란한 말솜씨로 장황하게 떠들어대면, 그와 함께하는 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힘을 싣는다. 그러면 소위 중앙의 귀족이라는 자들이 부당함을 성토하는데, 그러면 바로 시장바닥을 방불케 하는 설전의 장이 펼쳐진다.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안 될 것은 또 뭐요! 그러는 그대야말로…….”
광대들의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무대 위의 광대들은 우스운 몸짓과 표정으로 사람을 웃긴다면 이들은 한껏 화가 나서 시뻘게진 얼굴로 웃긴다는 것일까. 자기들은 더없이 진지하겠지만, 군터에게 있어서는 그런 그들의 모습이 동전 몇 푼에 재주를 파는 광대들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였다.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진짜 광대들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광대들은 사람을 웃기려는 의도를 가지고 우스운 행동을 하지만, 저들은 그런 의도 없이, 자기들은 심각한 채로 사람을 웃겼다. 더 대단하다면 대단한 재주 아닌가?
그들은 온갖 것들로 싸웠다. 세금을 어디서 더 거두고 덜 거둬야 한다느니, 어디를 거점 도시화해야 한다느니, 그야말로 온갖 주제를 가지고 치열하게 다퉜다. 이렇게 해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것처럼 으르렁대던 그들은 저러다 목이 상하는 건 아닐까 싶을 때 즈음 어떻게든 합의를 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크렘보르 장군에게 가져다 대는 그 잣대는 너무 가혹하오. 그는 전하께서 직접 발탁하신 장수이며, 목숨이 위태로워지기 일쑤인 최전선에서 싸워왔소. 그 룬차이 전하와 맞서기까지 했지. 그의 용맹함과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오. 그런 그가 이번에도 험지로 나가 생사의 기로를 몇 번이나 넘나들었고, 끝내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소. 비록 그 과정에서 피해가 컸다고는 하나, 바꿔 말하면 그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가 맡은 임무가 어려운 것이었다는 뜻일 테지. 온 힘을 다해 사선을 넘어, 가까스로 살아남아 돌아온 자에게 피해가 너무 컸다며 벌을 내리거나, 내려야 할 상을 내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누가 위험한 일을 맡으려 하겠소?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저마다 몸을 빼려고 하겠지.”
자이드라 멕시스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체슈퍼 캄브라이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 외 귀족들도 마찬가지.
논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줄기차게 신경 거슬리는 말을 내뱉던 체슈퍼 캄브라이는 입을 바늘로 꿰매기라도 했는지, 자이드라 멕시스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반박할 말이 없긴 했다. 자이드라 멕시스의 말이 정론이기 때문이다. 위험한 임무를 완수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보았다고 해서 그를 벌하거나, 상을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누가 용기를 내서 나서겠는가.
그러나 어제까지만 해도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억지를 부렸던 체슈퍼 캄브라이였기에, 자이드라 멕시스에 맞서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자이드라 멕시스와 군터를 번갈아 보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날 뿐.
그 모습이 마치 피아구분을 하는 짐승과 같아 보였다. 이미 대놓고 이를 드러낸 주제에 이제와서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장군.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됐소.”
그날 저녁. 자이드라 멕시스를 다시 만났을 때,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저들의 눈에 장군은 나와 한 마차를 탄 사이로 비쳤을 거요.”
“내 수하가 말하기를, 정치판이라는 것은 전장과는 달라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될 수도 있다더군. 오늘의 아군이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고.”
“하하. 맞는 말이오. 한 마차를 탔다고 해도 끝까지 같이 가라는 법은 없지. 중간에 내릴 수도 있을 테니까.”
유쾌한 웃음을 흘리지만, 그 속이 어떨지는 모른다. 그와 손을 잡기는 했으나 타라냐드의 여우라는 별명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속이 음흉한 작자다. 조정에서 오만한 귀족들을 상대로 말재주를 뽐내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겉으로 짓는 사람 좋은 웃음이 잘 꾸며진 가면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허나 그렇다 한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면 계속 함께 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소?”
“맞아떨어진다면, 말이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만. 답해주시겠소?”
“묻는 것은 자유요. 마찬가지로 답하는 것도 내 자유지.”
“장군은 무엇을 바라시오? 아니. 원하는 게 뭐요?”
“음?”
자이드라 멕시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무표정하지만, 입꼬리가 살짝 들린 기묘한 표정을 하고서 군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사람이라는 족속이 원하는 것은 대개 다 비슷비슷하오. 여인, 재물, 권세……. 그것들을 탐하고, 또 탐하지. 그들의 욕심은 끝이 없소.”
“…….”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장군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소. 처음에 봤을 때는 그저 명예욕에 심취한 군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후로 장군의 행보를 살펴보니 그게 아닌 것 같더군. 그리고 이번에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런 내 추측에 확신을 가지게 됐소. 장군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를 보면 얼마나 봤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크게 내세울 것은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를 꼽자면 그것은 안목이오. 특히 사람을 보는 눈은 제법 준수하다 자부하지. 두 번을 봐서 모를 사람이라면 세 번을 보든, 네 번을 보든 마찬가지요.”
“안목에 자신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한 번이면 족하오. 두 번이면 틀리는 법이 없지. 두 번을 보고서도 판단이 서지 않는 사람은 이제껏 거의 본 적이 없소.”
군터는 자이드라 멕시스의 시선에 묘한 거부감을 느꼈다. 해부를 당해본 적은 없지만, 당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그러는 그대가 원하는 것은 뭐지?”
“권세.”
마치 물어보기를 기다렸다는 듯, 즉답이 튀어나왔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방금 목소리만큼이나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작게는 나 자신, 크게는 멕시스 가문의 권세가 더 커지고 굳건해지기를 원하오. 이제껏 내가 해온 모든 일은 다 그것을 위한 것이었소.”
대놓고 당당히 그리 말하니, 권세를 탐하는 것이 무슨 대단히 숭고한 일인가 순간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권세나, 그것을 탐하는 것이 부정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끊임없이 가문을 부흥시켜라.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나는 선친께 어려서부터 그리 배워왔소. 그리고 내 아들도 그리 가르쳤지. 난 권세를 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소. 더 큰 권력을 바라는 것은 세상 모든 권력자들의 본성이니까.”
“지금도 충분하지 않나? 더 큰 권력을 가져서 뭘 어쩔 셈이오? 왕이나 황제라도 되고 싶은 건가?”
“장군. 우리끼리 있는 자리라지만 말을 조심하는 것이 좋겠소. 목 날아가기 좋은 소리를 그렇게 함부로 입에 담으면 안 되는 거요.”
왕이니 황제니 하는 말은 자이드라 멕시스에게도 부담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표정을 달리하며 군터에게 당부하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사람의 욕심에 충분이라는 것은 없소. 없으면 가지고 싶고, 가지면 더 가지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그렇기에 권력인 것이오. 즉, 장군의 말은 전제부터가 잘못 되었다고 할 수 있소.”
“글쎄. 나는 모르겠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장군이 특별한 거요. 아마 전하께서 장군을 총애하시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겠지. 아무리 명예에만 목을 매는 자라 할지라도, 권력의 중심에 가까워지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소. 세상을 내 맘대로 주무르는 것 같은 느낌은, 그 희열은 경험해보지 않은 자는 결코 알 수 없는 감각이지. 그 어떤 마약보다도 강렬한 자극이야.”
자이드라 멕시스의 목소리에 열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가 군터를 다시 본 순간, 그런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장군을 이해할 수가 없는 거요. 장군은 내 이해의 범주를 명백히 벗어나 있소.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것인가 신기할 뿐이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마 전하께서 장군을 총애하시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가 아닐까 싶소.”
총애? 총애라. 다른 신하들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총애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 내 차례는 끝난 듯싶소만.”
“내가 원하는 건, 가족의…자식들의 평안이오.”
“가족의 평안? 애매하군.”
“복잡하게 돌려서 생각할 필요 없소. 말 그대로이니.”
“그거라면…이미 이룬 것 아니오? 장군은 이미 일가를 이뤘소. 조정의 누구라도 장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지. 그것은 즉, 크렘보르 가문을 존중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오.”
“모르겠군. 어제까지만 해도 미친 개처럼 달려들던 자들이 존중이라.”
“그거야 목적이 있기에 일부러 거칠게 달려들었을 뿐이지. 장군이 잘 아는 전쟁으로 비유를 하자면, 눈앞에 있는 적이 강대하다고 해서 싸우지 않을 수는 없지 않소? 싸워야 한다면, 적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들이받는 수밖에 없지.”
“제법 괜찮은 비유로군. 아무튼, 난 답을 해줬소.”
진정이다. 벨리사가 일찍 떠나버린 지금, 보리스와 실비아가 군터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조금 더하자면 이제껏 그를 따라온 수하들 정도일까. 오직 그들만이, 식어버린 마음이 완전히 차갑게 굳어버리지 않도록 약간의 온기를 전해준다.
“책임감이오?”
“이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소.”
자이드라 멕시스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멈춘 사이, 그의 표정은 또 한 번 바뀌었다.
“장군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뵀던 분이 떠오르는구려.”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듣게 될 거라 생각했다. 과거를 더듬는 노인의 표정이, 누가 봐도 말하고 싶은 자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사를 모두 초월한 것 같은 분위기. 그분께서도 그러셨소. 억지로 끈을 부여잡고는 있지만, 그것은 언제든 끊어져버릴 것 같은 너덜너덜했지.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 초라한 끈을 꼭 쥐고 놓지 않으려 하셨소. 내가 궁금해 여쭤보니,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쥐고 있다 하셨지.”
“그게 누구요.”
“장군도 아실 거요. 그대가 상대한 바 있던 룬차이 전하. 그분이시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