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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58화 (658/1,064)

658화

“흐음.”

군터는 힘든 일을 떠넘겼다고 생각하며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졌지만, 사실 모페이브는 그리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숙원과 같았던 고렘 연구를 끝낸 후, 평생 느끼지 못했던 큰 성취감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기쁨이 어느 정도 가신 후에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공허함을 느꼈다. 어쩌면 세상에 큰 자취를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목표를 이뤘다는 뿌듯함이 흐려지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뭘 해야 하는가.

목표를 이뤘으니 이제 목표가 사라진 셈이다. 목표 없이 살아도 문제는 없지만, 모페이브는 그런 삶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처럼 연구에 몰두하는 술사들은 대개 그러했다. 긴 시간, 어쩌면 평생 한 가지 목표에 매달려 살아온 자들은 목표 없는 삶을 견디기 힘들어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군터가 툭 하고 던져준 이 어려운 과제는 모페이브에게 있어서 새로운 목표이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요는 단단한 그릇, 아니 용기를 만드는 것이다. 소모되는 힘을 지속적으로 보충하거나, 아니면 소모를 최소화 할 수 있게끔 해야 해.’

군터의 구상은 시체를 이용하는 사령술사들이 흔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차이가 있다면 군터가 구상한 것은 더 구체적이라는 점일까. 역시 전장에서 직접 숱한 전투를 치른 군인이다 보니 보통의 사령술사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듯했다.

막연하게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용도와 특징을 분명하게 하니 연구하기가 한결 편했다. 생전 가본 적도 없는 곳을 향해 가지만, 그래도 손에 지도 한 장은 쥔 느낌이라고 할까. 물론 그 지도라는 것이 상당히 불친절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술식을 찾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차선은 없는 걸까? 재료를 달리 해본다던지…….’

답을 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고민해보았다. 알지도 못하고 감도 안 잡히는 술식을 당장 어디서 구하기보다는 그릇이 될 법구의 재료에서 방도를 찾아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되면…결국은 차근차근하는 수밖에 없겠군.’

부지런히 발품도 팔아보고, 쓸 수 있는 만큼 사람을 써보기도 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단기간에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는 힘들 것 같았다.

‘호닝거 공이 연구하는 것과 상당부분이 겹치는 것 같은데…….’

호닝거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고렘의 전력화다. 그를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이 군터가 요구한 것과 상당 부분 겹치는 면이 있었다. 그렇다면 함께 연구를 진행하는 것도 좋아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호닝거를 믿고 있지만, 사령술에 대한 연구는 아무리 그를 신뢰한다고 해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모페이브 자신이 아닌 군터가 연관되어 있기에 더더욱.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야.’

그렇게 마음먹고 차분하게 연구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저…혹시 알고 계십니까?”

군터가 붙여준 부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군터가 모페이브의 호위 겸 심부름꾼으로 붙여준 인사였는데, 그동안 모페이브가 그를 통해 모든 일을 진행했던 터라 그 역시 모페이브가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뭘 말인가?”

“얼마 전부터 헤이모라로 가는 이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술사들이라고 하던데…혹시 들어보셨는지.”

“아니. 처음 듣는 이야기네.”

뜬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여 고개를 갸웃한 모페이브였지만,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가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부관이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헤이모라는…….”

“영지지. 쿠엘단 전하의.”

“예. 다른 영지들도 외지인의 출입은 드문 편이지만, 헤이모라 같은 경우는 거의 금지 취급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영지라는 것은 황제가 군주들에게 내려준 땅이다. 수조권은 물론,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이 생사여탈까지도 모두 군주의 손에 달렸다. 마치 제국 내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국가와 같았다. 그러니 허가받지 않은 자가 그 땅에 발을 디딘다는 것은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서는 것과 같으며, 자신의 목숨을 군주에게 맡기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제국민은 군주들의 영지에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특히 그중에서도 쿠엘단이 다스리는 헤이모라는 금지라고 불릴 만큼 외인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그곳에 함부로 발을 들인 자는 영혼을 빼앗기고, 그 육신은 쿠엘단의 인형이 되어버린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헤이모라에 향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도 술사들이?

백성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관리들의 수탈, 혹은 다른 이유로 먹고살기가 막막해진 백성들이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라는 마음으로 군주들의 영지에 숨어드는 일은 종종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것도 아니고, 멀쩡히 대우받으며 사는 술사들이 왜 제 발로 금지에 들어간단 말인가.

“술사들은 결코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지. 하물며 헤이모라라니……. 혹 어째서인지 아는가?”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언젠가부터 탑이 사라졌다더군요.”

“탑?”

“그…송곳 탑 말입니다.”

송곳 탑.

헤이모라의 중심부에 있다는, 쿠엘단이 세운 거대한 탑이다. 소문에 의하면 탑이 얼마나 높은지, 탑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있다 하여 ‘하늘 탑’이라는 이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헤이모라 바깥에서 보았을 때, 그 외형이 뾰족한 송곳과 같아서 보통은 송곳 탑이라고 불렀다.

“송곳 탑이……?”

송곳 탑은 쿠엘단의 거처로 알려져 있었다. 헤이모라를 다스리는 군주는 그 탑의 꼭대기에서 자신의 영지를 내려다본다고 했다. 때문에 쿠엘단은 그의 허락 없이 자신의 영지에 들어온 침입자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으며, 곧장 침입자들에게 끔찍한 벌을 내린다고.

그런데 그런 송곳 탑이 사라졌다? 모페이브는 믿을 수가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부관이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헤이모라의 경계까지 가본 자들도 송곳 탑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확실한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송곳 탑이 사라진 것은 분명합니다.”

“으음.”

쉽게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처음 쿠엘단이 송곳 탑을 세울 때도, 아무것도 없던 평평한 땅에 그 홀로 거대한 탑을 세운 것이었으니까. 그것도 단 이틀 만에.

한순간에 생긴 탑이니,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그러니 가능 불가능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문제는, 왜 사라졌느냐는 것이다.

“쿠엘단 전하께서…헤이모라를 떠나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떠났다 함은?”

“그, 승천하셨다는 소문이…….”

승천.

점잖게 표현했지만, 죽었다는 이야기다. 군주들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이 들었다면 대노할 이야기지만, 그게 아닌 이들은 군주들이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당초 승천이라는 표현 자체가, 옛 전쟁에서 전사한 군주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 아니던가. 이 땅에 현신한,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는 황제의 아래에서 성전을 지휘한 군주들. 그들은 거대한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 그 험난한 세월 속에 몇 명의 군주가 쓰러졌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육신은 사그라졌을지언정, 그 혼은 천상으로 승천하여 원신의 옥좌에 안착한다. 제국민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모페이브나, 지금 그에게 말하고 있는 부관 같은 이들은 그런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황제가 신의 현신이라느니, 군주들의 영혼은 불멸한다느니 하는 말들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제국 벽지, 즉 정복 전쟁 말기에야 제국에 복속된 땅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황도나 내주(內州)의 백성들처럼 맹목적으로 황제와 군주들을 경외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그 황제조차도 결국 서거하지 않았던가. 물론 독실한 여명 교단에서는 황제의 죽음에 대해 온갖 그럴싸한 이야기들을 가져다 붙였고, 지금도 붙이고 있지만.

“그래서?”

“그분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그분의 지식과 유산을 영지에 남겨놓으셨다는 이야기가 도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쿠엘단 전하는 세상 제일의 술사시지 않습니까. 하여, 지식을 갈구하는 술사들이 부나방처럼 몰려들고 있다는…….”

“허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부관을 타박하지는 않았다. 그 나름대로는 연구에 난항을 겪는 자신을 위해 말을 꺼낸 것 아니겠나.

“추측일 뿐 아닌가. 만약 쿠엘단 전하가 승천하신 게 아니라면, 멋대로 헤이모라에 발을 들인 이들은 모두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되겠지.”

“이미 들어갔다가 나온 자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벌써 한 달이 넘게 헤이모라에 머물고 있는 이들도 있다는군요.”

“음?”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은 추측일 뿐입니다만, 억측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

모페이브가 입을 다물었다.

원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생각이었지만, 여기까지 듣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 * *

결국, 모페이브는 헤이모라로 가기로 결정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헤이모라에 있을지 모를 쿠엘단의 유산을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솔롬에서 헤이모라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충분한 호위 병력을 이끌고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필요하다고 하니 보내드리긴 하겠습니다만, 조심하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군터가 자신이 부재한 동안 모페이브를 최대한 지원하라고 당부했기에, 군터를 대신해 솔롬을 지키고 있던 살라스는 모페입의 호위로 아드리안과 기병 이백을 붙였다. 물론 이 병력이 모두 헤이모라로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쿠엘단이 승천을 했든 안 했든, 아직 헤이모라는 군주 직할 영지다. 그런 곳에 병력을 이끌고 들어갈 수는 없다. 대부분의 병력은 아마 헤이모라의 경계 즈음에서 대기해야 할 터. 그러나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확인만 할 겁니다.”

“확인을 했는데 그 유산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어쩔 거요?”

“그때는…….”

아드리안의 물음에 모페이브가 말끝을 흐렸다.

“그때 가서 봐야 알겠군요.”

“알겠소. 나만 믿으시오. 아무 문제 없도록 선생을 지킬 테니.”

“하하. 든든하군요.”

그렇게 모페이브와 아드리안, 그리고 솔롬의 병사들은 헤이모라로 떠났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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